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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기억하는 일

by 너구리

많은 장소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놔둔 채 새롭게 태어난다. 서울 성수동의 대림창고가 그 붐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강화도의 방적공장을 그대로 활용한 조양방적공장의 카페도 명소가 됐다. 부산의 옛 백제병원은 90년이 넘은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카페로 많은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전국은 물론 제주에서도 꽤나 흔한 일이 됐다. 감귤창고의 변신은 당연하다 싶을 정도다. 전분공장을 활용한 카페가 제주시는 물론 서귀포시에서도 꽤나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예전 같으면 깔끔하고 깨끗한 내부를 선호하던 취향이 전혀 다른 트렌드로 자리 잡은 셈이다.


마을사업이나 도시재생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다보니 마을의 자산발굴이나 아카이빙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하지만 만나는 분들 중 많은 경우는 수 십 년 전의 이야기들이고 크게 드러낼 이야기도 아닌데 이야기 해달라고 하니 신기한 듯 쳐다본다. 보채 듯 계속되는 이야기 요청에 처음에는 낯설어 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이야기가 잘 나온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 단계까지 가면 무언가 기록하는 것 이전에 스토리 자체가 주는 재미에 빠져 박장대소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의 어린시절이나 청년시절을 생각해도 비슷하다. 10대나 20대의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대화의 내용이나 수준이 그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나이 불문하고 그 시절로 자신들을 소환한다.


사람 이야기를 기록하는 문화가 많이 퍼지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생애를 통해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단초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거시적이거나 커다른 의미의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개인의 인생과 경험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공한 사람의 스토리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기준에서 사람들을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인가 스스로의 인생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들조차 자신들의 이야기가 왜 가치 있거나 재미있는지 낯설다.

개인사는 개인사일 뿐 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사가 모여 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 쌓이면 공식적인 역사 이상의 풍족한 시대사를 만들 수 있다. 특히 격동의 역사현장 이외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일들이 사라지거나 잊혀지는 일들을 막을 수 있다. 작은 장소에서 놀던 기억들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중요한 의미이자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개인의 생애사는 시대를 기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장소에 대한 기억과 그 기록은 시간이 쌓이면서 역사와 지역의 중요한 콘텐츠가 된다.


로컬의 전성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로컬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지역의 특수한 콘텐츠가 곧 경쟁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전분공장이나 방적공장 등이 카페로 변신하고 귤창고가 예술공간의 무대가 되는 시대. 단지 오랜 된 느낌이 좋다는 것 이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장소에 쌓이 기억들이 기록되고 이야기가 되면 더 좋은 콘텐츠가 될 것이다.


어린시절 돌이나 나무 밑둥에 친구들과 추억의 편지를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나이가 먹으면서 그 같은 행위조차 머릿속에서 아득해졌지만 장소에 대한 기억은 결국 타임캡슐 즉, 오래된 미래인 셈이다. 과거의 기억들이 미래의 가치를 부여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인가. 내 주변의 사소한 장소에 대한 기억들을 꼼꼼히 기록하는 일은 매우 소중하면서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게 후일 그 장소의 핵심적인 콘텐츠가 될테니 말이다.


<이 재 근/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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