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연재 Apr 29. 2024

제일 믿을 수 없는 건 마음이다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9화

미용실에 다녀오면 일주일이 기분이 좋듯이 소연도 이름을 바꾸고 나서 그랬다. 이름 하나 바꿨다고 해서 갑자기 인생이 뒤집힐만한 일이 생기는 건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다는 느낌만은 선명했다.

아주 간만에 올림픽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거나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을 때면 늘 찾는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가고 싶었다.

마음이 경쾌해져서 어디든지 가고 싶었달까.

간만에 찾은 올림픽공원은 가을이 진해지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풍이 물감처럼 색잔치를 벌이고 있었고, 살갗에 닿는 바람은 딱 적당했다. 유치원에서 소풍을 나왔는지 아이들이 짹짹 거리며 선생님의 뛰를 따르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과 소리가 비현실적이라 느껴질만큼 눈부시고 행복했다.

누군가 행복에 대해 물으니 홍진경은 “자려고 누웠는데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는 글을 보고 소연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공감한 적이 있는데,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렇게 가을 한 복판에 있어도 걱정 거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 소연은 그 순간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자신의 변덕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수술받으려다가 현타를 맞고,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보호자겸 남자친구겸 동반자겸 남편후보겸 기타 등등을 찾으러 이리저리 헤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시간이 바보같다기 보다는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웃음이 나왔다. 분명 인지하고 있어야 할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지만 사실 모든 건 마음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대로 나일뿐, 갑자기 복권에 당첨되서 통장에 몇십억이 꽂힌 것도 아닌데 지금은 혼자여도 괜찮고 살만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소연의 평화를 깬 건 나선의 전화였다.

“왜 이렇게 조용해? 분발 안해? 이런 건 호흡이 끊기면 안 된다고.”

소연은 나선의 재촉에 솔직하게 지금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뭐 지금도 그럭저럭 지낼만 하네. 남자 찾으러 다니다가 더 현타맞았는데 이제 좀 평정심을 찾은 거 같아.”

인연이 있으면 가만히 있다가도 만나고, 인연이 아니면 아무리 이어붙이려 해도 안 된다는데,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도 닦은 사람처럼 소연이 말하자 나선은 혀를 끌끌찼다.

“정신상태 보소. 칼을 뽑은지가 얼마나 됐다고 무는커녕 두부도 썰기 전에 퇴장을 하냐? 쯧쯧. 너 마음이 지금은 괜찮다 해도 또 괜찮지 않을 때가 올 거 아냐? 그때 후회안할 자신 있어? 그때 또 징징거릴 거 아니냐고.”

나선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돌직구에 소연은 무안하면서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해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뜻이라고 돌려말했지만 오랜 친구는 이렇게 자기 속을 몇 번이나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나선은 함께 을지로 호프집에 갈 거라면서 소연에게도 나오라고 했다.

“남자를 만나려면 남자가 있는 곳에 가야 해. 이탈리아 레스토랑 같은 곳에 가봐야 하등 쓸모가 없다고. 거긴 친구끼리 가서 우아하게 먹고 진짜 남자들은 이런 데 많아.”

나선의 말이 좀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맥주가 당겨서 소연은 나가기로 했다. 나선이 알려준 곳을 보니 기사나 SNS에서 본 적 있는 호프집이었다.

오래 돼서 나무 냄새인지 살짝 꿉꿉한 냄새가 나고, 조명은 어두워서 약간은 칙칙해 보였다.

서빙을 하는 남자도 가게 주인인지 50은 넘어 보였는데, 약간 지저분해 보이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호프집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시끄러웠다. 이런 와글와글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소연은 마뜩치 않았지만 나선에게 구박을 받느니 그냥 분위기를 맞춰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선 회식이 있는지 시끌벅적했다. 이미 달큰하게 취한 넥타이 부대 남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선이 말한 것처럼 주위에는 남자들이 득실거렸다. 물론 여성과 같이 한 테이블도 있지만 확실히 레스토랑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안주는 골뱅이와 소면 무침. 그리고 추억 돋는 맥시칸 샐러드를 시켰다. 대학생 때 잘 가던 호프집에서 팔던 맥시칸 샐러드. 그걸 몇십년만에 이런 호프집에서 맛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소연도 간만에 분위기에 취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고, 옆 테이블의 사람들어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연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두리번거리니 나선이 화장실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을 향해 고개짓을 했다.

“소연아, 넘어지지 말고 잘 갔다 와.”

빨간색 여자 파란색 남자. 그 그림을 보고 일어서며 소연은 말했다.

“나 소연이라고 부르지마. 이제 재화야 재화.”

나선은 손으로 머리를 치며 아차차했고, 이내 재화를 열 번 반복했다. 화장실 앞에 간 소연은 순간 난감했다. 남녀공용화장실이었던 것. 화장실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서 가뜩이나 신경쓰이는데 남녀공용 화장실은 최악이었다. 분위기만 복고면 좋은데 화장실까지 굳이 옛날 스타일이라니. 소연은 다른 곳을 갈까 하다가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고 안심이 안 되어 문을 잠갔다. 그 말은 밖에서 문이 안 열린다는 뜻. 잠깐이니 기다려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문을 앞뒤로 당겼다 미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에이 시팔~ 누가 문을 잠근거야?”

소연은 얼른 옷을 추스르고 나와서 일단 문부터 열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려는데 중년 남성이 소연을 아래위로 훓어보더니 큰소리로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아줌마. 아줌마가 여기 화장실 전세 냈어? 왜 문을 잠가요?”

소연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다짜고짜 반말을 하면서 몰아세우는 남자에게 화가 났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싶어서 “남녀공용 화장실 사용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좀 무섭기도 하고 불편해서 잠갔는데 죄송하..”라고 까지 말하는 순간, 그 남자가 변기 앞에 서서 비틀거리며 어느새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소연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얼른 화장실을 나가려는데 뒤통수에 그 남자의 말이 꽂혔다.

“무섭긴 개뿔 뭐가 무서워. 내가 더 무섭다. 아줌마를 누가 쳐다본다고. 새우잡이 배에서도 안 잡아가~”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미 술은 다 깼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테이블로 돌아오니 나선이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 집에 가자.”

찬물을 끼엊는 소연의 말에 나선은 멍한 얼굴로 소연을 쳐다봤다.

“소연, 아니 재화야. 뭐야 갑자기?”

“화장실에서 이상한 사람 만났어. 짜증나. 가자.”

아침의 그 좋았던 기분과 긍정적인 기운은 어느덧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역시 믿을 게 되지 못한다는 걸 하루 사이에 절감했다.     

이전 08화 내 꽃길은 내가 깔러 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