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지나 노곤해진 두시쯤이었다. 영업팀 이 팀장이 김 대리를 불렀다. “김 대리가 만든 사장님 보고 자료를 검토했는데 지금 이야기 좀 할까?” 김 대리는 10분 후에 영업지원팀 박 대리와 어느 고객사의 채권 한도에 대해 의논할 예정이었다. 김 대리는 전화로 박 대리에게 약속을 한 시간 정도 늦춰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박 대리는 협력업체 실사를 위해 외부 일정이 있고 자신은 어차피 야근을 할 예정이니 괜찮으면 저녁에 이야기해도 좋다고 했다. 김 대리는 고객사에게 채권 한도를 내일 오전까지 알려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 내부 협의를 끝내야 한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저녁 좀 먹어 보려 했는데...” 김 대리는 한숨을 쉬고 아내에게 뭐라고 카톡을 보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이 팀장이 김 대리에게 예정에 없던 미팅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김 대리는 오늘 중 끝내야 하는 박 대리와의 업무 협의를 오후에서 저녁 시간으로 조정해야 했다. 따라서 김 대리는 가족과 저녁식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례에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할까? 이 팀장이 김 대리에게 ‘지금’ 이야기하자고 한 것이다. 김 대리가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인지 물어 보지 않았다. 이 팀장이 사장님 보고 자료에 대해 ‘언제’ 이야기할 수 있는지 김 대리에게 물어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 대리와의 미팅 이후 또는 다음 날에 이 팀장과의 일정이 정해졌을 것이고, 김 대리는 오붓하게 가족과 저녁을 먹고 야근 없는 다음 날을 상쾌하게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팀장은 김 대리의 시간 보다 자신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부하의 시간 보다 상사의 시간이 더 가치가 높다는 생각이 많은 조직에 만연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아랫사람의 일정을 흔들어 놓게 되고 흔들린 일정은 다시 그들의 생산성을 낮아지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조직의 평균 생산성이 저하된다. 상사는 부하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부하의 시간을 존중하지 않는 상사는 위와 같이 부하의 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하의 집중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회의에서 돌아오던 이 팀장이 정수기에서 물을 마신다. 종이컵에 두 번쯤 마시니 물통에 물이 떨어진다. 이 팀장은 정수기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김 대리에게 물통을 교체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김 대리는 엄청나게 큰 엑셀 워크시트에서 잘못된 수식을 찾느라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있다. 물통을 교환하고 자리에 돌아온 김 대리는 처음부터 다시 엑셀 시트의 에러를 찾기 시작해야 한다. 결국 그는 일을 끝내느라 점심을 건너뛴다.
상급자의 급여가 높으니 상급자의 시간이 하급자 보다 가치가 높은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순간에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다행히 우리의 이 팀장은 김 대리가 커다란 모니터의 엑셀 시트를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고 자신이 물통을 교체했다.
김 대리가 사장님께 보고 한번 하려면 미리 일정을 잡아야 하지만 사장님은 김 대리를 수시로 호출한다. 사장님의 시간이 중요하고 일정이 예측 가능해야 하는 만큼 김 대리의 시간과 일정도 소중하다. 설사 사장님이라고 해도 “김 대리 보자고 하세요.”가 아니라 “김 대리 다른 약속 없으면 좀 보자고 해 주세요.” 거나 “김 대리 괜찮은 시간에 미팅 잡아 주세요.” 라고 해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한 이후에 재택 근무가 늘어났다. 집에서 일을 해도 업무에 지장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생산성이 늘었다고 이야기하는 직원들도 있다. 방해 받지 않고 일정대로 일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사무실로 돌아온 직원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습관이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