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1. 헤어지고 10-11일차
헤어지고 널 만나러 간 지 10일차.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너의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다. 12시, 1시... 널 만나고 와야 마무리되는 내 하루의 끝도 함께 늘어지고 있다. 너의 집에 가기 전에 집에 들러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편하지 않은 차림으로 연락을 기다리고, 만났을 때 많은 에너지를 쓰고,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날의 감상을 곱씹어 기록하고(이 부분이 특히 힘들다. 진액을 빼내는 느낌), 잘 준비를 하는 것. 내가 필요해서 하는 거라고 해도 피곤에는 장사 없다. 나 역시 너만큼 서비스 출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열흘이 지난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날이다.
오늘은 너도 피로감이 극에 달한 듯하다. 미리 가 있길 잘했다. 저렇게 피곤한데 나를 조금이라도 기다려야 했다면 없던 짜증도 솟구쳤을 듯. 입 안에 쓴 맛을 느끼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게 느껴졌다. 저 영혼 없음은 감정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 피곤함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의무를 다할 필요는 없다 싶어 내 선에서 적당히 끊고 나왔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통화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일과였다. 30분에서 1시간. 길 때는 2-3시간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전화기 너머로 영혼 없음이 전해질 때도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가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들이 이상하게 네게는 봉인해제가 되었다. 과연 해결하고픈 의지는 있었는지, 그냥 들어줄 누군가 필요했는지, 날 것의 고민들을 네게 봇물 터지듯 뱉어냈다. 진중하게 듣고 해결책을 고민하는 네 노력이 무색하게 내 고민은 반복되었다. 성향상 이렇게 지지부진한 고민을 듣는 것이 물리적인 피로보다 더 괴로운 것이었으리라.
네가 헤어지자고 하던 날, 나는 '내가 매번 같은 고민들을 자꾸 털어놓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래?'라며 대답하기 곤란한 일차원적인 질문을 했다. 그걸 가지고 헤어지자고 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응, 너무 힘들었거든’하고 대답할 사람이 어딨겠나. 그렇게 물었던 걸 보면 나도 네가 내 고민 받이를 하는 것에 부채 의식을 가졌었나 보다. 헤어진 후 시간을 가지며 네게 업데이트하고 싶던 내 모습 중 가장 거둬내고 싶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고민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조언을 구할 때는 고민의 핵심을 파악해 묻고, 해결책은 실제로 적용하고, 이후 한 발짝 나아간 고민을 되묻는 것. 이게 헤어짐의 이유와 전혀 상관이 없다손 치더라도, 내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 나는 고민을 얘기한 적이 없다.
그나저나 오늘처럼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했더라면 예전에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11일차.
"어제 너가 너무 피곤해 보였는데 예전처럼 전화로 얘기했다면 그 정도인지 몰랐을 것 같아. 그동안 내 얘기 들어주느라 정말 고생했어. 고마워."
너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한다.
오늘은 네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너의 고민은 항상 간결하고 핵심적이다. 해결을 위한 공유다. 네가 내게 그리했듯, 나도 너의 고민에 치열하게 머리를 맞댄다. 너의 고민을 같이 고민해주고 나면 개운한 느낌이 든다. 네가 이 해결책을 실제 적용해볼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원점이 아니라 오늘 대화를 멈춘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럴 때면 헤어진 걸 잠시 잊는다. 험난한 세상을 같이 헤쳐 나가는 전우애 같기도 하고, 뭐 그냥 예전과 같다.
이럴 때면 너의 마음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건 네게 어떤 의미일까. 너는 지금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