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0
의사와의 면담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엄마가 설사를 자주 해 기저귀와 패드, 물티슈가 금방 바닥나 2-3일에 한 번씩은 병원에 들러야 했다. 대중교통 갈아타며 편도로 한 시간씩 이동해 병원에 도착하면 이미 어깨가 무거웠다. 의료 물품을 파는 곳에 가서 성인용 기저귀와 패드, 물티슈를 잔뜩 사면 두 손으론 들 수도 없었다. 판매원분에게 왔다 갔다 해도 되겠느냐 조심스레 물으니 번거롭겠다며 팔목에 봉투를 걸어 주셨다. 양 팔목, 두 손 가득 물품을 들고 뒤뚱거리며 복도를 걸어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중환자실 앞에 도착하면 보안 직원에게 누구의 보호자인지 알리고, 간호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간호사가 나오는 시간은 대중없었다. 좀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금방 나올 때도 있었다. 종합 병원에서와는 달리 면회는 완전 금지였다. 물품을 건네받으러 나온 간호사는 짧게나마 엄마 상태를 말해 주었다. 그다지 진척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런 생활을 얼마간 반복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에 부쳤다.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물품 든 봉투 딱 두 개만 나눠 들어 줬으면. 많은 걸 바라지 않았음에도 내 주위엔 아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 종일 집에서 티비만 보는 아빠는 엄마 상태를 물어보기만 할 뿐, 막상 같이 병원에 가자고 하면 어차피 면회도 안 되는데 거길 무엇 하러 가느냐 정색하기 바빴다. 원망과 증오가 싹텄다. 와중에 내 일을 아예 놓을 수도 없었다. 하루는 무거운 노트북 든 가방 메고 병원으로 향하면서 그래,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하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엄마만 괜찮아진다면 이까짓 거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또 힘이 났다. 나만이 나를 도왔다.
병원에 가지 않는 날엔 중환자실에서 저녁에 전화를 줬다.
“의식은 있으신데 여러 수치가 안정적이진 않으세요.”
열 번 중 여덟 번은 그랬다. 전화를 끊으면 울었다. 어떻게 잠들고 일어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순간순간 부엌 아래 찬장에 있는, 날이 아주 잘 드는 과도를 상기했다. 손목은 세로로 깊숙이, 그보다는 목이 더 확실하다는 메모를 머릿속에만 붙여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