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5. 헤어지고 4일차
오늘은 너와 나를 함께 아는 친구 A와 술 약속이 있었다. A는 당연히 너와 잘 지내냐고 물을 테고, 그러면 최대한 덤덤하게 답하겠노라 다짐했다. 너무 자세히 얘기하는 건 (구) 연인 간의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아직 진정기라 말하다가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서. 그런데 예상과 달리 A가 묻지 않았다. 그러더니 2시간쯤 지나 얼큰하게 취기가 오를 때쯤 A가 갑자기 너와 잘 지내냐 묻더이다. A가 허를 찌른 게 아니라 눈물샘을 찔렀나 보다. 질문 하나에 울음이 터져버렸다.
속절없이 배어 나오는 눈물을 휴지로 연신 찍어내며 우리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더듬더듬 설명하다가 A에게 물었다.
"너는 우리 둘을 다 잘 알잖아. 너가 생각하기에...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일단은.. 너 잘못이 아니니까 그렇게 너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냐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모르게 이 이별에 있어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A는 내 자책에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다른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너의 성향과 상황에 대해.
A가 말하길
너는 바른말하기 좋아하고 이상향이 높다. 그만큼 현실과의 간극을 콤플렉스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행동하며 앞서 가 있는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파운딩 멤버로 스타트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게 너가 존경과 사랑이 뒤섞인 감정을 느낀 것도 아마 그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너도 우상향의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최근 옮긴 스타트업에서 신임을 얻고 있고, 곧 중역을 맡을 예정이다. 누구나 집중적으로 일하는 시기가 있다. 특히 책임의 무게가 커졌을 때, 도전적인 일을 기어코 성취해낼 때 성장의 나이테가 깊어진다. A는 너가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빠르게 움직이면 주변이 확 느리게 느껴지고 급기야 뒤로 밀려난다. 너의 성향과 상황이 맞물려, 지금 누구를 만나도 존경하기 어려운 상태일 것이라고 A는 말한다. 그러니 나를 탓할 일이 전혀 아니라고.
그걸 듣고 내가 생각하길
모르던 이야기가 아니다. 심지어 A는 모를,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디테일들까지 우수수 떠올랐다. 이를테면 메모장에 적어둔 수백 개의 사업 아이디어를 보여주며 언젠가는 내 것을 해보고 싶다고, 그런데 늘 말만 한다고 쑥스러워하던 너. 쉽게 거만해지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성향이 있어 늘 조심한다던 이야기. 다만 그동안은 그 말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나와 처음 관계를 시작할 때 너는 나를 한껏 자랑스러워했고, 자격지심을 느끼는 쫄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새 내 편할 대로 정보를 선별하고 있었다.
너와 나를 함께 아는 A의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씩 우리의 연애가, 우리의 헤어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너랑 헤어졌으니까 그놈은 개새끼, 잊어!'라고 시원하게 욕해주는 친구는 참 고맙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네가 몰라서 그런데 내가 못나서 그래, 내가 잘못해서 그래 하면서 화살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이럴 땐 둘 모두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객관적으로 (들릴 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큰 위로가 된다. 뭘 알고 하는 얘기 같으니까, 화살을 너도 나도 아닌 허공에 쏘게 만드니까. 아, 물론 그 친구도 나 위로한다고 욕도 조금 해주기는 했다만.
A와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네게서 온 연락을 놓칠까 봐 휴대폰을 연신 확인했다. 드디어 12시쯤, 네가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연락이 왔다. 만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A와 인사하고 너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만 술이 깨버렸다. 오늘은 너 앞에서 좀 취하고 싶기도 했는데 애꿎게도 술이 세다.
내일 너는, 너와 나를 아는 또 다른 친구 B를 만난다고 한다. 나도 오늘 A를 만났다고 했다. 너는 내가 A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일 네가 B에게 우리의 이별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