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4. 헤어지고 3일차
헤어지고 나서는 너를 만나러 가기 전에 늘 오래 샤워를 한다. 일종의 경건한 의식이다. 가만히 물줄기를 맞고 있기도 하고, 미용실에 간 것 마냥 샴푸도 꼼꼼하게 하고, 어디 안 씻은 곳이 없나 온몸 구석구석을 시간을 들여 몇 번이고 씻어 낸다. 그렇게 30여 분간 샤워를 해내고 나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과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동시에 든다. 비로소 너를 만나러 갈 준비가 된다.
오늘도 목욕재계하고 찬찬히 가려고 했다.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너의 카톡이 하나 와 있다. 30분 전에.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좀 일찍 와줄 수 있어?'
너는 내가 늦는 것이 싫다고 했었다. 부리나케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한다. 젠장, 머리가 길어서 빨리 안 마른다. 웬걸, 로션을 제대로 흡수도 안 시키고 화장을 얹자니 뭉치고 난리도 아니다. 이제 진짜 몇 번 못 볼지도 모르니 늘 최선의 모습으로 보고 싶은데. 빨리 와달랬는데 샤워하고 화장까지 하며 늑장을 부린 것 같아 너의 집으로 가는 내내 머리채 속을 휘적거린다. 제발 좀 말라라. 이 와중에 머리숱은 왜 이리 많은지. 허리께까지 오는 이놈의 머리를 이제 정말 자르든지 해야겠다. 서둘러 오느라 얼굴이 벌게졌다.
도착.
너의 눈에 바쁨과 피곤함이 서려있다. 순간 불안함이 엄습했다. 매일 헤어진 여자를 만나는 게 안 그래도 피곤한 일일 텐데, 야근 후에 심신이 피곤한 상황은 위험하다. 너가 피곤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귀찮음을 표현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지금 이 관계에서 내가 을이라는 걸 너도 나도 알고 있지만 고맙게도 너가 예의를 지켜 겉보기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속으로 부담스럽고 귀찮게 느낄지라도 그게 바깥으로 표출되기 전에는 서로 짐짓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일어서야겠다.
너를 가만히 안았다. 내가 부탁해서 안아주는 거라고 해도,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부드러운 말투가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헤어진 남자를 매일 안으러 가겠다는 어이없는 제안을 했을 때, 솔직히 너가 다정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싸늘함을 각오했는데 너는 이상하게 3일 연속 내게 다정하다. 게다가 오늘은 너가 무척 피곤한데도.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너가 세게 나오면 내가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살살 구슬리려는 걸까. 혹은 지금은 본인이 바빠서 골치 아픈 일들을 감당할 여력이 없으니 바쁜 것 좀 끝나고 나서 정리하자고 유예하는 걸까.
"무슨 생각해?"
"미안하고... 왜 진작 이렇게 안아주지 못했을까 생각해."
안고 있다가 잠시 떨어져 얼굴을 봤다. 너는 다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눈빛이 흔들린다.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네 얼굴에 후회까지는 아닌, 그저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남아 있다. 나한테 남은 감정이 그것뿐인가 싶어 조금 화가 났다가 이내 누그러들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남아있는 한 이 유예기간을 조금만 더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오늘은 울지 않았다. 너도 나도 평온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낸 카톡에, 너는 'ㅎㅎ'까지 붙여가며 답을 한다. 이렇게 평온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너가 나한테 감정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격정적으로 들었다 놨다 해야 들썩거리는 와중에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자꾸 잊는다. 내가 네 마음을 돌리려는 게 아니라, 잘 헤어지기 위한 것이란 걸.
너를 잡으려는 사람이라면 모질게 굴며 정을 떼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와 헤어지려 노력하고 있기에, 너가 젠틀해서 고맙다. 이것 봐, 너와 나는 참 죽이 잘 맞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