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NA Mar 31. 2022

지옥의 문이 열렸고, 나는 제 발로 들어갔다.

고단한 뉴욕 살이, 그 시작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다. 모든 사람은 자지러지게 울면서 태어나지 웃으면서 태어나지 않는다. 마치, 나오기 싫은 세상에 억지로 끌려 나온 것 같이 그렇게 서럽게 울며 삶을 맞이한다. 이런 말 하면 부모님이 노여워하시겠지만, 가끔, 사실은 아주 자주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하고 생각한다.


인생이 참 웃기다. 세상에 나오고 싶다고 선택한 적은 없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이 어렵다. 싫어도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 함께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운명론을 믿기도 하고 사주팔자나 온갖 유사과학에 의존하여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도 한다. 적어도 미래를 안다면 선택이 쉬워질 테니까.


나는 대부분의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를지언정, 싫은 것은 명확히 아는 턱에 내 인생의 선택의 기로는 항상 덜 싫은 것을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한번, 그때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2017 한국계 은행에서 미국의 대형 의류 매장으로  직종을 변경하던 해이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다고 난리 치던 직장이었고, 하고 싶던 일과 백 프로 일치하지 않았지만 일단 그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에서 큰 탄력을 받으며 무엇보다 아무런 연고 없이 맨땅 헤딩으로  성취해낸 것이라는 것에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렇게 인생이 탄탄대로, 막힘없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물론, 그랬다면 내 인생이 아니었겠지.


아뿔싸 하고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입사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유통, 매장직 경험이라고는 한국에서 1년 정도 스파 브랜드 매니저 생활뿐이었지, 미국에 와서는 흔히들 말하는 ‘화이트 칼라’ 직군에서만 일했다. 주변 친구들이 왜 다니던 은행을 집어치우고 매장직으로 역행을 하냐고 했을 때, 나는 다 계획이 있다 했다. 나름의 계획이란 6개월 매장 근무 후에 본사 지원이라는 원대한 포부였지만… 못할게 뭐 있나 싶었다.


하지만 새 직장에서 현타가 오기까지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체력적 한계가 먼저 찾아왔다. 매장 오픈 조는 새벽 6시 출근을 하여 당일 배달 온 옷들을 판매할 준비를 하고, 중간조는 출근하여 매장을 운영한다. 타임 스퀘어라는 위치적 특성으로 술집도 아닌 옷가게가 새벽 두 시까지 영업을 하였고, 그로 인해 마감 조로 출근하면 빼박 새벽 다섯 시 출근이 다반사였다.


덕분에 첫 주가 지나고 체중이 5킬로나 줄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업무 호흡을 맞추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사무실에 앉아 타자나 두들기던 내가 각 층당 학교 운동장 크기의 3층 매장을 왔다 갔다 하려니 살이 안 빠질 수가 없었다.


6월. 여름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시작하는 세일로 피팅룸에는 산더미 같이 옷이 쌓이고, 고객들이 신나게 헤집어 놓은 온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돌아다니며 일일이 줍줍 하는 덕에 허리가 편할 날이 없었다. 이미 진상 고객으로 힘든 일을 두배로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허구한 날 말도 안 하고 매장을 안 나오는 직원이었다.  덕분에 나는 닥치는 대로 물불 가릴 것 없이 두세 명의 몫을 해 내야 했다.


매장 규정상 직원들은 올블랙을 입어야 했기에 옷 고를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긴 했지만, 퇴근할 무렵에는 어쩐지 더 심해진 다크 서클과 함께 온갖 육체노동에서 오는 퀴퀴한 땀 냄새가 먼지와 한데 어울려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없었다.


마감 조 인 날, 운이 좋으면 새벽 3시 반 정도에 퇴근을 한다.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뉴욕도 평일 세시 반에는 곧곧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하고 사람이 없다. 평일 새벽 세시반의 뉴욕 지하철에서는 세상 태어나 보지 못한 희한한 광경이 자주 목격된다.


키 190에 육박하는 거구의 수염자국이 아직 선명한 남성이 저렴한 가격 덕분인지 가짜 티가 나는 가발을 쓰고, 저렇게 큰 하이힐이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만큼의 거대한 힐을 신고, 원래는 타이트하지 않았을 듯한 핏의 원피스를 입고 어디론가 향하는가 하면, 쇼핑 카트가 꽉 차도록 닮은 쓰레기 봉지와 알 수 없는 물건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카트 양쪽에 주렁주렁 달고 승객이 없는 좌석에 들어 누워 잠을 청하는 노숙자가 있다.


평일이지만 술에 취에 인사 불성인 취객의 반갑지 않은 시비 또한 한 달의 한, 두 번 꼴로 감수해야 하는 언짢음이었다. 새벽 세시 반 뉴욕의 지하철은 지옥이다.


개같이 고생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시절만큼 뼈저리게 몸으로 체험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어느 그 누구도 나를 등 떠밀어 이곳에서 일하게 하지 않았다. 이곳은 북한의 노동 캠프가 아니다.


그렇게 입사 후 한 달 즈음, 심각한 현타가 왔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사에서 일하는 꿈을 저버릴 수 없었다. 너무 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망할 놈의 희망 때문이었다.


지금도 정말 신기하게 느껴지지만, 나는 그 직장에서 무려 2년을 버티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어디에서 그런 초인적이 힘이 솟아나 2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다.


지나고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항상 얻는 것은 있다.


2년이라는 그 길고 길었던 바닥 생활 (나는 이 시기를 내 인생의 바닥이라 여긴다.)을 겪으며 겸손해졌다. 이제는 무슨 일에 대해 불평을 하더라도 여느 때 보다 더 최악이었던 2017년부터 2019년의 비참한 생활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 2년간의 수모를 생각하면 어쩐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아주 쓸모없던 경험은 아니었던 듯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노자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니, 메시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