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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twhite Mar 04. 2019

30대 중반의 백수일기 (13)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2016년 1월,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생전 처음 점집에 갔다. 친한 동생이 다니는 점집을 소개받아 갔고 처음으로 신점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나는 피죽도 못 먹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역술가 앞에 앉아 있었다. 신점이라서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역술인은 포근한 인상의 비구니 같았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생년월일을 알려주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그녀가 말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뭘 적고, 쌀알도 뿌리며 혼자 중얼중얼하더니 곧 말을 시작했다.


'니 사주는 한마디로 되게 좋은 사주야, 니 사주는 니 조상들과 삼신할머니가 내려준 사주야'


좋은 사주라는 말에 썩소를 지었다. 그냥 '피식' 이 정도의 엷은 웃음이었다. 좋은 사주인데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가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좋아하지 마, 좋은 사주지만 절대적으로 좋은 건 아냐, 나쁜 게 더 많아'


내가 웃으니 한마디 하면서 좋은 사주가 아니란다. 이건 무슨 모순인가. 나의 사주에는 '천기살'이라는 것이 있단다. 천기살이란 하늘에서 내려주는 사주로 옛날로 치면 왕의 사주라고 한다. 혼자 너무 잘난 왕이라 웬만해서는 눈에 차는 것도 없고, 가족, 친구, 심지어 연인에게서 조차 만족하지 못하는 팔자란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정확하게 사실이었다. 나는 만족보다는 불평이 더 많은 타입이고, 실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외면해 버린 친구와 연인도 제법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불평을 찾아내는 임무를 지닌 것처럼 이런저런 이유들도 사람들을 멀리했다. 지금도 이 기질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역술인이 한참 설명을 해주다가 물어본다.


'그럼 이런 사주는 뭘 해야겠어?'


'모르겠는데요'


'넌 공부할 팔자야, 이런 기질을 살려서 공부를 해야 해. 넌 지금 공부를 하고 있던지 아니면 앞으로 계속 공부하는 자리에 가게 될 거야'


그 당시 나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컨택 중인 학교들에서 티오가 부족하다며 줄줄이 퇴짜를 놓았고, 회사에서 조차 취학 승인이 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이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그쯤 남자친구와 헤어져 더욱더 수렁을 헤매며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나를 곁에서 보던 동생은 정 답답하면 사주라도 보자며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그런데 공부할 팔자라니. 그래도 막힌 길 앞에서 제대로 길을 찾아가는 건 맞나 보다 하며 안심했다. 그녀에게 공부를 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더니, 졸업하면 외국으로 가게 될 거라고 했다. 외국에 다녀오면 한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다며 나가기를 권유했다.  


그때는 외국이고 나발이고 당장 눈앞에 놓은 문제부터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추스르지 못하는 마음과 나의 선택을 따라주지 않는 주변 상황들. 한참 얘기를 나눈 후에 일어서려는 그녀가 한마디 했다.


'지나간 사람 붙잡지 마. 너에게 도움 될 인연이 아니었으니까 떠나간 거야. 그러니 잡지 마. 니 갈길 가.'


내게서 그런 점들이 보였을까. 아니면 열에 몇은 연애 문제겠거니 하고 그냥 던진 말이었을까. 나는 남자친구와의 더러운 이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정말 지나간 남친을 잡을까 하루에도 몇 만 번은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어지러운 마음을 꼬깃꼬깃 접어 단념하고 자리를 떠났다. 첫 사주를 본 소감은 예전부터 오래 알고 지낸 이가 나에게 해주는 따뜻한 조언 같았다. 좋았다. 이런 것이 점이라면 진즉에 보았어도 좋았겠다.


그 후, 생각했던 학교 중 하나에 입학했고, 회사에서도 취학 승인을 받았다. 물론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얻은 자리였지만, 졸업한 지금은 그때의 선택에 만족한다. 외국에 갈 거라던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맞았다. 외국에 가기 위해 준비들을 했었고 추천도 받았다. 결정은 내 손에 달렸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열려있다. 


류시화 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내가 초등학생 시절일 때부터 나와 함께한 류시화 작가. 그의 신간 중 일부

 

지나고 돌이켜 생각하니, 그 모든 막힘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고 나서 이러려고 그때 그렇게 아팠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회사를 떠나고 이제 6개월이 지났다. 똑같이 반년이 지난 지금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때의 나는 많이 아프고 지쳤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강요하는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노력하면 언젠가 보상이 따를 거라는 착각에 나를 많이 혹사시켰다는 것. 하지만 내가 지쳤다는 것조차 얼마 전에 번아웃 증후군 테스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다시는 나를 그런 극한 상황 속에 몰아넣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몸을 추스러야 한다는 생각에 스쿼시를 배운 지 5개월이 지난 지금, 난 그때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단단해진 나를 느낀다. 이제는 그 어떤 도전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분 좋은 예감이. 또 다른 6개월 뒤에는 난 또 무엇을 느끼게 될까.




#30대중반 #30대초반 #백수일기 #퇴사일기 #점쟁이 #역술인 #신점 #일상 #류시화 #좋은지나쁜지누가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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