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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코치 Aug 29. 2021

결재를 생각한다

A사의 대표로 취임한 첫 날 박 대표는 전자결재를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이삼십 건의 결재문서가 올라와 있었다. 전 직장에 비해 대표이사가 엄청나게 많은 결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굳이 대표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결재문서가 눈에 띄었다. 박 대표는 업무 파악도 할 겸 당분간 올라오는 모든 결재를 해 보고 개선방향을 생각하기로 했다.


3개월 후에 박 대표는 구매팀의 B팀장을 불렀다. 구매팀은 결재를 많이 올리는 부서 중 하나였다. 구매 담당자들이 일주일에 대여섯 건 정도의 자재 가격변동에 대한 기안을 올리고 있었다. 구매팀에서만 월 20여건의 결재가 올라왔다. 박 대표는 그 중 한 부품의 가격인상 건에 대해 물었다.


“B팀장, 내가 결재하지 않으면 이 자재 가격은 올려주지 않을 건가?”

“올려주기는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러면 그냥 올려주면 되지 왜 결재를 올렸죠? ‘재가(裁可)해 주십시오’ 라고 되어 있구먼.”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 올렸습니다.”

“그럼 그냥 이메일로 보고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몇만원짜리 부품 가격을 몇백원 올려 주는 걸 대표가 꼭 알고 있어야 하나? 나 그거 몰라도 되는데?”


‘결재(決裁)’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결정할 권한이 있는 상관이 부하가 제출한 안건을 검토하여 허가하거나 승인함’이라고 나와 있다. 즉, 결재의 본질은 무엇을 허락하는 것이다. 결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돈을 쓰는 데 허락을 받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새로운 일을 해 보겠다는 허락을 받는 것이다. 후자는 품의(稟議) 또는 기안(起案)이라고도 한다.


결재라는 제도는 기업을 비롯한 국내의 모든 조직에서 활용되어 왔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결재의 실상은 그 본질과 다르고 심지어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결재의 실상과 왜곡된 모습을 들여다보자.


결재의 실상은 한 번 허락 받은 사안을 다시 허락 받는 절차를 통해 비용을 통제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경영계획에 따라 운영되는 조직이라면 연중 지출할 비용을 내년도 경영계획을 수립할 때 이미 결정한다. 제조업체라면 연말에 내년 매출계획과 함께 원가, 인건비, 투자, 광고비, 판촉비, 출장비 등 모든 비용을 상세히 산출한다. 따라서 출장을 가거나 시즌 광고를 위해 그때그때 결재를 받는 것은 이미 승인 받은 일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승인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계획 보다 비용을 크게 초과해서 광고를 하게 되었다면 비용을 더 지출하고라도 광고를 할 필요가 있는지 보고해서 다시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해외 출장과 같이 사전에 계획되었거나 일상적인 지출에 대해서도 사전에 결재를 통해 허락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글로벌 회사들은 연간 경영계획을 수립할 때 목표, 전략, 실행계획 및 비용을 세부적으로 토의하고 승인한다. 그 다음에는 담당자가 계획한 대로 상세 계획을 만들고 비용을 집행한다. 상사와 상세 계획에 대해 의논하기는 하지만 다시 결재를 올려 승인 받는 일은 없다. 출장비 같은 일상적인 비용은 기본 원칙이 정해져 있어서 그 원칙 내에서 집행하고 사후에 상급자가 승인한다.


국내 기업들에서 결재의 목적은 허락이 아니라 비용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정해진 비용에 대해 사용하기 전에 다시 결재를 받고 사용 후에 정산을 하는 번거로운 절차는 ‘회사가 당신이 돈 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구성원의 양식과 조직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전 결재가 없어지면 불필요한 지출이나 부정이 늘어날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결재는 왜곡되어 본래의 목적과 달리 보고에 사용되기도 한다.


앞의 사례에서 구매팀 B팀장이 박 대표에게 올린 구매가격 변경은 결재 받을 사항이 아니라 보고 사항이다. 하지만 이메일로 보고하면 될 것을 굳이 결재로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재 문서에 비해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신경도 덜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재 형식을 통해 보고하는 이유는 보고했다는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메일은 상사가 수신했다고 해도 제대로 읽어 보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메일 대신 전자결재로 올려 상사가 결재를 하면 실제 상사가 읽었던 읽지 않았던 보고가 되었다는 증거가 남는다. 혹시라도 박 대표가 “그 가격 왜 맘대로 올려 줬어?” 하는 일이 생겨도 B팀장은 박 대표의 서명이 선명한 전자결재 문서를 가지고 있으니 안심이다.


이미 허락받은 것을 다시 허락받는 결재의 실상에서 조직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신뢰의 결여이다. 조직은 구성원을 믿지 않는다. 조직의 기본적인 운영 원리가 통제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불필요한 결재를 줄이려고 애를 쓸 뿐이다.


결재는 실제로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박 대표는 자신이 신입사원 때는 1박2일 지방 출장에도 숙박비, 교통비, 일당을 계산해서 사전에 결재를 받아야 출장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즘 그렇게 하는 회사는 많이 없어졌다. 사소한 비용을 사전 결재하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고 조직과 구성원 간에 신뢰가 쌓여 통제의 의미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신뢰가 결여된 모습은 결재가 보고의 수단으로 왜곡된 것에서 볼 수 있다. 구성원은 조직과 상사를 믿지 않는다. 언제 상사가 엉뚱한 얘기를 할지 모르니 보고서에 도장을 받아 놓으려고 한다. 과거에는 조직이 구성원을 신뢰하지 않아서 수많은 결재를 요구했는데 이제는 구성원도 조직을 신뢰하지 않는다.


호암 이병철은 사람을 믿으라고 했다. 그는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 (疑人勿用, 用人勿疑)는 말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관리자들은 ‘믿을 만해야 믿고 일을 맡기지.’ 하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신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내는 것이다.’ (‘Trust is not given, but earned.’) 라는 서양 격언을 들먹인다. 그렇지만 상사들이여, 부하들에게 상사로부터 신뢰를 얻을 기회를 준 적이 있는가?


일단 부하를 신뢰해 보자. 이것이 부하에게 신뢰를 얻을 기회를 주는 방법이다. 의심하는 마음을 거두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결재를 해 보자. 아니,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결재는 돌려보내라. 앞으로 그냥 구두로 보고하라고 하자. 부하들에게 신뢰를 쌓을 기회를 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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