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3. 헤어지고 2일차
헤어지던 날,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네 말에 나도 모르게 왜냐고 물었었다. 그 순간 대체 뭐가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이 식었다는데 이유가 어딨겠어. 그냥 무조건 반사 같은 질문이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너를 더 이상 존경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감정이 사라졌어. 알아. 나도 이럴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어. 정말 미안해."
나는 별안간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서 '존경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느 쪽이 더 별로인지는 모르겠다. 이어 질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떠올랐다. 네가 말하는 존경이 뭐야? 내가 뭘 했기에 그런 마음이 생겼어사라졌어? 내가 고민을 너무 많이 털어놔서 그래?
네가 가방에서 구겨진 장미꽃을 꺼내서 바들바들 떨며 내게 고백하던 날, 너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좋다고 했다. 그 망할 '존경'이 나를 만나게 된 이유이면서, 나와 헤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내 자존감이 수직 낙하하고 있다. 지금 내 스틸컷을 찍으면 '존경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대로 끝나버리면 나는 그 스틸컷 그대로 박제되고 만다. 내 상태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하고, 다시 멈췄을 때 그 스틸컷이 지금의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 자기 합리화일지라도, 네가 여전히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되돌아올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를 추스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보다 존경받지 못한 사람이 좀 더 개선하기 편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헤어지고 계속 만나는 건, 너에게 새 버전의 나를 업데이트해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헤어지고 2일차.
1일차에 이어, 안기 전에 간단하게 대화를 한다. 매일 자기 전에 통화를 하며 일과를 묻는 것이 원래 우리의 일과였는데, 헤어지고도 그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좋은 일 힘든 일 탈탈 털어 미주알고주알 공유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SNS에 쓸 법한 소재와 정제된 문장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긴 하루를 마치고 온 네가 이미 헤어진 사람의 소소함을 들어줄 만큼 인내심이 많지는 않을 것이니까. 연인이 아닌 나는 지금부터 매 순간 흥미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치 처음 시작하는 관계처럼 이야깃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혹여 이야기가 끊길까 봐 휴대폰 메모장에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와서는 몰래 커닝하던 그 옛날 너의 모습처럼.
앞으로 내 하루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
하루를 ‘성과’ 중심으로 요약하고, 혹여나 잘 안 된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고 원인을 파악해서 다음을 기약하고, 원대한 비전을 향해 전진하고, 기회를 패기 있게 쟁취하고 실현한다. 꼭 일 얘기가 아니더라도 뻔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이색적인 체험을 하거나 별 거 없던 하루의 에피소드에서라도 인사이트를 끌어낸다. 위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빡빡하지만 그래야 한다.
헤어지고 또 하나 바뀐 게 있는데, 너를 만나기 전에 있는 힘껏 나를 가꾸는 것이다. 원래 아침에 샤워를 하는데, 샤워 시간이 '너를 만나러 가기 전'으로 바뀌었다. 하루새 시나브로 쌓인 쩔음을 거둬내고 보송보송하게 새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고, 옷을 고른다. 안 그래도 이 상황이 구질구질하니까, 겉모습으로라도 싱그러웠으면 한다.
이런다고 네가 나를 다시 존경하게 되거나, 매력을 새삼 재발견하며 새 마음이 돋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향과 방법을 완전 잘못짚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네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 일로 내가 나를 못나게 보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 상황을 뭐라도 업데이트해야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너 없이도 혼자 업데이트를 하겠지만 그걸 네가 모르면 내 멘탈 회복이 더딜 것이다.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나지 않는가. 그래서 작위적으로라도 봐 달라는 거다. 놓친 고기일지언정 그 고기의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준다. 놓친 고기에게 잘 보이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