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철 대문집.
나는 중년이 된 지금도 가끔 똑같은 꿈을 꾼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거나 몸이 더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면 언제나 초록 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가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풀이 무성한 마당에 들어서면 방 한가운데 작고 야윈 악다구니처럼 울어대는 아이가 있다. 때로는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고 또 때로는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기도 한다. 아이는 단 한 번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1978년 봄. 내가 세상을 처음 만난 그 해.
내 생애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던 바깥세상이 초록 대문집을 둘러싼 사람들 덕분에 따뜻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 한가운데 초록 대문집을 두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매일을 살아가던 그 골목.
초록대문은 언제나 녹투성이었고 제대로 문이 잠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잠그려고 하면 아래가 덜컹 내려앉고 또 들어 올리면 위가 삐끗하곤 했다. 그래서 항상 문을 열어두었다. 그 때문이 아니어도 문을 잠글 겨를도 이유도 없었다. 도둑이 들지 않는 동네였고 도둑이 와도 훔쳐갈 것이 없는 동네였다. 어른이 되고 처음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현관문이 이가 딱 들어맞게 탁 닫히는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절, 끊어짐, 공간의 정확한 분리. 이런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차면서 우울이 밀려왔다. 공간 속의 우울.
1979년 가을. 다시 세상이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거세게 밀려들던 해.
공장과 학교에서 돌아오던 언니 오빠들의 몸에서는 코를 찌르는 역한 최루탄 냄새가 향수처럼 가득했고, 대학생 태원 오빠가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시내 중심에 사는 삼촌들에게서는 시민들이 파출소를 점거했다는 소식들이 날아들었다. 할머니가 어시장에서 집으로 가시다가 데모하는 시민들 대열 사이에 잘못 끼여 경찰에게 머리를 세게 맞았다고 한밤에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는 발을 동동 구르시기만 했다. 뭔가 세상이 온통 어두웠다. 그전까지 세상은 내게 소박하고 소소하며 재미있고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79년 가을,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초록 대문을 열고 경찰들이 뛰어들 것만 같았다. 다행히 할머니는 3.15 의거탑 부근 의원에서 빠른 치료를 받아 열 바늘 정도 꿰매고 출혈은 멈췄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아버지는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결국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부마항쟁은 군인의 개입으로 삽시간 종결된다. 많은 시민들이 끌려갔다. 그때 포항집 태원 오빠도 대학생 데모 주동자로 잡혀간다. 아버지를 모르는 호래자식,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늘 질문했던 그 청년은 고문으로 만신창이 되어 초록대문 골목으로 돌아왔다. 그 가을, 희덕 언니는 비밀 연애를 하던 애인 태원을 애타게 찾아다녔고 포항집주인은 날마다 아버지에게 찾아왔다. 아버지는 인맥을 동원해서 사라진 대학생들을 찾았다. 그러나 경찰의 선을 넘어 군인에게 잡혀간 대학생들을 찾아낼 길은 없었다.
어느 단풍이 멋지던 가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쉰 목소리와 초록 대문집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를 듣던 날이었다. 대통령의 서거.
그해 겨울 이른 새벽, 커다란 짐꾸러미처럼 초록 대문집 골목 어귀에 내던져진 태원 오빠. 포항집주인은 오열했고 어린 영민은 가슴에 증오와 분노를 심었다. 태원 오빠는 병원으로 실려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영민 어머니는 어린 영민이 손을 잡고 이삿짐 트럭을 탄 채 멀리 아주 멀리 어딘가로 떠났다. 나는 지금도 새하얀 얼굴에 뽀얀 살결의 영민이 나를 향해 빠진 이를 다 드러내고 웃어주던 그 얼굴이 그립다.
희덕 언니는 그 후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나이 예순 가까이 되는 그녀는 작은 북카페를 운영하면서 아직도 독신으로 살고 있다.
1980년 봄. 벚꽃이 온 세상을 뒤덮을 시절이었다. 우리는 점점 포항집을 잊었고 태원을 기억 속에서 지워갔다. 오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의상실 영자 아줌마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가족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귀를 의심했고 초록 대문집 우리는 모두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했다. 영자 아줌마의 고향은 광주다.
