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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영화마을'은 어디로 갔을까?

통찰력이 생기면 걱정은 희망으로 바뀌고, 희망은 두배가 된다.

by 권호원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 아는 일, 내가 오래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내가 오랫동안 열정과 목표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만이다. 세상에는 걱정이 많다. 어니 젤린스키가 말햇듯이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퍼센트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고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22퍼센트는 사소한 일에 대한 것,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나머지 4퍼센트만이 우리가 대처해야 할 진짜 고민이고 96퍼센트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이다. 웹스터 사전에도 ‘걱정’은 ‘부적절하거나 지나치게 고민하는 상태’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고 걱정은 걱정을 낳을 뿐이라고 넘기기엔 세상에는 걱정이 너무 많다. 하지만, 걱정의 숫자만큼 희망이 있는 것이고, 나와 다른 이의 삶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하는 통찰력이 생긴다면 걱정은 희망으로 바뀌고, 희망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걱정의 숫자만큼 희망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지금 나처럼, 뱃살이 많은 사람에게는 ‘뱃살이 나온게 아니라, 가슴이 들어간 것’이라는 걱정과 희망, 머리가 큰 체형은 ‘머리가 큰 것이 아니라 어깨가 좁은 것’ 즉, 위기는 기회인 셈이다. 걱정을 직시하고 희망으로 바꾼다면 희망은 두배가 된다. 궤변이 아니라 삶의 통찰력에서 나온 진리이고, 40대에 접어들며 부쩍 마른 팔다리에 볼록 나온 뱃살을 가진 ‘위기의 아저씨 몸매’에서 어깨운동을 통한 다이어트를 동시에 몸짱과 건강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회’로 맞이하고자 하는 경험에서 나온 희망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해할 수 있을 즈음, 꼭 읽어보길 바라는 책이다. 읽어보면 느낌이 있는 책들이다. 큰나무가 작은나무에게 그후 30년, 내 기억을 남기려는 이 무모한(?) 시도에 처음 영향을 바로 그 책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여자 주인공 ‘나’에게 영향을 받았다. 영원할 것 같던 기억이 왜곡되고, 누수가 생기고, 각종 발효와 부패 그래서 기억의 발효식품은 김치와 요거트가 돼 가는 과정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적어들었다. 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 내 창고 치즈는 다 옮겨졌고 열 한살 아이는 마흔이 되었다. 박완서 작가님의 싱아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섞으니 지금의 내 인생이네? ㅋㅋ

지금 이야기는, ‘그 많던 영화마을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을 얹으며 앞서 소개한 두권의 책이 생각났다. 그 많던 비디오 가게는 무엇으로 바뀌었을까? 김밥천국으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실제로 90년대에 비디오 가게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반드시 김밥천국은 아니고, 코사마트를 거쳐 편의점으로, 문방구를 거쳐 모닝글로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드시 ‘영화마을 -> 김밥천국’은 아니다.

