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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Metamorphosis

〈란〉(1985)

by Albert 이홍규 Mar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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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왕: 우리가 태어날 때, 울고 있는 이유는 바보들의 무대에 도착했기 때문이지.

출처: 『리어왕』, 4막 6장

상황: 리어왕, 두 딸에게 배신당한 후 미쳐버린 채 방랑하다가 글로스터와 에드거를 만나지만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내용을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겠지만, 역사적인 리어왕, 또는 레이르왕에 대해서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역사상 레이르왕에 대한 언급은 12세기의 가톨릭 수도승 몬머스의 제프리가 집필한 『브리타니아 열왕사 (Historia Regum Britanniae)』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책은 오늘날 레이르왕에 대한 기록보다는 아서 왕 전설의 원전이 되는 사료로 유명하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 및 교수로 재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몬머스의 제프리는 브리튼 각 지역에 야사로 전해 내려오는 전승과 지역 특유의 전설을 모아 일원화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이는 1000년이 넘는 기원 후의 역사 내내, 로마, 켈트, 픽트, 앵글, 색슨, 바이킹 등 수많은 외세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단일 민족성이 희미해져 가는 '브리튼'에게 브리튼 인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한 그가 가장 처음으로 눈을 돌린 기원은 당연하지만 처음으로 영국에 문명을 전파한 로마인들이었다.


몬머스의 제프리가 열왕사를 집필하기 약 1200년 전,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또한 제프리와 유사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는 로마가 그리스와 대비되는 어떠한 집단적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의 역사를 찾아주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역사와 전설 경계에 서 있는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라이벌인 트로이로 눈을 돌렸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 인물 중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으로 선정하였는데, 그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신성을 지니고 있고, 트로이 왕인 프리암의 조카로 제왕성 또한 지니고 있으며, 때문에 내용 적으로는 비중이 크지 않은 일리아스』 내에서도 보이는 용맹함과 신들의 애정도는 여타 주연에도 필적한다. 또한 트로이 전쟁 후의 종적이 묘연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도 용이하였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가 직접 집필한 일리아스의 후속작 오디세이아가 오디세우스의 귀향사를 다룬다는 점에 착안하여, 아이네이아스가 새로운 고향이 될 로마를 찾는 내용의 아이네이스를 집필하고, 로마 제국의 뿌리를 트로이와 연결시켰다.


리어왕/레이르왕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몬머스의 제프리가 비슷한 목적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인지,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시작을 아이네이아스의 손자 브루투스가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해 브리튼 섬으로 찾아오는 이야기로 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약 기원전 8세기경,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의 지방에 내려오는 용사들의 전설을 하나의 커다란 서사 구조 아래 통합하기 위한 작업이었으며, 흔히들 그리스 암흑기라 부르는 시기의 종식이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새벽으로 평가된다.


즉, 트로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테네, 로마, 브리튼의 학자들에 의해 민족적 자체성으로 부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문화적 전유(appropriation), 민족적 사유(privatization) 기획으로 변주되며 재창조된 것이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에서 트로이 전쟁을 다시 한번 변주한 몬머스의 제프리, 그리고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역사적 전승의 레이르왕을 다시 변주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그리고 그를 영상화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을 감상하다 보면, 어떠한 서사를 전달하는 화자의 목적에 따라 서사가 변화하는 과정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해피 엔딩과 새드 엔딩

나카다이 타츠야 (이치몬지 히데토라 역), 〈란〉(1985)나카다이 타츠야 (이치몬지 히데토라 역), 〈란〉(1985)


리어왕:
내 가여운 똥강아지도 죽었구나! 안돼, 안돼, 안돼, 삶이여!
왜 개도, 말도, 쥐도 살아가는데,
너는 숨 쉬지 못한단 말이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출처: 『리어왕』, 5막 3장

상황: 리어왕, 코델리아의 시체를 안고 반쯤 미쳐서 등장하다.


