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2. 헤어지고 1일차
헤어지고 하루가 지났다. 약속한 대로 오늘 밤 너를 만나러 간다. 어제 몇 시간이고 멈추지 않던 눈물이 어쩐 일인지 오늘은 나지 않는다. 당분간 너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가. 아니, 감각이 없어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는 걸 보면.
너는 내가 약속에 늦는 게 싫댔다. 그걸 헤어지던 날에야 알았다. 네 마음이 내게서 진작 떠났다는 것만큼이나 몰랐던 사실이다. 늦는 걸 반기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너는 워낙 내색을 안 했었다. 그렇게 투명한 소통을 강조하던 사람이 왜 단 한 번도 말을 안 해줬을까. '그렇게 투명한 소통을 강조하던 사람이'라는 말은 빈정대는 느낌이라 삼키고 뒷말만 물었다. 왜 말을 안 해줬냐고. 네가 '좋을 때는 별로 문제가 아니었는데 감정이 식으니까 거슬리기 시작했어'라고 답한다. 그 말인즉슨, 짜게 식어버린 감정이 문제의 발단이자 본질이라는 말이다. 늦는 습관을 고친다고 집 나간 감정이 돌아오지 않는 걸 알기에 구태여 말하지 않은 것이다. 너무 사랑해도 고칠 필요가 없고, 동시에 사랑하지 않아서 고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늦나 보다.
하지만 이미 헤어진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늦어서는 안 된다. 약속에 늦는 따위의 거슬리는 행동으로 힘겹게 얻은 이별 유예기간을 단축시킬 수는 없다. 너의 이별은 어제였겠지만 나의 이별은 좀 더 늦을 예정이기에, 내 속도에 맞춰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늦지 말자고 다짐한다.
밤 10시쯤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11시에 퇴근할 것 같다고 한다. 초기 스타트업에 다니는데 첫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있어 요즘 들어 매일 퇴근 시간이 이렇다. ‘또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내가 일찍 도착하면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도 될까?'라고 물었고, 너는 흔쾌히 그러라 한다. 사실 예전에는 너네 집을 카페 가듯 드나들며 나 혼자 있다 오기도 했는데. 헤어진 여자가 자기 없는 동안 비밀 번호 누르고 집에 들어와 있는 게 편할 리 없다. 그렇지만 어차피 이렇게 안절부절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거라면 미리 가 있는 게 낫다. 그동안 늦었던 걸 이렇게나마 갚자.
10시 30분, 너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자 익숙한 방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에는 익었는데 공기가 낯설다. 일찍 오기 잘했다 싶다. 싸늘한 공기를 데울 시간이 필요하다.
소파에 앉아 공연히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한다. 뜨는 시간에 일이라도 할까 싶어 노트북을 가져갔는데 펴 보지도 못했다. 네가 오면 뭐라고 말할까,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등 온갖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데, 별안간 띡띡띡띡 보안키가 눌린다.
원래 영화 여주인공처럼 시차를 두고 그윽하게 돌아보려 했는데, 젠장. 미어캣 마냥 놀라서는 확 돌아봐버렸다. 여유가 없으니 이 모양. 방금까지 머릿속에 굴리던 시나리오가 별 소용이 없겠다 싶다.
그리고 안중에 없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생각보다 네가 다정하게 대해준다. 어제의 그 닫힌 눈빛이 아니다. 고마운데 당황스럽다. 추워졌네, 언제 왔어 등 몇 번의 빈 대화들이 오가다가 안아달라고 했다. 오래 편하게 안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나눌 때는 낯설었지만 품 안은 내 것처럼 익숙하다.
너 : 나는 벌 받을 거야
나 : (끄덕끄덕) 어떤 벌?
너 : 나를 누군가 심하게 차 버린다든지.
나 : 아니, 네가 존경하는 사람이 널 존경하지 않는다면서 차야지.
웃으면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너를 안은 채로 기어코 네 오른쪽 어깨를 적셨다. 억지로 참지 않고 충분히 울었다. 이별 1일차니까 당연하잖아. 집에서 혼자 울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마음 놓고 이러자고 헤어지고 만나자고 했다. 지금은 울 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내가 우는 걸 이 세상 누구 한 명은 아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