88년에 우리 집에 생긴 비디오는 형수님이 2002년 형수님이 시집오면서 혼수로 가져온 ‘비디오 + CD’이전까지 우리집의 문화생활을 책임졌다. 주로, 설이나 삼일절, 부처님 오신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국군의 날, 개천절, 추석, 성탄절 등에 나오는 특선영화(방화, 외화)를 녹화(혹은 예약녹화)한 것을 되돌려보았다. 메리트 88이 가장 많이 재생한 영화는 ‘벤허’와 ‘십계’였다. 벤허와 십계 모두 대작이자 명작, 걸작임은 부정할 수 없다. 아직도 그 찰스 헤스턴 대머리 아저씨는 생생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두 영화 모두 1962년 경에 발표한 영화라는 점이다. 정말 어마어마하다. 종교적인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스케일과 내용 모두 아주 극적이고 정말 대작(great film)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좋은 것도 지나치면 모자람보다 못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200분 이상 되는 영화를 한번 보면 한나절은 그냥 간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배고파서 밥 먹고 나면 영화는 아직도 이어진다) 정말 테이프가 늘어진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여러번 봤다. 90년도 즈음부터 보기 시작한 벤허와 십계 덕분인지 좋은 영화는 모두 벤허와 십계 정도는 돼야 한다는 ‘영화적 눈높이’가 형성됐다. 다른 집들도 다 그런줄 알았다. 짐작대로 산업의 다양화와 영화산업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개봉영화는 ‘비디오’로 만들어졌고, (비디오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들도 많았다) 비디오 유통으로 거둬들이는 수입이 큰 영화들도 생겼다. 자연히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해주는 사업이 생겼고, 프랜차이즈 형태의 ‘영화마을’이 생겼다. 우리 동네는 영화마을 이전에 독특한 대여시스템이 있었다. 한달에 1만원을 내면 ‘비디오 테이프 10개 랜덤’을 빌려주는 시스템이다. 요즘 세탁물 방문 수거 및 배달 서비스인 셈이다. 주말 혹은 시간되실때마다 벤허와 십계를 즐겨 보시는 아버지는 당연히 월 1만원 대여 시스템에 가입하실줄 알았다. 하지만, 1년간 국경일때 제대로 된 영화만 녹화하면 10년은 볼 수 있으리라 믿는 아버지께는 월 1만원은 사치였다. (아버지의 절약은 미덕이다. 예나 지금이나 존경스럽고 따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모든 일에는 규제가 심하면 ‘풍선효과’가 따른다. 1만원에 10개가 아니라, 그 서비스를 가입한 집에 월 5000원을 지불하고 필요할때마다 빌려보는 방식을 아버지 몰래, 엄마와 형이서 실행했다. 돈은 엄마가 내고, 비디오는 내가 가져오고, 형은 그냥 열심히 봤던 것 같다. 가장이신 아버지에게 한달에 1만원의 지출로 비디오를 10개 빌려보는건 돈도 돈이지만 주5일제도 아닌 상황에 한달에 10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문제는 때로는 재밌는 영화가 많기도 하지만, 그 반대일때도 많았다. 또한, 영화는 ‘전체관람가, 12세 관람가, 15세 관람가, 연소자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의 구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홍콩영화 그 가운데 강시영화를 비롯한 ‘귀신’영화가 많았다. 심형래가 나오는 수준의 강시 영화는 전체관람가 즈음 되겠지만 나머지 영화들은 연소자 관람불가이거나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검색하면 구분할 수 있겠지만, 그 기억 그대로 남겨두고 싶다. 나는 아직 연소자와 청소년, 미성년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1만원 렌탈 서비스를 가입한 집은 월초에 비디오를 받는다. 나는 보름쯤 그 집으로 간다. 그러면 대여섯개를 준다. 기대를 안고 갖다가 실망을 안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점점 늘어났다. 연화누나(나랑 동갑이었지만 빠른 79년생이라 누나라 불렀다)와 여동생, 여동생, 막내 민국이(역시 여동생)까지 모두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린이 비디오는 우리가 빌릴수 없었다. 너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아버지도 월 5000원에 영화 5-6편을 보실수 있다는 데 큰 불편과 불만이 없으셨다. 형은 나랑 4살 차이니까, 연소자, 청소년, 미성년자 그 구분을 잘 피해서 잘 봤던것 같다. 재미없는 비디오 나르는 ‘비디오 셔틀’이 되느니, 차라리 ‘벤허나 십계’를 보자는 어긋장으로 나는 비디오에 관심을 버렸다. 형이 학교에서 늦게 오거나, 아버지가 영화를 다 보셨으면 엄마를 조르는게 더 편했다. ‘엄마, 내가 볼 것도 좀 빌려줘~’ 초절정 새벽형 인간이셨던 어머니는 저녁식사 이후엔 금방 주무셨다. 나도 그 영향으로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9시 뉴스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는 중학생 이전에는 볼 수 조차 없었다. 어린이는 일찍자고 일찍일어나야 한다는 전두환 각하의 멘트와 더불어, 엄마의 영향으로 9시가 되기 전에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는 새벽형 인간에게 메리트 88(우리집 비디오 모델명)은 그냥 그런 비디오였다. 어느덧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들에게 빌린 ‘NBA농구’를 많이 보았다. 친구 역시 녹화한 것이었다. NBA는 AFKN이나 스타TV같은 채널에서 한국시간 일요일 아침 (미국 시간 토요일 저녁)에 방송된다. 우리집에는 유선방송이 없어서 빌려 보는 방법밖엔 없었다.

