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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1

 도시라는 거대한 허상

by 안노 Jan 28. 2025

  화려한 인생일수록 그림자는 길다. 

  눈이 부시게 환한 조명 아래는 언제나 칠흑 같은 어둠이 존재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대상과 사물은 그렇게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     


  내 기억 속 가장 최초의 극장은,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남쪽 도시 마산 가구거리 입구 태양극장이다. 

  당시 마산은 경남에서 가장 핫한 도시였다. 

  칠십 년대 경제성장정책의 영향으로, 수출자유무역지역이 형성되면서 경남의 시골 청년들은 앞을 다투어 마산으로 대거 이동했다. 

  시골 농사꾼의 자식들이 일명 공돌이 공순이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그 옆에 위치한 한일합성섬유 공장도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70년대 새마을운동의 산업역군이라는 거대한 타이틀 아래 붉은 담요를 대량 생산해 내는 화학 섬유 공장과, 외국 자본의 자유 투입 가능 지구 마련이었다. 


  마산은 그때 그랬다. 젊은 도시였고 다들 가난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의 한국인들이었다. 열정과 자본과 패기가 넘치는 푸른 도시였다.      


  그때는 그랬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목화를 재배해서 목화솜을 타서 물레로 돌려 실을 자아내서 베를 짰다. 

  그리고 그 솜으로 이불을 만들었다. 누에를 키워 얻은 하얀 고치의 집인 견 일명 비단은 평생에 한 번 입어볼까 한 옷이었다. 마 줄기를 찌고 펴서 거친 실을 얻어서 짠 삼베는 여름철 노인들의 필수품이었고 고운 모시는 저승길을 안전하게 안내하는 동반자였다. 모는 양털이 귀했기 때문에 좀체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천연 섬유들을 힘들게 구해서 사시사철 무명천으로 누덕누덕 기워 입고 살던 민초들에게, 신축성 좋고 죽 죽 늘어나고 애써 다리지 않아도 되는 합성섬유 나일론은 가히 혁명이었다.      


  마산 합성섬유 밍크 담요 공장은 바로 그 표상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목화솜으로 누빈 이불이나 군 보급품을 어렵게 구한 모포 담요가 전부였던 그 시절에, 핑크빛 장미가 그려진 폭신폭신한 밍크같이 부드러운 합성섬유 담요는 지친 십 대 공돌이와 공순이에게는 정말 기적의 담요가 되었다. 

  늦은 밤 지친 몰골로 연탄불 꺼진 손바닥만 한 자치방에 들어서면 아랫목에 펼쳐진 그 담요 하나로 언 몸을 녹이고 지친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늘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내어줘야 하는 법이다. 


  화학공장 옆 길게 펼쳐진 하천으로 일 년 내내 화학물질이 24시간 방출되었다. 그때는 무지했다. 

  그저 태어나 처음 보는 희한한 색깔의 물이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그 인근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한 동안 새벽마다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친구들과 그 악취 나는 하천을 돌면서 쓰레기를 줍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어른들은 무심히 시켰고 우리들은 또 무심코 해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오글거리는 식구들 입 하나 덜 생각으로 무작정 보따리 하나 들고 합성동 시외버스정류장에 밤낮으로 십 대 청소년들이 상경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산호동 일대와 합성동 일대는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콧구멍만 한 방 하나에 두세 명씩 모여 자취생활을 했다. 


  그들은 70년대 산업 역군이라는 이름 아래 밤낮으로 공장 기계 앞에서 청춘을 보냈다. 

  십 대 그 아이들은 아직 덜 자란 손으로 공장 기계 앞에서 하루를 보냈다. 

  노동 착취, 인격 모독, 폭행, 성추행. 

  이런 단어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 앞에서 무디고 고루한 추상어로 돌아와 우리들 발밑에서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의 선택은 고향 마을 논밭이 아니었다. 

  가난하다 못해 비렁뱅이 같은 누추한 삶을 그들은 거부했던 거다. 

  대신 그들은 다시 거대한 공장 기계 아래 갇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가뒀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산업역군이라는 희한한 타이틀 아래 자신이 마치 애국자나 되는 양 느꼈고, 이 기계를 어쨌든 지키고 살아내야 미래가 밝고 운명을 헤쳐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영웅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 안에서도 영웅이었을까?     


  가난 밖에 대물림받을 것이 없는 고향보다는 도시가 나은 선택이라고, 낫을 들고 하루 종일 산으로 들로 꼴 메러 다니는 삶보다는 기계가 더 낫다고. 

  그들 앞에는 언제나 산업역군, 수출역군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멋진 포장지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 십 대 아이들은 기계 대신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청춘을 보내고 있지 않는가. 

  매 한 가지다. 

  종일 코피 터지게 이 치열한 한반도 반토막짜리 나라에서 살아남으려고 기를 쓰는 거다. 

  정말 똑같다.

      

  그 시절 그들은 검은색 교복을 입었고 교련이라는 군사 훈련을 학교에서 받았다. 

  도시로 상경해서 공장에서 일하던 학생들은, 낮에는 공장으로 밤에는 또 야간 학교로 향했다. 

  그마저 어려운 학생들은 야학에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푸른 젊은 십 대 청춘들은 공휴일이면 몇 정류장 떨어진 창동 시내로 쏟아졌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마산 창동은 그야말로 최고의 번화가였다. 

  창동 코아 양과 와 고려당, 미보약국을 둘러싼 극장만도 네 개나 됐다. 

  교복사 거리와 포교당 절 위쪽에 위치한 강남극장, 창동 입구 시민극장, 북마산 가구거리의 태양 극장. 번화가 입구에 자리한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린 극장들.     


  합성동 인근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공장지대 젊은이들과, 장군동과 산복도로에서 옹기종기 자취하던 고등학생들, 산호동 마산 상고 학생들. 

  그들이 만나는 교차 지점은 바로 창동이었다.

  그래서 가끔 시내에서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창동은 90년대까지도 인근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사진자료출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412289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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