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사인 A사가 지난 달 출고된 제품의 일부가 불량이라고 클레임을 제기했다. 회사는 불량 내용과 원인에 대한 조사를 거쳐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해 주기로 했다.
박 대표에게 클레임 보상에 대한 결재가 올라왔다. 보상 방법은 A사의 이달 구매 금액에서 3천5백만원을 할인해 주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A사에 공급했던 제품의 품종별 금액의 숫자를 눈짐작으로 더해 보았다. 합계 금액과 다른 거 같았다. 계산기로 다시 계산해 보니 3천2백만원이었다. 합계 금액을 틀리게 쓴 것인지 품종별 내역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박 대표는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류의 결재난을 살펴보았다. 생산, 품질, 영업, 경영관리 등 무려 7명이 넘는 관리자와 임원의 서명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의견란에 다음과 같이 적고는 결재 건을 담당자에게 되돌려 보냈다.
“틀린 숫자가 왜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고 제 눈에만 보였을까요? 무려 7명의 관리자와 임원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대표이사실 침투에 성공한 ‘틀린 숫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다시 잘 보세요.”
기업의 의사결정은 내용과 유형에 따라 최종 결정자가 정해진다. 자신이 최종 의사결정자가 아닌 기안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 관리자가 없지 않다. 윗분 또는 그 윗분의 윗분이 또 보실 테니 생각하고 긴장하지 않고 서류를 본다. 또한 참조부서나 합의부서 등 관련 부서가 많고 도장 찍을 사람이 많으니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잘 검토했겠지 하고 대충 보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작은 실수가 걸러지지 않고 통과해서 최종 의사결정자까지 가게 된다. 어느 회사에서나 서류의 오타나 숫자 오류를 가장 잘 집어내는 사람이 대표이사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대표도 실수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일까? 자신이 최종 의사결정자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서류를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류를 볼 때 온 힘을 모아 집중하고 눈에 힘이 들어가 불꽃이 튀고 숫자를 훑어만 봐도 합계가 척척 나온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주인의식’이라고 부르는 상사들이 있다. 상사는 부하직원이 주인의식이 부족해서 일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고 실수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고 한다. 부하는 ‘아니, 내가 주인도 아닌데 주인처럼 생각하라고 한다고 주인의식이 생기는가?’ 하고 불평한다. 사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마음에 더 어울리는 단어는 주인의식 보다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박 대표 회사의 대주주였던 회장님은 계열사 대표에게 거의 모든 의사결정을 위임하는 하는 분이었다. 의사결정 사안을 보고하면 자신의 의견만 간단히 얘기할 뿐이었다. 두고 생각해 보자고 미루거나 회장실에서 다시 검토를 해 보라고 한 적이 없었다. 투자안을 올리면 “이 사업에 대한 전문가는 박 대표니까 잘 하겠지.” 였고 임원 인사를 올리면 “나 보다 박 대표가 이 사람들을 더 잘 알잖아.” 였다. 처음에는 쉽게 결재가 났다고 좋아했다. 그게 아니었다. 성공해도 내 책임이고 실패해도 내 책임이었다. 엄청난 책임을 실감했다. 내가 모든 의사결정의 끝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년 후 지주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져 회사가 외국계 회사에 매각되었다. 새로운 회장을 모시고 일하게 되었고 외국인 부회장도 부임했다. 회장, 부회장과 박 대표가 공동대표이사를 맡았다. 상근하는 사내이사로 구성된 경영위원회가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한 사업부의 증설투자에 대해 회의를 했다. 갑론을박, 설왕설래, 이쪽 얘기를 들으면 이쪽 같았고 저쪽 얘기를 들으면 저쪽 같았다. 박 대표는 기분 좋게 한 마디 하면서 회의를 끝냈다. “이 건은 부회장님과 회장님께 보고 드립시다. 그리고 경영위원회에서 결정합시다.” 박 대표의 마음은 룰루랄라 호수를 노 저어갔다.
책임감은 참으로 취약한 마음의 상태이다. 약간의 틈만 있어도 조직과 일에 대한 책임감은 무너진다. 인간이 별 다른 노력 없이 유지할 수 있는 책임감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 이외에는 없다. 책임감은 마음의 부담이고 인간의 본성은 마음의 부담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계층의 리더는 책임감을 다지고 또 다져야 한다. 내가 마지막 의사결정자이거나 내가 혼자 결정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