몬머스의 제프리가 집필한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등장하는 레이르왕(Leir of Britain)은 지금의 잉글랜드 레스터(Leicester) 지방의 시조가 되는 인물로 전해져 오는데,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내용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큰 차이가 없다. 약 기원전 8세기 경의 영국, 나이 든 레이르왕은 고노릴라, 레간, 코르델리아라는 세 딸을 가졌는데, 딸과 사위들에게 왕국을 유산으로 물려줄 때가 되자, 고노릴라와 레간은 아버지에게 아부를 한다. 하지만, 레이르가 가장 총애했던 막내딸인 코르델리아는 굳이 아부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격노한 레이르는 코르델리아를 추방하고, 고노릴라와 레간에게 왕국을 나누어 주지만, 곧 두 딸은 부친을 부양하는 임무를 성가시게 여기고, 아직 레이르가 가지고 있는 왕국의 남은 땅을 노리며 그의 기사들을 해고한다. 레이르는 두 딸에게 배신당한 것에 격노하고 단 한 명의 기사와 함께 추방생활에 나선다.


여기까지가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레이르왕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공통적으로 풀어내는 서사이다. 몬머스의 제프리에 따르면, 레이르는 프랑스로 넘어가, 프랑스의 왕과 결혼한 막내딸 코르델리아에게 용서를 빈다. 코르델리아는 부친을 용서하고, 병력을 모아 두 언니를 공격해 레이르의 왕국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다시 왕위에 오른 레이르는 3년 동안 통치하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코르델리아가 그의 뒤를 이어 왕국을 물려받는다.


지금은 모든 이가 알다시피,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집필하며 이러한 내용의 전승을 비극으로 바꾸었다. 리어왕은 코델리아와 화해하고, 프랑스 왕의 군대와 함께 영국으로 진격해 오지만, 오히려 브리튼 군대에게 패배하고, 리어왕과 코델리아는 포로로 잡힌다. 코델리아는 사형당하고, 리어왕은 딸이 죽은 슬픔으로 인해 죽는다.


물론, 열왕사에서 코르델리아의 통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언니인 고노릴라와 레간의 아들들에게 왕위를 빼앗겨, 자결하고 만다.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엔딩은 이러한 열왕사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편집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작가들이나, 관객들 또한 이러한 편집이 너무 과했다고 느꼈던지, 네이험 테이트(Nahum Tate)라는 작가는 셰익스피어 사후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1681년, 원작을 해피 엔딩으로 각색하고 광대의 역할을 삭제한 리어왕의 역사 (The History of King Lear)를 무대화한다. 그 후 영국의 연극 무대를 지배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아니라 테이트의 리어왕의 역사였으며,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다시 무대화되기 시작한 것은 1756년, 심지어 광대의 역할이 무대로 돌아온 것은 183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실제 원전이 되는 브리타니아 열왕사,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그리고 테이트의 리어왕의 역사, 세 작품이 서사의 커다란 흐름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종막, 즉 리어왕과 코델리아의 운명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테이트의 버전에서는 코델리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에드거와 결혼하며, 광대가 존재하지 않지만, 이는 테이트가 활동했던 영국의 왕정복고 시절의 문화적 유행에 따른 편집이었고, 리어왕의 이야기 자체는 결국 엔딩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의식이 완전히 바뀐다.


더 깊게 고민해 본다면, 해피 엔딩이었던 원전을 새드 엔딩으로 바꾼 셰익스피어, 그를 다시 해피 엔딩으로 바꾼 테이트 두 작가 모두 어떠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테이트 본인은 셰익스피어의 각색에는 아직 가공되지 않은 보석이 있다고 느꼈으며, 자신의 각색으로 인해 그 보석이 빛을 발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설명했다 (출처).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원전을 새드 엔딩으로 각색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리어왕을 〈란〉으로 각색한 편집점을 감상하다 보면, 창작과 편집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셰익스피어가 엔딩을 바꾼 이유에 대해 즐거운 상상을 해볼 수 있게 된다.


거장의 광기 어린 늘그막

나카다이 타츠야 (이치몬지 히데토라 역), 〈란〉 (1985)나카다이 타츠야 (이치몬지 히데토라 역), 〈란〉 (1985)


광대: 아저씨, 만약 아저씨가 내 광대였다면, 정해진 시간 전에 늙어버린 죄로 두들겨 팼을 거예요.
리어왕: 그것이 무슨 의미냐?
광대: 아저씨는 지혜로워지기 전에 늙어버렸거든요.

출처: 『리어왕』, 1막 5장

상황: 리어왕, 큰 딸 고네릴에게 수모를 입고 추방당해 둘째 딸 리건에게 몸을 의탁하러 출발하기 전, 광대에게 놀림당하다.


