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2. 헤어지고 12-13일차
오늘 좀 많이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퇴근 시간이 점점 어마무시해지고 있다. 다음 날 언제 퇴근했냐고 물어보니 새벽 4시란다.
사실 기다리자면 기다릴 수 있다. 다만 너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자면 ㅡ 몇 시에 끝나? 너네 집에 가서 자면서 기다리고 있을까? 차라리 너네 회사 앞으로 지금 보러 갈까? ㅡ 이런 대화들이 이어져야 할 텐데 폭풍 야근을 하는 사람에게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말과 행동인가.
사실 오늘 좀 많이 늦을 것 같다는 말은 오늘 보지 말자는 말이다.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며 '아, 괜찮아. 나 오늘 늦잠 자서 꽤 늦게까지 깨어있을 듯? 끝날 때 연락해! 혹시 내가 먼저 자야겠거든 말할게'라고 본질을 호도한 답을 하고 만다. 이유는 하나다.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의도를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눈치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한 번 안 보기 시작하면 계속 안 볼 것 같아서다. 아직은 아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헤어져버리면 안 된다.
12일차에는 버티지 못하고 3시쯤 내가 먼저 자버렸다. 13일차에는 좀 많이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늦게 받았다. 꽃단장 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리 말해줄 수 있는데 신경을 못 쓴 것 같지는 않고, 예측 불허의 상황이 계속 터지나 보다.
엄마가 마침 어디선가 회를 얻어왔다며 같이 먹자고 한다. 회는 살 안 찐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다. 야식은 잘 안 먹지만 어제처럼 또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배를 채우기로 했다.
엄마가 묻는다.
"헤어졌지?"
나는 원래 엄마에게 내 연애를 말하지 않는데 하도 통화를 매일같이 하니까(원래 나는 연애할 때 통화를 잘 안 한다. 너는 정말 특이 케이스였다) 엄마도 자연스레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뻔질나게 하던 통화를 안 하니까 헤어졌다는 걸 아는 것도 자연스럽다.
엄마에게는 최대한 담백하게, 네가 너무 부정적으로 비치지는 않게 설명을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헤어지자고 하는데,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동안 좋은 연애를 했기 때문에 충분히 감사한 관계로 생각하고 있다고.
"그놈 만나러 매일 나가는 거야?"
하아... 내가 엄마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엄마는 연애 한 번 안 해보고 중매해서 아빠와 결혼하고, 직장생활 한 번 안 하고 평생 주부로만 살아왔다. 그래서 으레 엄마를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규정하고는 눈 가리고 아웅 하곤 한다. 매일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정비하고 밤늦게 나가는데 뭐가 이상한 지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사실은 내가 바로 정리가 안 돼서 잘 정리하고 싶어서 아직 만나고 있다고 얘기했다.
드라마 마니아는 엄마는 그 집에서 반대했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냐, 진심으로 묻는다. 그런 건 전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이런 이유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해줬다. 엄마에게 이렇게 자세하게 남자 친구 얘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헤어진 이야기라니 나도 참 못된 딸년이다. 담백하게 얘기하는 와중에 눈물이 나와 버렸다. 나중에 혹여라도 너와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엄마에게는 그때 그 사람이 너라고 말하면 안 되겠다.
결국 13일차도 3시를 넘겨 먼저 잠들었다. 너는 5시에 퇴근했다고 한다. 헤어지고 12일 만에 이틀 연속 못 봤다. 3일 연속은 아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