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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an 13. 2019

네가 사는 그 집, 나는 없었다

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7. 헤어지고 6일차

헤어지고 너를 안으러 간 지도 어언 6일때다. 이 어색하고 이상한 일과가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이 정도 적응력이라니. 너와 내가 깨끗이 정리한 것도 어서 일상으로 자리잡길 바란다.


오늘은 좀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까 한다. 한동안 입지 않던 몸에 꼭 붙는 상의와 스포츠 레깅스를 입었다. 머리 크고는 운동을 쉬어본 적 없는 운동 애니멀이었는데 다리를 크게 다쳐 인대 수술을 할 때쯤 너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넌 내가 이런 스포티한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다. 격한 운동을 앞으로 아예 못할지도 모르고, 바깥 활동을 못해 많은 약속과 관계를 정리했고, 재택근무로 오래 준비해오던 프로젝트도 직접 마무리하지 못하는 등 인대가 다친 건 더럽게 운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다리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늘 일 벌이기에 바쁘던 내가 (발이 묶여) 누군가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정 붙일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리를 다친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비록 헤어졌을지언정. 시간을 되돌린대도 똑같이 다리를 다치고 너를 만날테다.


일찌감치 만날 채비를 마치고 나니 너의 연락이 더욱 기다려진다. 연신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할 바에는 미리 너의 집에 가 있는 게 낫겠다 싶어 좀 미리 집에 왔다.


나는 네 집을 참 좋아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 내 집 같은 마음이다. 나와 만나고 3개월 후부터 너는 자취를 시작했다. 난 자취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든 살림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원룸을 원점부터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걸 지켜보며 대리만족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다보면 없는 게 없다. 다만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이미 품목이 있고 기능의 문제가 없는데 취향을 이유로 굳이 추가로 사들이려면 내게도, 부모님에게도 설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네 집에 더 애정을 쏟았다. 살림살이를 같이 찾아보며 추천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선물하기도 했다.


헤어지고 첫 날 빼고는 이렇게 일찍 와 있던 적이 없어서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이 집을 눈에 담을 시간이 없었다. 찬찬히 눈길을 주니 모든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침대 사기 전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간 소파에서 자고 가기도 했고, 이 작은 집에 식탁을 두네 마네 한참을 고민하다가 평소에 액자처럼 쓸 수 있는 접이식 테이블을 들여 그 위에서 배달음식을 수없이 시켜 먹었고, 이 집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침대이니 꼭 내가 이불보를 해주겠노라 하며 골랐던 워싱면의 회색 이불보하며, 전에 살던 사람이 설치해 둔 맥락없는 조명들을 보며 잔뜩 비웃고는 뒷심 부족으로 그냥 잘 쓰고 있다든지 등 어디 하나 사연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상 위에 있고 책 위에 포스트잇도 있는 걸 보니 요새 읽고 있는 책인가보다. 제목만 보면 이성을 유혹하는 법이 적혀있을 것 같다만 사실 <사랑의 기술>은 대충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이 사랑 '받는' 것에 대해서만 고민하지 사랑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상을 못 찾았을뿐 사랑하는 능력과 기술에는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원래 워낙 책을 많이 읽기도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 이 책을 읽고 있는 너의 의중이 궁금했다. 너는 이걸 어떻게 읽었을까. 내가 그런 착각녀로 보이는 걸까 혹은 본인이 사랑을 주는 것에 대해서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너는 사랑받는 것보다 누구에게 사랑을 줄 것이냐가 더 중요한 사람인데. 꼭 너의 생각에 결을 맞추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지금 나를 위해서도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책장을 주욱 둘러보았다. 가지고 있던 책들 대부분을 본가에 두고 꼭 필요한 책만 가져왔고 최근에 산 책들만 더해져 있는 터라 이 책장이 현재 너의 생각과 관심사의 축소판이다. 어떻게 최고가 되는지,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지 혹은 구글/넷플릭스/마이크로소프트 등 유니콘 기업들의 조직과 리더에 대해 다루거나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 같은 거시적인 트렌드 등에 관한 책들이다. 책 두께로 책 고르냐며 농을 던진 적이 있을 정도로 두꺼운 책 마니아다. 반면, 나는 문장과 서사의 아름다움을 탐닉하고, 총론보다 각론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본질적인 것들을 다룬 책들을 즐겨 읽는다.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소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내가 쓰는 책까지도. 한 달 전에 나온 내 책도 옆에 있는데 읽다 만 듯 하다. 넌 내가 쓴 책은 재미없겠구나, 이게 존경심이 사라진 이유일까. 어떤 책들인지 기억하려고 구획을 나눠 책장 사진을 찍었다. 언젠간 이 책들을 모두 읽으면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너는 나를 다시 존경할 수 있을까.


너가 집에 왔다. 춥다길래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다행히도 손을 빼지는 않는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서로의 일과를 나누는데, 너가 어제에 이어 어떤 사람에 대해 칭찬한다. 투자를 업으로 하시는 분인데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관심이 많단다. 그 분과 같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게 됐단다. 정말 좋은 기회라며 살짝 흥분해있다. 어제도 했던 말을 또 하는 걸 보니 감흥이 남다른가보다. 아까 그 책장과 너의 모습이 겹치며 내가 지워졌다. 내가 안 보일 수 있겠구나. 나도 경쟁적으로 오늘의 '교훈'을 이야기하며 나 역시 ‘진전’ 있는 사람임을 드러냈다.


내 집 같은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네 집이었다. 내가 껍데기에는 관여했을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철저히 본인 것으로 채우고 있었다. 뭐 하나 내가 묻어나지 않는 게 없다며 애틋해할 필요가 없었다. 내 자리는 희미했다. 나는 너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너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방에게 쫓겨나듯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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