1943년 〈스가타 산시로〉로 데뷔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1965년 〈붉은 수염에 이르기까지 22년 동안 23편(공동 감독이었지만 후에 자신의 작품집에서는 제외한 제외), 즉 데뷔 후 매년 1개 작품 개봉이라는, 대단히 왕성한 다작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66년부터 93년 마지막 작품인 〈마다다요에 이르기까지는 27년 내 단 7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본인이 1981년 뉴욕타임스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자면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1964년 〈붉은 수염 연출 중 제작자들과 빚었던 불화와, 1970년 미국과 일본이 공동 제작한 〈토라! 토라! 토라!의 감독직을 중도 사퇴하게 된 경위가 큰 것으로 보인다 (출처). 구로사와 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일본의 제작자들이 일부러 미국 제작자와의 소통에 훼방을 놓았으며, 최종 편집권에 대한 계약 내용 또한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다만 구로사와 감독 본인이 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 중 하나는 그 자신의 완벽주의에 가까운 촬영 성향과 완벽한 장면을 얻기 위해서는 상식의 선을 넘는 광기도 있다. 〈거미집의 성 촬영 시, 미후네 토시로에게 실감 나는 감정 표현을 얻기 위해서 실제 화살을 쏘았던 일화는 뉴욕타임스에 실린 구로사와 아키라의 부고에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출처).


구로사와 감독은 이 대작 영화의 연출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였고, 그 원인이 제작자들과 마찰이었는지, 아니면 본인의 괴팍함으로 인하여 영화판에서 얻은 폭군으로의 이미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 영화계에서 기피 인물에 가까운 위치에 몰리게 된다. 결국 1971년, 구로사와 감독과 친분이 깊은 동료 감독들 고바야시 마사키, 이치카와 곤,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제작 투자를 받아 본인 영화 중 첫 컬러 영화이자 최저 예산 영화인 〈도데스카덴을 공개하지만, 아쉽게도 본인 영화 상 처음으로 제작비 회수에도 실패할 정도로 쓴맛을 맛본다. 그때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으면 그는 목과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까지 했는데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불리는 감독의 인생에서 가장 얼룩진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70년대 후반 정도에는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아 성공적인 영화감독과 제작자로 성장한 할리우드의 젊은 영화인들이 그를 찾아와 도왔고,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대부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그의 영화에 투자 및 제작까지 도움을 준다. 이들의 도움으로 구로사와 감독은 1980년, 시대극으로 돌아가 전국시대의 다케다 신겐과 그의 그림자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 카게무샤를 통해 칸 영화제에서 그의 영화 인생 첫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외국어 작품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한다.


다만 구로사와 감독은 공공연하게 카게무샤는 본인의 다음 작품인 을 위한 드레스 리허설이라고 불렀는데 (출처), 현대에 와서 두 작품을 보면 영화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사실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뛰어나 개인적인 호불호의 차이 정도가 존재한다고 평가한다.


지금도 명작이라 불릴만한 카게무샤를 드레스 리허설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연출하기 전, 중세 일본을 무대로 한 사극이 컬러 영화에 잘 어울리는 지를 보고 싶어서였다. 이야말로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심지어 1981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카게무샤의 차기 작품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대로 각색한 『리어왕』을 언급한다.


카게무샤는 일본 내에서는 손익분기점을 월등히 넘어섰으며, 구로사와 감독에게 첫 황금종려상을 안겼을 만큼 대중과 평단에게 모두 인정받았지만, 일본 영화계 내에서 구로사와 감독의 평판을 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음 작품인 을 제작하기 위해서 일본 내에서 제작자를 구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프랑스의 제작자인 세르쥬 실베르만의 도움을 받아 크랭크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세르쥬 실베르만은 단순히 금전적 투자만을 한 것이 아니라, 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있도록 프랑스의 영화인들과 일본의 영화인들 사이를 오가며 분주하게 밑 작업을 하였지만, 구로사와 감독이 일본의 영화계에서 가진 좁은 입지 때문에 일본 영화 제작자 연맹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후보에 올리는 것에도 실패했다 (출처).


