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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Jul 29. 2019

누가 삶을 이야기하는가

<작가의 생각 | 노트>

단 한 번도 죽음을 몸소 체험한 적이 없었음에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삶과 죽음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분-그들은 존경받고 싶어한다-들을 종종 목격한다. 그리고 그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젊은이를 힐책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전혀 무관한 사람에게도 진지하고 엄격하게 훈계한다. 결국 그의 마지막 말은 '죽음은 순서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였다. 그렇다. 죽음은 순서대로 찾아오지 않고 최종 결론은 관망하는 한 낯선 여행자의 비웃음-'그래, 당신 말이 맞다면 적어도 저 젊은이가 당신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 더 빨리 깨달을 수도 있겠군. 물론 저 젊은이에게도, 당신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아, 저 젊은이는 당신 아들인가?' 하는 생각에-으로 이어질 뿐이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들은 마치 그 두 가지가 하나의 기준점 위에 있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죽음보다 삶이 훨씬 더 낫다고 비교하며 단정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죽음이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존재라고는 신과 악마일 뿐인데. 


만일 그토록 연륜에 천착하며, 연륜이란 우월감을 통해 삶에 대해 훈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확신하며 단 한치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면 그는 생의 전 과정을 통해 신이나 악마를 추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죽음을 전제로 삶을 말하는 자라면 분명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자신의 삶 앞에서 순수한 아마추어일 뿐이라는 진실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삶과 죽음을 너무 쉽게 그리고 가볍게 입에 올린다. 하긴 그것도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모든 존재자의 삶의 과정일테니.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실존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진실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떨 수 있는 법도 그리 많지 않다. 그 허세가 조금의 위안이라도 준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굳이 타자에 대한 우월감까지 내세우며 윽박지를 필요가 있을까 하는 비웃음 섞인 의문이 들 때마다 ‘역시 서투르군’ 하는 혼잣말을 하게 된다. 새어나오는 실소와 함께 말이다. 


바로 그 찰라의 순간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모든 존재자를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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