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 같은 시간

by jungsin



얼리지 않으면 녹는 시간이 있다. 쓰지 않으면 한 점 안개처럼 증발되는 순간이 있다. 어머니랑 손을 붙잡고 산책을 했다. 너무나 좋았다. 참 좋았어요. 행복한 하루였어요. 이런 기분은 정말 너무 오랜만에 느낀다.


어머니가 먼저 산책로에 가 계셨다. 어머니를 찾아 한참 헤매다 마침내 찾았다. 냇가 옆 바위에 앉아 계셨다. 엄마가 나에게 손을 흔든다. 나는 차마 손을 흔들지 못하고 남자답게 묵묵히 엄마를 향해 걸었다. 표현하기 힘든 뭉클한 감정을 느끼며 앞을 보고 서둘러 걸었다. 어떻게 물을 건너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앞으로 걸었다. 어머니는 내가 못 본 줄 아시고 한번 더 손을 흔드신다. 저기로 돌아가서 다리로 건너서 와(엄마, 소리쳐서). 알았어 내가 알아서 거기로 갈게(나, 말없이 수신호).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다가 작은 돌들이 옆에 있는 냇가로 가서 청바지를 걷고 샌들을 손에 들었다. 차가운 냇물에 맨발을 담갔다. 첨벙첨벙 건너면서 바지 밑단이 젖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 바짓단을 야박하게 걷었더랬다. 내를 다 건너, 조약돌 위에 올라서서 다시 샌들을 신고 달렸다.


저기 어머니가 챙이 둘러진 동그란 모자를 쓰고 햇볕을 쏘이며 물가에 앉아 있었다. 한 숨에 엄마에게 당도했다.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일부러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인기척을 하지 않았다. 무심한 척 옆에 앉아서 챙겨간 간식을 꺼냈다. 기계로 발효시킨 요플레에 건블루베리와 크런치 초코볼을 넣어 마트에서 키위를 살 때 주는 노란 키위 수저를 꽂아 드렸다. 그리고 브라질너트, 잘게 썰어서 오븐에 살짝 구운 식빵, 아이스 케냐, 값싼 복숭아 젤리뽀.


둘이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저것 좀 봐라 양귀비 꽃이 얼마나 예쁘니(엄마), 저것 좀 봐라 너무 예쁘다 저 개-포메라니안-는 키우고 싶다(엄마), 와 이 장면 너무 좋다 물빛이 너무 예뻐(나), 나비 정말 오랜만에 본다(나), 바람이 갈대를 지나가면 갈대 소리가 정말 시원하다는 이야기(나).


햇볕이 어머니와 나의 우울한 마음들을 다 치료해주는 것 같았다. 저녁으로 메밀국수 먹을까, 뭐 먹고 들어갈까 의논하다가 어머니가 기분이 좋으셨는지 불고기를 묻혀 주겠다고 하신다.


집에 가는 길. 시장 모퉁이에 있는 작은 정육점에 들어가서 만원에 세근 하는 불고기용 돼지고기를 사고, 과일 가게에 들러 방울토마토, 바나나, 부사, 배를 샀다. 슈퍼에 들러 깐 마늘과 딸기잼도 사고, 옥상에서 아직 덜 큰 아기 상추와 작은 깻잎을 한 주먹 땄다. 고추장 불고기 맛이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상추-방울토마토-양파 믹스드 샐러드까지, 완벽한 피니쉬였다.


별 말이 없는데 행복한 순간이 있다. 별로 쓸 말도 없는데 충분히 눈부셨다고 느껴지는 순간. 누군가 정말 사랑하면 이렇게 담백한 언어로 글을 써도 그 순간이 조약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걸까. 그렇다면 함께 있을 때 조약돌 같은 시간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정답이구나. 엄마 미안해요. 엄마한테 배워서 다른데 응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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