은 이런 감독 본인의 영화 인생의 우여곡절을 영화로 풀어내기 위해서 시작된 작품이다. 구로사와 감독에 따르자면 의 본격적인 개발은 감독이 일본 전국 시대의 유명한 다이묘인 모리 모토나리와 그의 세 아들에 대한 고사를 읽고 나서 시작되었다 한다. 모리 모토나리에게는 유능한 아들이 셋 있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모리 모토나리는 죽기 전 아들 셋을 모아놓고 각각 화살 한 개씩을 건네 부러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3개의 화살을 건네주며 다시 시도해보라 하고 그들이 화살 3개를 꺾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며, 아들들에게 그들이 힘을 합쳐야지만 살아남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이 고사를 읽고는 화살 3개를 꺾지 못한다니, 거짓말이네라는 생각부터 했다 (출처). 모리 모토나리가 아들들에게 남겨준 땅은 번영하고 있었으며, 세명의 아들 모두 야망이 넘치는 유능한 장군들이었다. 구로사와 감독이 보기에는 세 아들이 싸우는 것이 당연한 흐름처럼 보였고, 여기서 바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들어오게 된다. 은 결국 감독 본인의 가장 개인적인 실패담에서 시작하여, 일본의 유명한 역사적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전승을 기반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전개를 통해 영화사에 길이 남는 대작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야기의 발전

류 다이스케 (이치몬지 사부로 역), 유이 마사유키 (히라야마 탄고 역), 〈란〉(1985)류 다이스케 (이치몬지 사부로 역), 유이 마사유키 (히라야마 탄고 역), 〈란〉(1985)


리어왕:
당신이 나를 무덤에서 꺼낸 것은 실수였어요.
당신은 천국의 영혼이지만, 나는 결박되어
지옥의 바퀴에 묶여 있으니까요. 내 눈물마저도
녹은 납덩이처럼 내 뺨을 태우는군요.

출처: 『리어왕』, 4막 7장

상황: 코델리아, 마침내 아버지를 찾아내지만 리어왕은 막내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의 영상화 중에서도, 〈란〉은 원작 『리어왕』과 비교하자면, 같은 부분보다 다른 부분이 더 많다. 즉, 원작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는 완벽한 영상화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반대로 “완벽한 영상화”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의 자체적 작품성으로만 판단한다면, 은 그 어떠한 영상화보다도 뛰어난 평단의 지지를 받는다. 영미 영화 평론계에서 일종의 벤치마크처럼 여겨지는 로저 이버트는 을 개봉 당시인 1985년 한번 평론하였으며 (출처), 2000년 다시 재평하였는데 (출처), 두 번 모두 본인의 최고 점수인 별 4개를 주며 위대한 영화의 반열에 올렸다. 심지어 스티븐 스필버그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일컬어 “우리 시대 영상의 셰익스피어 (the pictorial Shakespeare of our time)”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영상적으로는 구로사와 감독이 카게무샤를 드레스 리허설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해가 될 만큼 컬러 영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준다. 그는 이 영화에서 복식에 큰 신경을 썼는데, 의상 디자이너 와다 에미 미술 감독은 구로사와 감독과 함께 각 세력에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검은색, 흰색 등 한눈에 들어오는 원색을 하나씩 지정하고, 그에 기반하여 병사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짰다.


로저 이버트가 본인의 평론을 통해 밝힌 바로는, 총 1,400개가 넘는 영화의 의상은 교토에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작업으로 제작되었으며, 복잡한 복식의 경우 하나를 만드는 데 3개월에서 4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화려한 원색을 가진 의상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영화의 배경은 삭막하고 색조가 결여된 성과 평지를 무대로 하게 된다. 결국 흰색의 성, 검은색의 땅을 무대로 움직이는 이 병사들은 마치 유화의 색조가 살아 움직이는 것과도 같은 마법적인 효과를 낸다. 결국 와다 에미는 1985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의상상을 수상하며, 의 유일한 아카데미 상을 접수했다.


