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월 Jan 13. 2019

궁합이 맞는 이별법

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09. 헤어지고 8일차

다행히 어제보다 네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어제 줬던 약도 싹 다 먹었다며 생글거린다. 잠깐 엄마가 된 기분이 들어 엉덩이를 토닥여줄 뻔 했다. 빨리 좋아져서 정말 다행이다. 몸이 아프면 마음에도 여유가 없는 법이니까. 안 그래도 물리적, 심적인 여유가 기근 난 상황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있는데 이보다 더 입지가 좁아지면 위험하다.


어제 빨리 보내서 미안한 건지, 약 사다준 마음이 고마운 건지 오늘 일부러 시간을 많이 가지려는 게 보인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이제 안자’고 신호를 보낸다. 포옹 타이밍을 굳이 입 밖으로 뱉지는 않는데 신기하게 둘다 알아차린다. 이야기하다보면 그냥 대화 잘 통하는 친구와 수다떠는 것 같다가, 안는 순간 공기가 바뀐다. 슬프기도, 벅차기도, 밉기도, 믿기지 않기도 하며 오만 감정이 드나든다. 오늘은 고마움이 대세였다.


"차갑지 않게 대해줘서, 나를 더 비참하지 않게 만들어줘서 진짜 고마워. 너를 만나던 나, 나를 만나던 너는 너가 헤어지자던 날 죽었던 것 같아. 억지로 심폐소생하려던 건 아니고 그저 조용하게 ‘우리가 그랬었지, 그때 참 좋았었지’ 하면서 애도의 시간을 갖고 싶었어. 그래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덕분에 잘 헤어지고 있는 것 같아."


써놓고 보니 너무 준비한 느낌이다만, 사실이다. 언젠가 해줘야지 하고 헤어지던 날부터 준비했던 말이다. 오늘 하기에 아주 제격이다.




오늘 너를 만나러 오기 전, 내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떠올려봤다. 대학교 2학년 때 질척인 거 빼고는, 누가 내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 별로 매달려본 적이 없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다. 정 뗀다고, 이게 상대를 위하는 길이라며 모질게 굴었던 기억이 많고, 일부 남아있는 카톡과 이메일이 그 기억에 쐐기를 박았다. 눈으로 확인하니 내 기억보다 나는 더 못된 년이었다. 상대에게 트라우마가 생길만큼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평소에 누구에게도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으면서, 정작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억지로 나쁜 말을 골라했다. 그 사람들은 잘못한 게 없는데. 아픈 건 왜 그들 몫인가. 그 땐 그게 얼마나 아픈건지 잘 몰랐었다. 상대를 위한답시고 사실은 저 마음 편한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진 사람과 만나면 감정 소모가 크니까 내 삶이 헤어진 사람 때문에 영향받지 않길 바랐었나보다. 서둘지 않아도 어차피 끝났을텐데. 이렇게 이미 헤어진 이를 매일 만나보니 끝이 분명히 있음을 더욱 직시하게 된다.


물론 지금 나처럼 헤어지고 매일 만나러 가는 게, 상대가 그러는 걸 받아주는 게 이별의 왕도라는 말은 아니다. 저마다 헤어지는 방법이 다르다. 진짜 헤어지려는 마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이 방식은 적합하지 않다. 재결합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은 결코 아니다. 나는 나를 지키면서 잘 헤어지고 싶었기에 이 방식을 택했고 요행히 너가 받아주었을 뿐이다.

 



나 : 일주일 넘게 이렇게 만나고 있는데, 넌 어떤 생각이 들어?

너 : 그냥 이렇게 와서 얘기하고 하는 거지 뭐.


며칠 전에 들었다면 서운했을 답이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미안하고...  진작 이렇게 안아주지 못했을까 생각해.'라는 대답에,  생각 밖에  드냐고 욕심부리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나도  관계에 대해   거리를   있을만큼 편해져서 다행이다. 이제 헤어지고 8일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