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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 리셋하기

by 박코치

모바일폰을 오래 사용하면 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느려지거나 배터리가 빨리 소모된다. 앱을 설치했다 지우면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앱이 주인도 모르게 메모리나 전력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리셋(reset)을 해야 한다. 리셋은 기기에 있는 앱, 데이터와 등록정보를 모두 지우고 공장에서 출고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리셋을 하면 운영 프로그램도 업데이트되어 새로운 기능도 설치되고 속도도 빨라져서 새 모바일폰 같은 기분이 든다.


국내영업팀 김 과장은 회사 다니는 게 별 재미가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일 년 전에 이 팀장이 부임하면서부터 그랬다. 팀장과 잘 맞지 않았다. 이 팀장은 목표 지상주의자이다. 매달 목표 달성에 목숨을 건다. 반면에 김 과장은 고객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의 이익에 손해를 보더라도 고객 관계를 굳건히 만들어 놓으면 결국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표 달성은 영업사원으로 당연한 것이니 매월 숫자는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이 팀장은 거래에 있어서 가격이나 채권에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아직은 경쟁사에 비해 품질이 우수해서 큰 문제가 없지만 고객사들이 경쟁사 제품으로 갈아 탈 준비를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머지않아 고객사가 이탈하고 매출 증가가 둔화될 거 같다. 김 과장은 이런 식으로 영업하면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거 같다고 팀장에게 계속 말해 왔다. 대형 고객사와의 거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팀 동료들은 팀장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가고 있다. 목표를 달성해서 성과급 받고 승진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팀장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 김 과장은 일을 잘하고 똑똑해서 팀장 감으로 꼽혀 왔다. 사실 이 팀장과 입사가 1년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김 과장은 팀에서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있으면 먼저 손을 들기도 하고 회식도 주선하고 팀 분위기에 앞장 서왔다. 이제는 이 팀장은 물론 팀원들과 같이 점심도 먹기 싫고 어울리기도 싫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팀원들도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지도 않고 퇴근 후 한잔하자는 얘기도 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다. 그래도 이 팀장의 영업 방침에 전적으로 따라가기는 싫다. 회사를 옮겨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럴 용기는 없다. 팀장만 아니라면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 업종도 매력있고 정도 들었다. 그렇지만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신입사원의 기분으로 새롭게 시작해 보고 싶다.


직장인에게 리셋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직장인의 리셋이란 조직 내의 불편한 관계나 잘 풀리지 않는 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즐겁게 일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직장이나 부서를 옮겨서 새로운 상사 및 동료와 새로운 업무를 하고 싶다는 욕구로 표현된다.


한국의 직장인들도 과거에 비해 전직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직장을 옮기는 것은 아직도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토마스 홈스와 리차드 라헤가 만든 스트레스 스케일 (The Holmes and Rahe Stress Scale)에 따르면 직장이나 부서를 옮기는 것은 인간의 스트레스 중 18번째로 큰 스트레스이다. 친한 친구의 죽음(17위)에 맞먹는다. 전직이 다반사인 미국인들도 직장을 옮기는 것은 큰 일이다.


게다가 한국의 산업은 규모가 적고 업종 내 기업의 수가 몇 개 되지 않아서 옮길 직장이 많지 않다. 전 직장에서 하던 업무를 계속 하고 싶다면 대개 경쟁사로 옮겨야 한다. 아직은 경쟁사끼리 서로 인력을 뽑는 분위기도 아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어서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고 해도 옮기기 쉽지 않다.


회사를 떠나고 싶지 않다면 부서를 옮기는 것이 리셋의 방법이다. 부서를 옮긴다는 것은 업무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감수하고 부서를 옮긴다면 새로운 상사, 동료와 새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회사 내 평판이라는 게 있어서 부서만 옮긴다고 본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기는 힘들다. 본인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갑자기 행동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전직이든 부서이동이든 결국 리셋은 새로운 상사 및 동료와 일하게 될 때 가능하다. 즉, 부서를 옮기지 않더라도 상사가 바뀌어 부하의 변화를 인정하고 응원해 준다면 부하는 리셋하게 된다. 상사는 직장 생활 리셋의 핵심이다. 부하의 리셋을 위해 상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강령이 있다.


상사는 새로운 구성원을 편견 없이 대해야 한다.


부서장이 바뀔 때 전임자와 후임자가 인수인계를 한다. 중요한 인수인계 사항 중 하나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구성원에 대한 전반적인 평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인수인계는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구성원에 대한 전임 상사의 평은 후임 상사에게 선입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임자는 부서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던 부하 직원에 대한 인상도 지우고 새롭게 보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전임자에게 들은 부하에 대한 평은 상사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정 대리는 자주 지각을 했다. 팀장이 바뀌면서 지각하는 버릇을 고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아애 출근 시간 보다 한 시간 빨리 오기로 작정하고 월요일 아침에 8시에 출근했다.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출근한 팀장이 말했다. “어? 정 대리 일찍 오네?” 아, 들었구나... 씁쓸했다.


또한 상사는 처음 같이 일하게 된 부하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상사는 새 구성원에게 편견 없이 일을 맡겨야 한다. 백지 상태에서 구성원의 직급과 경험에 맞는 일을 주고 평가해 보아야 한다. 전임자의 평이나 소문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구성원에 대한 평가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


최 차장은 해외 대형 고객인 A사의 담당자이다. 부사수인 박 대리는 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어를 잘 한다. 최 차장은 정확한 소통을 위해 A사와 컨퍼런스 콜을 할 때 박 대리에게 많이 의존했다. 최 차장도 퇴근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가 많이 늘었고 콜에서 발언을 늘려가고 있었다. 신임 팀장이 부임하고 A사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는 콜을 하기로 했다. 미팅 시간이 되었을 때 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박 대리를 쳐다보며 “시작합시다.” 하고 말했다. 아, 들었구나... 씁쓸했다.


나는 임원과 CEO로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외부에서 영입된 임원이나 대표는 같이 일하게 된 부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없다. 누가 실력자고 누가 부진자라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정보를 굳이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직책과 담당 업무에 따라 당연히 해 낼 거라고 여기고 업무를 주고 지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업무 결과에 따라 칭찬을 해 주기도 하고 가르치거나 혼줄을 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료 임원이나 인사부서를 통해 B 팀장에 대한 과거의 평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똑똑하지만 동료와 잘 부딪치고 업무에 열의가 없었다고 했다. 내가 아는 B 팀장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 평가와 다르다는 말에 “대표님이 오신 다음에 B 팀장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는 대답이었다. 회사를 떠나는 환송회 자리에서 B 팀장이 잔을 들고 왔다. 소주를 따르며 “대표님, 편견 없이 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B 팀장은 리셋에 성공했다.


내가 외부에서 영입되지 않고 내부에서 승진했다면 지레 판단하지 않고 편견 없이 B 팀장을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고백하건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리셋은 상사가 80이고 부하 자신의 노력이 20이다. 전적으로 상사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사에게 리셋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제 밥값을 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기회이다. 아니, 그 무엇보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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