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6. 헤어지고 5일차
만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오늘은 새벽 1시가 다 되어 만났다. 주말까지 출근해 참 고생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너와 나를 함께 아는 친구 B와 만나 오래 얘기하느라 늦었다고 한다. 얘는 저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하고... 아차, 친구 B는 어제 내가 만났던 A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이 정상 근무일이다. A한테 B에게 우리 얘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깜빡했다. 혹여나 내가 얘기했단 게 너 귀에 들어갔을까 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운 것까지 말했으면 어떡하지.
너는 우리 관계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지, 말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했다. 사실 친구 B를 만날 거란 얘기를 어제 들었던 순간부터 묻고 싶었다.
나 : "B한테는... 뭐라고 했어?"
너 : "이미 알고 먼저 얘기하더라고. 근데 별 얘기 안 하고 주로 일 얘기했어."
별 얘기를 안 했단다. 서럽도록 서운해졌다. 당연히 말을 아끼는 거겠지만, 내 얘기가 그 정도의 중요도인가 싶다. 잠시 침묵했다가 나직이 '너는 나 같은 사람 못 만날 거야' '내가 너 인생 최고의 여자일 거야' '너는 앞으로 누구도 존경하지 못하게 될 거야'라고 뱉어버렸다. 나름 서슬 퍼런 '저주'였는데 내가 워낙 나직이 말해서 그런지 별로 기분 나쁘게 듣는 것 같지가 않다. 너는 이렇게 답한다.
너 : "B한테도 말했어. 앞으로 누구 못 만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해주니 넙죽 감동이라도 받을까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도 도저히 나를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건가. 네가 이렇게 거리를 두고 있으니 내 저주 따위가 가닿을 리 없다. 너에게 별 임팩트는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방금 읊조린 저주가 찜찜하다.
나: "방금 한 말은 일부러 해 본 말이고, 사실 그렇게 생각 안 해. 넌 여유 생기면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할 지점들을 찾아나갈 거야. 나로서는 속상하지만 진짜 그럴 것 같아. 그러니까 누구 못 만날까 봐 걱정 마."
대인배처럼 보이려던 건 아니다. 내가 헤어지고도 속 없이 너를 매일 찾아오는 이유는, 네게 나를 업데이트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겨우 확보한 유예 기간에 이렇게 저주나 퍼부으면 다운그레이드다. 네가 오지 말라고 하면 당장 내일부터 못 볼지도 모르는데, 이게 마지막 모습인 것이 전혀 괜찮지 않다. 이렇게 다운그레이드를 할수록 헤어지는 게 오래 걸린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번복하며 업데이트한 것이다.
물론 꼭 하고 싶은 말, 꼭 드러내고 싶은 감정이 있는데 입술 뜯어가며 참을 필요는 없다. 영영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일말의 미안함과 의리로 죽어가는 관계의 호스피스를 해주고 있는 사람에게 일부러 말을 뾰족하게 할 필요는 없다. 딱히 진심도 아닌 것을 굳이.
정작 제대로 전달 못한 진심이 따로 있다. 널 만나는 동안 정말 많이 고마웠다고.
분에 넘치도록 사랑받았다. 너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일 수 있게 도와주었고, 더 나은 내가 되는 과정에 기꺼이 함께했으며, 심지어 내가 몰랐던 모습(이를테면 귀여움)도 끄집어내 주었다.
나 역시 너를 사랑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이 내가 준 사랑이 온데간데 사라지는 사람과 달리, 너는 내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알면 알수록 더 좋고 멋진 사람이라 안심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능력치라면, 너를 만나며 그 능력치가 확실히 업그레이드되었다. 사랑을 더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 최선을 다했고, 좋은 연애를 했다.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미워할 시간이 어딨냐고들 한다. 시한부 이별을 하고 있는 내게는 더없는 명제다. 참 사랑했었다고 전하기에도 빠듯한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