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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Jul 24. 2024

초록대문집

2-2

 녹슨 대문 틈으로 작은 소리로 외쳐댔다. 제발, 빨리 좀 나오기를. 그때 식당방 불이 켜지더니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인자 오나?”     


  희자였다. 졸린 눈을 비벼대며 문을 열어주었다. 집 안은 캄캄했다.     


  “니, 오늘 학교 안 갔나?”     


  어둠 속에서 돌아보면서 나를 보더니 이를 하얗게 드러내면서 웃는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나는 부엌 아궁이 연탄불부터 확인했다. 저녁에 고모가 갈아준 모양이었다. 밤새 잘 타겠다. 아랫목에는 밥도 한 그릇 묻어 놨다. 희자가 한 모양이다. 희자는 아까부터 내 눈치만 흘금흘금 보더니 부엌으로 뛰어나간다.     


  “저녁 차리께!”     


   희자 하는 꼴을 보아하니 또 학교 안 가고 결석한 모양이었다. 속상하다, 정말. 


  아버지는 여자애들 가방끈 길어봤자 팔자만 사납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고등학교는 여자가 가서 뭐 하냐는 아버지를 고모가 겨우 설득해서 야간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따도록 허락받아 놓은 건데 도대체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나하고는 머리통 속이 완전 반대인 동생이다. 대학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낮에는 공장 다니고 밤에 학교 다니겠다는 거니까 결국 아버지도 큰 명분이 없어 반대하지 않으신 거다. 그런데 희자는 자꾸만 내 의지를 꺾으려 한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기계 앞에서 기계처럼 단순 작업만 하다가 기계한테 완전히 기 다 뺏기고 파김치가 돼서 퇴근하면 춥고 배고프고 딱 죽을 맛이다.

 그런 꼴로 바람 숭숭 들어오는 교실 나무 책상에 앉아 있으면, 어떨 때는 무슨 호강을 받을 라고 이렇게 억척을 떠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가도 교실에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고 그래도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완전히 내가 다른 존재가 된 느낌이다. 그 좋은 느낌 때문에 춥고 배고프고 졸음이 쏟아져도 참을 수 있다. 내가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피로를 단번에 몰아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동생 희자는 정말 나와는 정반대인가 보았다. 교실에 앉아있기가 죽기보다 더 싫다고 했다. 그래도 언니라고 내가 무서워 그나마 가끔 내 눈을 피해 결석도 하지만 이 년이나 꼬박꼬박 다니고 있는 거다.      


  “잡채, 묵어 봐라, 언니야!”     


  동그란 쇠판으로 된 밥상 위에 김치, 잡채, 된장찌개, 계란 프라이까지 푸짐하다. 희자는 구들에 묻어둔 밥그릇을 꺼내 빈 그릇 두 개에다가 주걱으로 퍼 담았다.     


  “저녁 안 묵었나?”

  “같이 묵을라꼬 기다맀지!”     


  그래도 화가 난 척했다. 이참에 희자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 한다. 한참 동안 후루룩 쩝쩝하는 소리만 계속되었다. 허기가 져서 일단 먹고 봐야 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제야 내 눈에 갑자기 잡채 그릇이 보였다.     


  “이거 오데서 났노?”

  “고모부 손님 오시가, 고모가 우리 묵으라꼬!”

  “이 밥도, 고모가 했나?”

  “뭐, 고모가 조카들한테 그 정도도 몬 해 주나?”     


  이제는 정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숟가락을 탁 놓고 밥상을 밀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 희자는 다시 내 눈치를 본다.     


  “니, 촌에 가서 하루 종일 밭고랑이나 매면서 평생 갈래? 언니 맹쿠로 처녀 보쌈이라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나? 어이?”

  “잘 몬 했다!”

  “고모 집도 오데 넉넉하나? 고모는 출가외인이다! 그런데도 조카들 끼고 산다꼬 뒷말 없는 줄 아나? 고모부가 아무도 입도 뻥긋 몬하구로 하니까 이래 살고 있는 기다! 알것나?”

  “안다꼬!”

  “아는 기 맨날 학교나 빠지고 고모 신세 질 궁리나 하나?”

  “알았다! 자꾸 큰소리 내모 다 깬다!”     


