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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이라 쓰고 호캉스라 읽는다

현명하게 동굴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by 율성휘

현명하게 동굴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 건,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뒤였다. 소중한 것이 떠난 세상은 흑백의 영화처럼 멈춰버린 듯했다. 집 안에 틀어박혀 빛 한 줄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커튼을 굳게 닫고 전화기의 전원을 껐다.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어린 목소리는 그때 당시 벼랑 끝에 선 나에게는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절망의 외침으로 들렸다. 그 파도를 피하고자 동굴 속으로 더욱 깊숙이 숨어들었다. 그곳은 한 달, 어쩌면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고통으로 얼어붙은 나를 가두어두었다. 시간의 감각마저 무의미해진 그곳에서 나는 내가 만들어낸 절망의 감옥에 갇혀, 서서히 죽어갔다.


진정한 동굴은 처절한 시간을 견뎌낸 후에야 발견되었다. 무너진 마음을 겨우 추슬러 겨우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눈부신 햇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눈을 찔러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이질적인 소음으로 귓가를 맴돌았다. 세상은 여전히 춤을 추듯 생동했지만, 나는 그 춤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리듬을 따라가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낯설고 이방인의 것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겪은 것은 동굴이 아니라, 망가진 나 자신을 방치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내가 자신을 파괴했다는 것을.


그 이후 나는 적극적으로 나만의 안식처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는 조용한 카페를 가서 마음을 정리하고 하루는 노래방, 공원 등을 기웃거렸다. 동굴을 찾는 것에 재미가 붙었을 때쯤 집에서 한두 시간 거리에 있는 고요한 호텔을 발견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곳이었다. 방에서도 실컷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장점에 홀려 그곳을 예약했다.


방문 당일, 동굴에 들어가는 주제에(?) 이렇게 신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껏 기대에 차 있었다. 서둘러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희미하게 끊어지는 듯했다.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고요함.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되 나를 잃지 않으려 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끼고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며 바람의 속삭임을 들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누구에게도 변명하지 않아도 어떤 의무도 다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마치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실컷 마음 속 동굴을 만끽하고 난 뒤부터 동굴은 단절이 아닌 새로운 연결을 위한 준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서 잠시 멀어지는 것은, 세상을 등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깊은 호흡이었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했다가 숨을 멈춘 채 고요함을 만끽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올라 들이쉬는 한 모금의 공기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그 아래에서 고독의 묵직한 무게를 느꼈다.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을 견디며 자신을 단련했다. 마치 광부가 어둠 속에서 보석을 캐내듯.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강인해져 있었다.


그 뒤로 호캉스가 취미이자 특기가 된 나는 동굴로 들어가기 전, 늘 섬세한 준비를 거친다. 며칠 전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다시 주워 담을지 고민한다. 가방을 꾸리면서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펼치고, 밑줄 그어진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때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텅 빈 공간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정리된 짐을 훑어보면서 반드시 이 마음을 기억하기로 다짐한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을 버리고, 회피하기 위해, 단순히 도망치기 위해 동굴을 선택하지 않을 것. 실컷 쉬고, 충분히 울고 난 뒤에야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할 것. 이 마음을 늘 되새기며 동굴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첫날은, 주로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 생각들을 흘려보낸다. 슬픔이 밀려오면, 눈물을 흘린다. 외로움이 가슴을 짓누르면, 그 고독을 온전히 느낀다. 분노가 차오르면, 베개를 힘껏 껴안고 소리 없이 운다. 이 모든 감정이 허락되는 곳. 그곳이 바로 나의 은신처, 동굴이다.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고, 모든 감정을 자유롭게 흘려보내는 것과 같다.


둘째 날이 되면 몸을 조금 움직인다. 호텔 주변의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다. 묵묵히 걷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러면서 내가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 앞에서 무너지지는 않는다. 지금은 대답할 수 없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질문에 대답할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친한 친구처럼 혹은 가족, 연인처럼 내가 나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을 둘째 날에 꼭 갖는다.


셋째 날쯤 되면, 낡은 노트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묵혀두었던 생각들을 풀어놓고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끄집어낸다. 미안하다는 말. 보고 싶다는 그리움. 사랑한다는 고백.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 모든 말들이 자유롭게 흘러나온다. 그곳에서 나는 가장 솔직한 나 자신과 마주한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는 것과 같은 해방감을 느끼면 꽉 눌려 있는 심장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 날이 오면 아쉬움이 밀려온다. 좋은 시간은 항상 이토록 빠르게 흘러가는 건지.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나는 안다. 동굴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는 것을. 체크아웃하고 문을 나서는 순간, 돌아가야 하는 곳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충분하게 채워진 마음을 들고.


가족들과 친구들은 동굴에 자주 들어가는 나를 걱정하곤 한다. 그럴때마다 탐험가로서의 숙명임을 말한다. 탐험하지 않으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고. 이따금 동굴에서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괜찮다. 동굴은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저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과정 자체가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다보면 가끔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보석을 찾아내기도 한다.


어떤 동굴은 깊고 몇 날 며칠이 필요하다. 어떤 동굴은 얕아서 하루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으로도 풍족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 또한 나만의 작은 동굴이 된다. 이제 나에게 맞는 여러 가지의 동굴을 찾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다.


나에게 이제 동굴은 도피도, 회피도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다. 동굴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소음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아만 했다. 오직 나만의 방식을 통해 동굴에 내려가야만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여정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나를 찾는 여정은 이제 여행과도 같다.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설렘과 호기심, 그리고 잃어버린 또 다른 감정들을 찾기 위한 즐거운 여정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오늘도 동굴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겁 없이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그러나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그 안에서 나를 마주하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올 때, 한층 단단해진 나를 느낀다. 동굴은 이제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다. 나를 잃지 않고, 나 자신과 마주하며, 삶을 조금 더 깊이 살아내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자 여행이다. 오늘도 나는 그 여정을 감사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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