이러한 영상을 현대의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면, 그 작품은 구로사와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이러한 느낌의 미술로 가장 유명한 창작가와 작품은 아마 장이머우 감독의 2002년 작품 〈영인데, 장이머우 감독은 의 와다 에미 디자이너를 영웅의 의상 감독으로 섭외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구로사와 감독에 대한 영화적 헌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구로사와 감독은 1976년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일본 영화 음악계의 거장인 타케미츠 토루와 협업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는 기획 초반에는 비명소리와 합창 중간에 있는 음악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싶어 했지만, 영화의 긴 제작기간 동안 아예 음악에 대한 비전이 180도 바뀌어서 구스타프 말러의 낭만주의적 오케스트라를 레퍼런스로 삼았다 (출처). 여기서 나온 결과물이 동서양의 완벽한 결합이라고도 불리는 의 영화 음악이다. 보통 일본의 시대극에서 들리는 전통 현악기의 느긋하면서도 신경을 긁는 음악이 아니라, 웅장한 서양의 오케스트라로 이루어진 서정적인 음악은 지금 감상해도 장면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주연인 이치몬지 히데토라 역을 맡은 나카다이 타츠야는 영화 촬영 당시에는 50세 중반이었지만, 영화 상에서는 일본의 전통극 형식인 노가쿠에서 영감을 얻은 분장을 하여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어왕』을 원작이라고 보았을 때, 주연 인물 리어왕의 노화를 표현하기 위하여 전통 일본 연극에서 영감을 얻은 화장을 한다는 발상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한 연출적 결정이라고 보인다. 또한 나카다이 타츠야 혼자만이 이러한 분장을 하고 있기에, 일반적인 얼굴로 나오는 주위 인물들과의 대비는 때로는 섬뜩하고, 때로는 애처로운데, 배우의 연기력과 더불어 광기에 물들어가는 히데토라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연출적 면에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 영화사에 남는 대작으로 평가받는 근원은 서사에 존재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원작 『리어왕』을 읽으면서 작품내의 인물 묘사적인 측면에서 리어왕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인 리어왕의 딸들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때문에 구로사와 감독은 리어왕의 딸들이 그를 배신하는 이유는 그의 폭군과도 같은 과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딸들이 폭력에 물들어가는 이유 또한 아버지를 보고 배워서가 아닐까 라고 상상해보았다 (출처). 영화 에서 첫째 아들 타로의 아내 카에데와 둘째 아들 지로의 아내 스에는 모두 히데토라가 현역 시절 죽였던 정적들의 딸들이며, 결국 이치몬지 가문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카에데의 복수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을 영화 내, 외적으로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교차점이다. 만약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말하는 대로 이치몬지 히데토라가 감독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본다면, 그가 셰익스피어 원작의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더한 각색인 히데토라의 피에 물든 과거는 어쩌면 본인이 과거 영화의 촬영장에서 폭군처럼 행동했던, 촬영장 바깥에서 제작자들과 싸웠던 경험에 대한 반성이자 회고로 보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느꼈던 불완전함이, 감독 본인의 경험으로 인해 완전해진 것이다.


이야기는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지만 그 생명력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몬머스의 제프리가 집필한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레이르왕은 브리튼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장치였고, 때문에 혼돈에 빠진 왕국이 다시 질서를 되찾게 되는 고전적 권선징악의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하나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도 제어할 수 없는 혼돈으로 이어져, 결국 파국을 맞게 되는 비극을 다룬다. 인간 리어왕은 본인 인생의 모든 제어를 상실하자, 결국 자기 자신의 정신에 대한 제어 또한 상실하여 광인이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을 통해 과거의 폭력이 현대로, 아버지의 폭력이 아들로, 아들의 폭력이 형제간으로, 그리고 남편과 부인 사이로 산불처럼 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이 폭력으로 이루어진 화마는 이치몬지 히데토라가 이루었던 산과도 같던 업적을 모두 불태운 이후, 불투명한 왕국의 미래, 혼돈만을 남기고 없어지는 허무주의적 감성으로 승화된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영상화할 때 가장 위험한 부분은 원작의 신성화, 원작자에 대한 신격화이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는 과거와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서사를 전달하는 작가와 서사를 읽고 소화하는 독자의 역할이 모두 존재해야지만 대화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기에 독자가 작가를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역할만을 하면, 고전이 주는 감성은 일방통행으로 전달되어, 대화의 의미를 상실한다. 작가와 독자가 진정으로 교감하는 순간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당위성을 부여받으며, 변신한다. 이것이 이야기가 생명을 얻는 과정이다.


셰익스피어 영상화 한줄평:

기원전 8세기 인물의 삶이, 12세기의 수도승에 의해 발굴되고, 17세기의 극작가의 문학으로 남아, 20세기의 영화감독이 16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여 자전적인 이야기로 승화시켰다는 요설


(끝)


맺는 말: 번역에 관하여

셰익스피어 작품의 일부분을 직접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약강 5보격(iambic pentameter)이라 불리는 운율을 지닌 운문(verse)인데, 운율까지 살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행바꿈을 지킨 형태로 번역합니다.

MIT에서 호스팅 하고 있는 셰익스피어 원서를 번역 대상으로 사용합니다.


『리어왕』 원서: http://shakespeare.mit.edu/lear/ful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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