우리 집에서 더이상 ‘비디오 셔틀’ 담당이 아닌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많지 않지만, 용돈이 생겼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용돈이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였으며, 티끌모아 태산이었다. 300원씩 5명이 모이면 1500원이고, 자주 가는 법상동 영화마을에는 최신영화가 1500원이었다. 각자 1000원이면 비디오 한편을 빌려 친구집에서 보고, 라면에 밥을 말아서 배터지게 먹고, 농구하고 집에 갈 수 있었다. 여름방학의 대부분은 그렇게 보냈다. 동네마다 영화마을의 장단점을 꿰찼고, 최신영화 보유 여부에 따라 모이는 친구집이 달랐다. 저평가된 영화와, 반대로 ‘쓰레기’인데 고평가된 영화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에는 ‘똥인지 된장인지’ 맛을 봐야 아는 상황이었다. 고2때 나온 ‘비트’는 여름방학 내내 3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여름방학이 되기전 상헌이네 집에서 마지막으로 비트를 보면서 두가지 이야기를 했다. ‘상헌아, 비트 테이프를 빌리지 않고 샀으면 더 쌌을텐데~, 그리고 비트 이전에 벤허와 십계가 제일 많이 본 영화였는데, 비트가 이겼다~ 나가자 농구하러~’ 마치 비트의 주인공, 정우성, 유오성, 임창정처럼 우린 또 라면에 밥 말아먹고, 경안중고등학교로 농구하러 갔었다.

그 많던 ‘영화마을’은 어디로 갔을까?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있던 ‘법상동 영화마을’은 잠시 만화방이었다가, 간식으로 제공하던 오뎅과 떡볶이의 비중이 점점늘어나더니 결국에는 김밥천국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분식집인것 같다. 내가 살던 용상동 영화마을은 ‘철물점’으로 바뀌더니, 코사마트를 거쳐 편의점이 되었다고 한다. 태화동영화마을도 편의점이 되었다.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회사에 투자하라’ 내가 가장 잘 알았던 일들의 구조를 몰랐다. 원가와 이익, 세금, 그리고 순수익, 인건비, 퇴직금 등에 너무 익숙해졌다. 비디오 하나 빌리면, 그 가게에서 얼마를 버는지는 궁금하지 않았고 그저 후회하지 않을 수준의 재밌는 영화를 건지면 그만이었다. 다시 그 시절이되면 했을 사업이 여러가지 있다. 내 적성도 살리고, 금전적으로 성공할 만한 일이다. (거듭 밝힌다. 내 주관적인 견해다)

첫번째는 당구장이다. PC방이 나오면서 많이 어려워졌다고 하지만, 버티면 성공한다. PC방도 오래했던 집들은 성공했다고 하는데, 초기 투자자금과 인건비와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 관점에서 나는 PC방보다는 당구장을 선호한다. 탁구장, 볼링장, 할수만 있다면 태권도장 등도 추천한다. 두번째는 안동찜닭집인데, 안동찜닭이 서울로 넘어오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찜닭집을 하셨던 분들은 모두 성공했다. 확실하다. 20년된 찜닭집치고 어려운 집은 없다. (나는 내가 먹을 음식만 하지, 남들에게 내 음식을 선보일 만큼은 안되므로 찜닭집은 과감히 pass). 셋째로, 서점과 문방구. 역시 위치와 컨셉에 따라 다르지만, 중간에 고비가 많았다. 인터넷으로 책이 유통되고, 원가가 공개되고, 불법 유통과 복제가 생기면서 책은 사라지나 싶었지만 다시 그 지위를 획득한것 같다. 재고 관리가 손쉽다. 위치에 따라서 학교 교재나 문제집 등을 판매하고, 인터넷이나 직거래 등을 통해서 고객관리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넷째로, 자전거 가게. 오토바이, 자동차를 거치면서 자전거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때 전국 단위의 자전거 길과, 친환경 이동수단, 운동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자전거는 다시 살아났다. 삼천리 자전거, 레스포 자전거, 코렉스 자전거 등을 운영하시던 분들 가운데 차가 아닌 자전거 타시면서 출퇴근 하는 분들은 한분도 없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뜻이다)

위메프, 쿠팡 등이 나왔을 때 변화를 직감했다. 8퍼센트 처럼 중금리 P2P대출이 나왔을 때 직감했다.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엔 잘 모르겠다. 26살에 첫번째 청약인 판교 신도시 청약에서 떨어진 일, 서울 반포동과 잠원동으로 이사하지 않았을 때, 목동으로 이사하지 않았을 때, 비슷한 느낌이다. 돈은 내 주변에 맴돌다가 기회가 사라진다. 투자를 매우 잘했던 친구들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소스를 받았고, 묻지도 말고 ‘아버지 말 듣고 투자해~’ 혹은 아버지가 투자해 놓은 것을 물려받은 경우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나한테는 강건너 불구경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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