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인생 2막 아빠 에세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 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은 바보다 캔디 캔디야
70·80년대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캔디의 가사다. 가사에 ‘캔디’ 대신 ‘아빠’를 넣어도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아빠는 울면 안 된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 혼자 쓸쓸해져도 거울 속의 나하고 얘길 나눈다. 혼자 중얼거린다. 얘기 나눌 상대가 없다. 가족도 있는데. 친구도 있는데.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아빠야. 힘들어도 참고 웃어라. 아빠는 울면 절대 안 된다. 울면은 바보다, 아빠, 아빠야.
이젠 울어도 된다. 아빠가 고아 소녀(캔디)도 아니고. 울어라, 아빠여. 그만한 자격 있다. 캔디가 방영되던 시기에 나 같은 아이를 뒀던 우리 시대 아버지도 캔디처럼 살아왔다. 외로워도 참고, 슬퍼도 참고, 힘들어도 참으며,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오직 직진, 직진이었다. 그땐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가족의 생존이 먼저였기에 ‘나’ 따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좋든 싫든 한 직장에 30년씩 말뚝 박고, 더러워도 참고 힘들어도 참으며 다녀야 했다. 존경받아야 마땅할 대단한 인생을 사셨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실 한 가족의 건사, 그것만큼 위대한 인생 목표가 어디 있겠는가.
그땐 또 부모님의 몰빵 장학금 때문에라도 자기 인생을 살기 힘들었다. 부모님이 소 팔아서 힘들게 공부 시켜 주신 걸 알기에 부모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나처럼 살지 말고, 좋은 대학 가서 출세해서 땅땅거리며 살라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자식에게 몰빵했다. 그 돈으로 공부하니 부모님이 자랑할만한 삶, 남 보기 그럴듯한 삶을 살아야 했다. ‘뉘 집 자식인데, 이렇게 출세했어? 부럽구먼.’ 고생하신 보답으로 이 한마디 들려드려야 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인생을 살 수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부모님 세대 영향으로 지금 우리 세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내 또래 대부분 적성은 상관없이 좋은 대학 가서 번듯한 직장 잡으려고 경쟁했다.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사회가 정해 놓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고 싶은 일이 있던 사람도 하고 싶은 일 대신 취직을 했다. 유학 다녀와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던 나도 취직을 했다. 내 친구 성진이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없었기에 취직을 했다. 나도 그도 남들처럼 취직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취직은 어렵다.) 그리고 열심히 달렸다. 그러다 나는 중간에 넘어졌다. 두 번이나 넘어졌다. 성진이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열심히 달리고 있다. 머리숱 많던 직장 초년병 시절부터 만나기만 하면 곧 회사 그만둘 것처럼 굴더니, 머리숱 얼마 안 남은 지금까지 머리카락 휘날리며 열심히 달리고 있다. 30년 가까이. 중간에 넘어질 뻔도 했다. 그런데, 신문에 날 정도의 사고에 휘말리면서도 살아남았다. 어찌나 두뇌 회전이 빠르고, 능력이 좋은지 또 잘릴 것 같으면 이직했다. 그것도 대기업으로만.
진로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진로 적응도(Career Adaptability)가 높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진로 적응도가 빵점이었다. 두 번씩이나 적응 못 하고 퇴사했으니. 내 친구 성진이처럼 뜻밖에 직장 생활에 적응 잘 하는 사람은 퇴사하지 말고 계속 다녀야 한다.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는. 직장 생활로만 보자면 성진이는 승자였다. 반복적으로 직장 생활에 실패한 난 루저였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성진이 같은 친구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직장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회사 다닐 때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한편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다.) 직장 생활에서는 난 루저였지만 판 바꿔 장사에서는 루저가 아니었다. 누가 시키는 일 잘 못하고, 어디 얽매이는 거 싫어하는 내 성격상 조직 생활보다는 자영업이 잘 맞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남 눈치 안 보고 자기 마음대로 할 때 성과가 나는 유형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성과가 나기 마련이다.
또 다른 내 친구 재상이를 봐도 알 수 있다. 한때 나의 두 번째 가게에서 매니저를 했던 재상이는 내 가게를 깨끗하게 말아 드실 뻔했다. 어쩜 그렇게 매니저 일을 못 하는지. 술 처먹고 늦잠 자다 가게 오픈 안 하고, 오픈하면 장사 준비하다 말고 짱 박혀 자고. 베짱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가게 말아먹다 잘렸던 재상이가 50 넘어 앨범 내고 가수가 되었다. 세상에나. 진짜 베짱이가 따로 없었다. (솔로 가수는 아니다. 많이 팔릴 것 같냐고 묻지는 마라. 곤란해지니까.) 매니저였을 땐 꼴도 보기 싫었지만 노래할 땐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누구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빛이 난다.
성진이가 회사 생활 대신 장사를 한다면, 내가 장사 대신 다시 직장 생활을 한다면 잘 할 수 있을까? 성진이가 장사를 잘 할 수 있을진 몰라도 내가 장사보다 직장 생활을 잘할 리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래도 누구나 잘하는 일 한 가지씩은 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사람은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힘들어도 참고 다녀야 했다. 이를 악물고 한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먹고 살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뀐 지금은 더 다니고 싶다고 더 다닐 수도 없지만 퇴사해도 먹고 살 거리가 다양해졌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SNS의 발달로 자신만의 콘텐츠만 확실하면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전문가로 대접받으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니 더는 맞지 않는 일 붙들고 울음을 참아낼 필요 없다. 캔디처럼 참고 참고 또 참지 않아도 된다. 어딘가 분명 나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지금 하는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인생에 한 번쯤 과감하게 도전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각자 맞는 답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