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0. 헤어지고 9일차
친구가 남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냐고 묻는다. 백주대낮이라 그런지, 이제 이 상황에 좀 익숙해져서인 건지 너 얘기만 나오면 울던 예전과 달리 담담하게 헤어졌다 답했다. 친구가 못내 아쉬워한다.
친구가 너를 처음 봤던 자리는, 어떤 행사에 내가 초대되고 내 동행으로 너를 데리고 갔던 자리였다. 대부분의 동행들이 자신을 드러내던 반면, 너는 네 소개를 간단히 하고 '자랑스럽고 존경하는 여자친구 덕에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약 70여 명의 사람들이 환호의 박수를 쳤지만 나는 남사스러웠다. 일과 관련된 자리라 내가 누군가의 남자친구로 기억되는 것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오늘 만난 친구로부터 전해 듣기를, 그 날 너의 행동이 정말 인상 깊고 멋졌다고 한다. 그 날 온 사람 중 일적으로 연관이 있는 지인이 아닌 순수 '남자친구'로서 참석한 건 네가 유일했다. 와이프를 데려온 사람은 있을지언정 남편을 데려온 사람은 없었다. 친구가 말하길 '자랑스럽고 존경하는 여자친구 덕'이라고 공식석상에서 말하는 건 어지간한 자존감이 아니라면 못 할 이야기라는 것. 한국사회에서 으레 가지는 성별에 대한 편견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잠시나마 불편해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너는 그렇게 멋진 사람이었다.
미처 네 사진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스마트한 아이폰은 너의 얼굴을 자동 인식해 친절하게도 따로 분류해두었다. 그게 얄궂게도 이 시점에 눈에 띄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최근 1주년까지의 사진들(갓 1년을 넘기고 헤어졌다)을 주욱 훑어보았다. 3~4개월 전을 기점으로 너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내가 사랑스러워 못 살겠다는 표정이다. 이런 표정은 억지로 지을 수도, 숨길 수도 없다. 나만 아는 귀여움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찍은 사진은 회사에서 동료에게 보여줄 법한 얼굴이다. 친절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1주년 때 찍은 사진마저 네 표정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변해왔나 내 얼굴로 분류된 폴더를 봤다. 그런데 변화상을 볼 수가 없었다. 뒤로 갈수록 네가 찍은 내 사진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무뎠을 뿐 이별의 징후는 곳곳에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변하기 전의 너다. 도무지 헤어지지 못하는 것도 변하기 전의 너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명료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 앞의 건조한 너로 버전 업데이트를 하지 못한 탓이다. 네 기억 속의 나를 업데이트하는 것만큼이나 내 기억 속의 너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물론 너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냉정히 말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너의 모습은 나를 사랑해주는 모습이었다. 그때의 표정, 말투, 행동, 기운이 참으로 고유했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주었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해도, 네 모습이 어느 순간 건조 버전으로 내 머릿속에서 업데이트가 된다면 나는 너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예전의 너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한 번 수틀린 관계이기 때문이다. 너는 아무리 힘든 운동도 매일 하라면 할 수 있지만 어쩌다 한 번 못 가면 에라이, 하며 술 마시고 늦잠 자며 아예 막 나가버리고는 한다. 이미 궤도를 이탈한 이상 그것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헤어지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정상궤도로 돌리려 스스로 부단히 노력했겠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완벽하지 않고, 너는 아마 그걸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내 남은 사랑만으로 멱살 잡고 끌고 갈 자신이 없다.
오늘도 너의 집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침대 맡에 내가 쓴 책이 놓여 있다. 나온 지 한 달 정도 된 책이다. 읽기 시작했는지 나름 접은 부분도 있다. 바쁠 텐데 참 고맙다. 이걸 다 읽고 나면 존경심이, 더 나아가 감정이 조금은 회복될까. 그러려면 내가 내 기억 속 너를 현재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기 전이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