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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Jul 24. 2024

초록대문집 가을

 며칠 째 비가 내렸다. 서영은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사이 그에게 몇 통의 문자가 왔다. 일상을 걱정하는 간단한 문자들. 그는 서영의 공허와 고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서영을 깊이 신뢰하고 좋아하면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천천히 한 발씩 내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안다. 서영이 자신에게만큼은 작은 틈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서영은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울고 서 있는 아이처럼 그렇게 엉거주춤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마음은 더 짙은 지도 모른다. 서영은 그가 주고 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비 오는 창 밖 세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머리가 뒤숭숭했다. 서영은 청소 도구를 꺼내 이층으로 올라가, 아이들 방 문을 열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애써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아이들 방 안 가득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남겨진 물건들을 반듯하게 정리한다는 것이. 그 후 찾아올 깊은 허탈과 공허를 도저히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 이상은 안 된다. 떨어져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매일 방을 정돈하고 창을 열어 맑은 공기를 방안 가득 들여놓고 계절마다 다른 화병에 꽃을 꽂으면서 그렇게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다, 이제는. 그가 서영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러면 머지않은 그 어느 때쯤 기다림이 넘쳐흘러 서로가 서로에게 맞닿을 날이 분명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서영의 마음 한 구석에서 밀려왔다. 이제 큰 용기를 내야 한다. 더 이상 도망갈 길은 없다. 아이들을 위한 기다림이라면, 어미로서 감당할 실 날 같은 용기는 그래도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방에서 나온 추억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들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이층 복도 옆 다락방 문을 열었다. 서영은 그다지 경사지지 않은 계단을 올라갔다. 커다란 상자들과 궤짝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오래 손다지 않은 공간 치고는 적당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바로 여기 다락방이었다. 전업 작가가 되고 나서 출판한 책 덕분에 꽤 많은 원고료가 들어왔다. 서영은 아늑한 주택을 원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공간도 바로 여기였다. 다락방에 대한 호기심과 사춘기 정서가 딱 맞아떨어져서일까. 어린 시절 서영이처럼 아이들은 삼 층에 해당하는 이 공간을 사랑했다. 서영은 가지고 올라간 바구니 속 물건들을 여기저기 옮겨 넣었다. 그러면서 각각의 상자 속에 담긴 추억들을 되새겨 보았다. 작은 아이가 일곱 살 때 대나무 토막으로 만든 인형, 큰 아이가 그린 그림들, 언젠가 바닷가에서 주워 온 하얀 돌들이 가득 든 유리병, 서해안 어딘가에서 퍼 담아 온 흙이 그대로 보관된 병들, 한쪽 책꽂이에 꽂힌 아이들이 쓴 일기장들. 서영은 다락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서영은 깊이 숨이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책꽂이 앞에 앉아 일기장들을 살펴보았다. 책꽂이 맨 아래 칸에는 아이들 앨범들이 꽂혀 있었다. 무심코 앨범 하나를 꺼내는데 갑자기 사지 한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순간 서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서영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 초록 대문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 사진이 기억에 점을 찍듯이 들어왔다.      



  초록 대문 집 사람들. 그 사람들 ….

  오래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그 집.     


  굴러 떨어진 사진은, 초록 대문 집 결혼식 피로연 사진이었다. 초록 대문을 배경으로 거기 살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밝게 웃고 있었다. 앞니가 빠진 채 한가운데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서영이가 거기 있었다. 갑자기 서영의 눈에 눈물이 쏟아졌다. 빛바랜 칼라 사진 흰 테두리 아래 적힌 숫자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1978년 가을.’     

  사진 속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서영의 외로움이 갑자기 차가운 현실로 나타났다. 서영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서 꺼억꺼억 소리가 나더니 점점 커진다.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를 걷잡을 수가 없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터져 나왔다. 그날 오후에 다락방은 서영의 긴 오열로 촉촉하게 젖어 들어 버렸다.    

  

  저녁일까, 밤일까.

  울다가 지쳐 그대로 잠이 든 서영은 그제야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늦은 밤이었다. 서영은 앨범을 거실에 두고 주방으로 갔다. 식빵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반쯤 기대고 누워 다시 앨범을 펼쳤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 울상으로 찍은 사진. 서영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사진 속 아버지는 그 당시 풍채가 좋았다.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십오 년이 지났다. 아버지가 응급실 차가운 침대 위에서 마지막 거친 숨을 내쉬던 순간에도 서영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오래전 입학식 날 서영이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던 것처럼. 앨범 속에는 그 시절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울타리에 살았던 아버지 친구네 막내 로사 사진도 있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로사가, 손으로 한쪽 머리를 들어 올리면서 잔뜩 심술 난 표정으로 거울을 보는 사진이었다. 한쪽 머리카락이 온통 뒤엉켜 있다. 서영은 그 사진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적막한 거실에 서영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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