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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twhite Mar 08. 2019

30대 중반의 백수일기 (14)

싸게 후려칠 생각 마

‘#ㅇㅇㅇ ㅇㅇㅇㅇㅇ’


전화가 울린다. 받고 싶지 않아 외면 중이다. 연락처에 등록된 이름 앞에 ‘#’이 붙은 걸 보면, 카톡에서 연락처 찾느라 스크롤을 내릴 때조차 이름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일로 알게 된 사람을 ‘이름+직위’로 저장한다. 보통 내가 비즈니스로 얽힌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책임님’, ‘박사님’, ‘연구원님’이라고 불렀다. 보통 다 샵을 붙여서 저장했다. 카톡은 사적인 부분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 경계는 모호해져 가고, 이런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회사 떠난 지 6개월이 넘었는데 왜 연락을 하는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분명 아쉬운 부탁을 하려는 거다. 절대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다들 본인들이 아쉬우니 하는 연락인데, 이 사람은 정말 최악이다. 매번 회의 때마다 나에게 남자 안 꼬시고 뭐하냐며, 시집은 언제 가냐고 하질 않나, 내가 테니스를 신사동에서 배운다고 했더니 그럼 돈 많은 남자 많겠다며 잘 꼬셔보라는 등등... 개저씨 같은 멘트들을 쏟아내던 사람이다. 아 핸드폰에 뜨는 이름만 봐도 머리가 다 아프다.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았고, 선배와 논문을 쓰던 중이었기에 마저 집중하려는 찰나, “연락 좀 줘”라는 문자를 남긴다. 돌아버리겠다.


선배와의 얘기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선배가 먼저 연락해서 앞으로 연락하지 마시라고 정중히 얘기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못한다. 어른들한테 대놓고 그런 말은 못 하겠다.


한숨을 한 오만 번 내뱉고 결국 전화를 걸었다. 용건은 프로그램을 한번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프로그램 돌린다는 건 논문이나 실적 보고서에 프로그램으로 땅의 움직이나 구조물의 안정성을 평가해보았다고 내용을 넣기 위해 필요한 행위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고 전공자이면서 그 연구분야를 많이 해본 이가 할 수 있다.


영세한 회사나 전문인력이 부족한 곳에서 종종 부탁하는 내용이다. 내가 회사에 있었다면 보통 보직자들에게 자문이라는 형태의 일을 맡겨 실무는 그보다 한참 아래인 내가 하는 것이다. 결국 내 입장에서는 엑스트라 잡이고 잡일이기도 하다. 내 직무에 포함되는 내용이 아니니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상사가 시키니 울며 겨자 먹기로 야근하면서 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짜증 나는 일이다. 회사에 있을 때도 싼 금액에 종종 이런 일들을 처리해줬다. 엑스트라 업무이니 돈을 주는 것은 고맙지만, 본 업무가 바쁠 때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다들 인맥이니 학연, 지연을 내세워 부탁을 해오는 일이다. 하지만 내 선배도 아니고 정말 바쁠 때는 욕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옘병!


이렇게 나를 통해 일을 하려는 이유는 기술 컨설팅이라고 해서 전문업체에 맡기면 금액을 비싸게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받는 금액의 몇 배 정도의 금액을 지불해야 하니 영세업체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그 돈 필요 없고, 차라리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다.


결과적으로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소속이 없는 것도 이유였고, 프로그램을 돌릴만한 사양의 컴퓨터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아무리 마이너 한 일이라도 그 적은 금액 받으며 갑질 당하고 싶지 않았다. 퇴사 후 이런 부탁을 받은 건 총 3번으로 모두 다른 사람들이 부탁했다. 부정적으로 바라보자면 그들의 속내는 백수로 지내는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돈 얼마 쥐어줄 테니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 결과를 돈 얼마에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회사 내규상 그들이 제시한 금액을 나에게 지급할 수도 없음을(제시할 땐 많이 줄 것처럼)


인스타 @3woosil 작가님 작품 중 일부, 애정 하는 툰:)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으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일하며 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싫어서 회사를 떠났는데 지금도 이런 제안을 받는 것이 불쾌하다. 타인의 고생과 시간을 싸게 사려하지 말자. 


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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