  성이 덜 가라앉아 가슴이 두근댔다. 이럴 때는 정말 희자를 정신 차릴 만큼 두들겨 패 주고 싶다. 희자는 자꾸만 잡채 그릇을 내 쪽으로 밀면서 살살 웃어댄다. 아무리 그래도 밉지 않다. 애교도 많고 손재주도 많은 희자. 키도 나보다 훨씬 크다. 아버지는 늘 가시나가 아무 딱지지 못하고 선머슴 같다고 한탄하지만 부끄러움 많고 내성적인 나보다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희자가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덜렁대고 실수투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민하고 꼼꼼한 내 성격이 나도 가끔은 싫을 때가 많다. 너무 다른 성격이라 항상 어른들에게 “언니 좀 배워라”하면서 비교당하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희자는 한 번도 설움을 탄 적이 없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힘든 생활을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도 동생 희자가 항상 옆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혼자였다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벌써 도망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니, 진짜 학교 안 갈 끼가?”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내보았다.     


  “갈 끼다!”     


  희자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뱉었다.     


  “내도 바보 아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간호학원 다니가꼬 간호사 할 끼다! 돈 벌어서 언니야 대학교 등록금 내가 델 끼다!”

  “가시나, 미쳤나? 내가 무슨 대학이고?”

  “와? 지금 언니가 전교 1등 아이가?”

  “야간고등학교서 전교 1등 하모 뭐하노?”

  “우리 담임이 언니 정도면 대학 가고도 남는다 캤다!”

  “지랄 고만해라! 기훈이, 기철이, 기태. 동생들 대학 안 보낼 끼가?”

  “아! 새끼들!”     


  갑자기 밥상머리에 앉아 있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누워 버리는 희자. 이 모습을 아버지가 봤으면 체신 머리 없다고 당장 머리채 뽑혔을 건데. 그런데 나도 가끔은 희자처럼 저렇게 좀 자유롭게 벌렁 나자빠지고 싶을 때가 많다.     


  “똑바로 들어라! 이번 달까지만 다니고 양숙이 다니는 공장에 입사할 끼다. 퇴직금 하고 적금 든 거 털어서 다음 달에는 무조건 아버지한테 황소 한 마리 사 보낼끼다!”

  “그라모 나도 같이 옮기모 안 되나?”

  “까불지 마라!”

  “언니야! 내 고마 학교 때리 치아고 공장만 다니모 안되나?”

  “그라모 바로 짐 싸라! 촌에 내리 가서 어무이 농사 일 거들어라!”

  “싫다!”     

  희자는 기가 푹 죽었다. 나는 일부러 더 화난 척 눈을 흘겨보았다.     

  “알았다, 고마!”

  “기철이 이번에도 군 전체에서 일 등 했단다! 대학은 기철이가 가야지!”

  “참말이가?”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와 우물가에서 그릇을 씻었다.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씻었다. 멀리서 통금 사이렌이 울렸다. 대충 정리하고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희자는 벌서 곯아떨어져 코를 드르렁 거리며 자고 있었다. 세상에서 우리 희자가 제일 태평스럽다. 나는 가끔 그런 희자가 많이 부럽다.     


  책상 위에 놓인 라디오를 조심스럽게 켰다. 자정이 넘어 가방 정리를 하고 과목별 숙제를 하려고 책을 펼쳤다. 그때 통금 사이렌이 온 밤을 뒤흔들며 울려 퍼진다. 오늘은 영어 작문 숙제와 수학 미분 숙제가 있다. 어려웠다. 그래도 이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좋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똑같은 나사만 쪼고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진다. 거대한 기계 부품이 된 것만 같았다. 하찮은 부품 쪼가리 ….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 숙제를 하고 있으면 내가 마치 부잣집 여고생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내일 해 가야 할 숙제가 있고 안 하면 선생님에게 혼도 나고 …. 이런 따위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주간에 학교를 다니는 애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다. 미로 같은 수학 문제를 풀고 알 수도 없는 기호들로 가득 찬 영단어를 보면서 그런 책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을 느끼고 사는지 ….     


  늦은 밤이다. 마당에 셰리가 가끔 컹컹- 거린다. 다들 잠든 고요한 이 밤. 라디오에서는 에띠뜨 삐아쁘 샹송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온 방안이 샹송으로 물들고 있다. 아 … 이 밤이 영원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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