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지 4개월이 지났다. 90을 바로 앞둔 아버지가 홀로 생활을 시작한 시간이다. 어쩔 수 없이 예전보다 전화를 자주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중요한 인간인지라 전화시간을 내는게 영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전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내 의지보다 자주 전화벨이 울린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족히 울리는 전화벨의 발신처는 물론 아버지로부터다. 멀리 스웨덴에 있는 누나도 주2회정도는 지속적으로 전화를 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으로부터 전화만 자주오면 좋을 일인데 상황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그대로 좋다. 나 역시 안부를 전하는 일들이 쉽지 않으니 말이다. 늘 조마조마하는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일 것이다.
금요일 저녁 별 일이 없기에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와 금식의 고통을 빨리 잊고자 이불을 깔고 뒤척이는데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제나 전화의 요지는 내 건강이 어떠냐는 것이다. 아들의 건강을 물어보는게 아버지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인 것이기에 늘 씩씩하게 대답한다. 아무 걱정없이 건강히 잘 지내고 있노라고. 하는 일에 대한 질문 역시 비슷하다. 요즘들어 이전보다 더 바빠지고 있다고. 사실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나이의 지인들의 일이 줄어 점점 백수로 지내는 경우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계속 바쁜 일거리를 찾아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그러기에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너무나 바빠서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안부전화의 핵심은 나 역시 아버지의 건강을 묻는 것이 전부다.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의 건강을 묻는 일이야 당연한 과정일테지만 부자가 동시에 같은 암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는 서로간에 웃지못할 동병상련의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버지의 암은 아주 초기에 발견된 상황인지라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암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아버지는 늘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이상증세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
"난 아무래도 오진이 아닌가 싶어.아무런 증상이 없이 괜찮아."
"아버지, 원래 이 암이 그래요. 아무런 증상이 없는게 특징이에요. 저도 3기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었어요."
나의 상황설명에 다소 안심이 되는 듯 안도감을 표현한다.
갑자기 어제가 돌아가신 어머니 생일이라고 말을 하신다. 산소에 가고 싶어도 차가 없으니 갈 수가 없단다. 순간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기는 일이 없었기에 낯설기 그지없다.
"돌아가신 분의 기일을 기억하면 되지 어떻게 생일까지 기억하고 챙겨요."
나름 차가운 답변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서늘하다. 아버지로서는 어떻게든 주변사람과 가족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중임이 확연히 느껴진다.
끊어질만한 전화통화는 그 이후로도 30여분간 계속됐다. 잊혀졌던 가족얘기를 비롯해 몸의 안좋은 이야기를 꺼내 동의를 얻는 과정을 여러차례 반복하신다. 틀니가 맞지 않아 제대로 씹지 못하는 이야기, 고기류를 먹으면 여지없이 소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밤새 잠이 안와 잠을 못이룬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병원에 가서 수면제가 겁나서 못먹겠다는 말로 이어진다. 수면제 말고 초기에 먹는 안정제가 있으니 그걸 먹으면 우려하는 중독의 상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까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자꾸 이어진다. 그래서인가 하던 이야기는 다시 반복을 계속하지만 퉁명스럽게 통화를 마치기에는 쉽지 않다. 건강을 위해 매일같이 산책을 하신다는 이야기에 잘하고 있다며 독려를 끝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물론 앞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하루종일 속속들이 생활을 공유하거나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져버렸으니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다행히 독거노인으로 인정이 돼 매주 한번씩 사회복지사가 방문한다고 하니 듣던중 가장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어렵게 실사까지 마치고 인정을 받았으니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다 싶다.
실사 도중에 주민센터의 담당자에게 비상시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아들 번호를 알려줬지만 왠만하면 전화를 걸지 말라는 부탁까지 하셨단다. 귀찮은 일을 만들어 아들을 번거롭지 않게 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마음이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이 밟히는 것은 어쩔수 없다지만 우리네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라는 것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오랫만에 오랫동안 통화를 하면서 삶의 후반부에 어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최소한 아버지가 거동이 힘들어 질때가 되면 내가 사는 제주의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다른 곳도 다니기 힘드실텐데 자식이라고 가까이 있어 방문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아버지의 의중이 중요할 것이고 주변에 함께 생활을 공유하는 지인들이 더 중요하다면 충분히 존중해야 겠지만 도시의 삶은 그다지 함께 한다는 일과 잘 어울리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아파트가 감옥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건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