오월의 광주. 영자 아줌마 친정집 옆 두부가게 사장에게 걸려온 아주 늦은 부고였다. 광주에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났고 가족이 모두 간첩으로 오해받아 죽었다고만 한다. 간첩? 그럼 영자 아줌마도 간첩? 순간 초록 대문집 사람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연이어 광주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간첩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죽어 나갔다는 소식이 꼬리를 물고 날아왔다. 영자 아줌마는 남편과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광주로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대희 아빠는 어린 대희를 데리고 영자 아줌마를 찾으러 광주로 떠났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자 아줌마는 후에 TV 5.18 청문회장에서 모습을 보였다. 분노는 사람을 강인하게도 만들고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진심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선의가 칼로 돌아올 때 사람은 괴물로 변한다. 대희네 가족은 지금도 광주에 살고 있다. 영자 아줌마가 사람 옷 만드는 일 대신 사채업을 시작해 현금 부자라는 말도 들었다. 오래전 어머니 유품 정리를 하다가 영자 아줌마가 지어준 쪽빛 정장을 발견하고 한참 넋을 잃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기 때문이다. 의상실 한가운데 팔을 벌리고 서서 웃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긴 줄자를 들고 여기저기 치수를 재며 재잘대던 영자 아줌마, 옷감본 샘플북을 뒤적이며 놀던 대희나 내 어린 동생들. 그때 어머니는 귀부인처럼 멋있었다. 그런 귀부인에게 옷을 만들어주던 영자 아줌마는, 어린 내 눈에 세상에서 제일 멋진 디자이너였다. 영자 아줌마 마음속 어딘가 사악사악 옷감에 초크 칠하던 그 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무당집 뒤채 말숙이네는 말숙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온 가족이 시골로 이사를 했다. 아저씨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전거 대신 경운기를 몰았고 밭을 갈았다. 말숙은 농협에 취직을 했고 용숙 언니는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한다고 들었다. 막내 용춘은 전문 농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용숙 언니의 벌겋게 동상 입은 언 손이 가끔 그립다.
무당집 안채 형식이네는 또 다른 비극을 맞았다. 사진관을 하던 형식이 아버지의 외도로 형식이 어머니는 이혼을 결정하고 딸 향지를 데리고 떠났다. 형식이 아버지는 부유한 이혼녀와 재혼을 한다. 형식의 사춘기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몇 번을 도망갔다가 다시 아버지 손에 잡혀 오기를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무렵 형식은 시내 은행 강도가 되어 대낮에 은행을 털다가 바로 검거되었다. 형식에게 아버지는 하늘이고 우상이고 우주였다. 그런 우주가 다 무너져 내렸으니 그가 뭘 해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 담긴 믿음과 신념이 깨지면 인생은 무너진다. 지금도 형식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아련하다.
이 모든 소문들은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말들이었다. 어머니는 그들 모두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셨다.
내 기억 속 초록 대문집은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부자네 가족은 보상금을 넉넉하게 받고 도시 중심부에 있는 멋진 빌라로 이사를 갔다. 연자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청난 돈을 상속받았고 연자 아버지는 평생 일 한 번 하지 않고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로사네 가족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아파트에 입주했다. 중대장 아저씨는 아파트 입주 몇 달을 남긴 그해 겨울 간암으로 떠났다. 요한 오빠는 음악을 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대학을 포기한 채 밴드를 결성하고 뮤지션의 길을 걸어갔다. 중대장 아저씨는 아마도 간이 새까맣게 타들어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싶다.
앞집 미주네 가족은 부부의 고된 맞벌이 끝에 주택을 사 이사했고 영주 언니는 상업학교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서 해외 파견도 가고 공부도 더 많이 해서 연구원과 결혼해 미국에 산다. 미주 언니와 동생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잘 산다고 한다.
내게 가끔 자장면을 사주던 용팔이 삼촌은 희자 언니와 결혼해 화장지 공장을 운영하며 잘살고 있다. 어머니 말씀처럼 희자 언니 복인지 결혼 후 하는 일마다 잘되고 돈이 자고 일어나면 굴러왔다고 한다. 집은 대궐처럼 넓고 좋지만 정리가 도무지 안 되고 항상 지저분하다고 희덕 언니와 형제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너무 까탈스럽고 야무져도 돈이 안 붙는 법이라며 희자 언니를 변호하기도 했다. 어린 나를 연애의 포로처럼 데리고 다니던 그들은 지금 얼마나 행복할까?
중년의 나는, 종일 마당 한 점 없는 아파트 어느 층에선가 공중부양하듯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믿지 않는 세상. 믿지 못하는 세상. 오래된 흑백사진첩을 들여다보듯 기억을 들여다보며 갓 구운 통식빵의 구수한 냄새 같은 초록대문 그 집을 추억한다.
그 마당에 아이가, 울고, 있었다.
이제 우는 그 아이를 살포시 보듬어 초록 대문 마당을 나서며 데리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