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단축키를 찾아서
사람 사는 방식이 그렇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수도 없이 말과 글로 표현하지만 정작 생활이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생활의 습관이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습관은 단축키에 가깝다. 뇌가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반적인 루틴을 극도로 단순화시켜놓은 단축키다. 정해진 시간과 상황이 되면 인지 즉시 행동을 하도록 해놓은 것이다. 굳이 그 상황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나름 긴 과장과 판단의 수고로움을 축약해서 단순화시켜준 결과물이다. 그래서 자동으로 행동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생활의 습관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반복이 필요하다. 그 반복의 메커니즘에 자신을 매일 던져놓고 같은 행동을 하도록 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작심삼일이 그렇고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 혹은 매일 책을 읽거나 공부는 얼마만큼 하겠다는 결심이 오래가지 못하고 무던히도 짧은 시간에 사라져 버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행동이 뇌에서 판단 없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도록 각인시켜 놓지 않은 때문이다. 단축키 형성에 실패한 셈이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전체적인 영역에서도 영 쉽지 않은 경우가 내게는 웰빙과 생존의 건너뛰기에 해당된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듯했지만 별거 아닌 사업의 실패로 나는 부득이 오늘날까지 웰빙의 삶에 대해 간절히 스스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언젠가는 좀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오로지 생존에만 매달려왔다.
자신의 행동이 뇌에서 판단 없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도록 각인시켜 놓지 않은 때문이다. 단축키 형성에 실패한 셈이다.
옛 어른들이 그랬던가.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왔던 이야기 아니던가. 생존할만한 순간이 됐고 이제 다른 단계로 뛰어넘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웰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때쯤 그동안 등한시했던 일들이 발생한다. 가족이 해체되거나 친구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있거나 그 정도는 아니어도 가족관계가 무너져 있거나 하는 예상치 못했던 일부터 치명적으로 자신이 지닌 신체적 능력의 한계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몸이 망가진 신호를 낸다. 작게는 몸살이 걸리거나 예상치도 않은 골절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고 치명적 이게도 당뇨나 고혈압 등 건강상의 이상에서 암이나 불치병 같은 치명적인 공격에 신체가 무너져 있음을 알아차린다.
더 이상 내 삶에서 웰빙은 없다. 생존이 끝이다. 웰빙으로 넘어야 할 단계에 왔는데 웰빙스러운 삶이 없다. 대신 웰빙을 빙자한 금욕적인 삶이나 청정한 삶만이 기다린다. 이것이 웰빙시대에 맞는 삶이라는 지적과 규정이 있지만 그동안의 삶이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다. 좀 더 방탕하고 자유분방한 삶이 그동안 생각하고 꿈꿔왔던 삶의 가치에 맞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엄격한 스토아학파적인 삶이 웰빙으로 규정되는 시간에 놓였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과정인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만 그 하루의 대부분은 내일을 위해 소진하는 전초전이나 애프 타이저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 전초전을 뛰느라 선수는 이미 파김치가 됐거나 그로키 상태에서 상대편이 나를 때리지도 않았는데도 자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생존에서 웰빙으로 넘어가는 단계는 건너기 힘든 강을 인생의 여정 앞에 펼쳐 놓았다. 그 강이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운전하는 스틱스나 레테의 강은 아닐 것이겠지만 자칫하면 요단강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나이 50 중반이 넘어서니 그 기로에 섰다. 몸이 극도로 피곤하고 삶이 무료한 상황에서 어렵게 어렵게 헤쳐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로에 섰다. 웰빙의 시대로 삶의 후반을 지켜가고자 하는데 고난이 닥쳤다.
좀 더 방탕하고 자유분방한 삶이 그동안 생각하고 꿈꿔왔던 삶의 가치에 맞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엄격한 스토아학파적인 삶이 웰빙으로 규정되는 시간에 놓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서 이상반응이 나타났다.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있을 줄 알았고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던 단어가 내 삶 속에 훅하고 들어왔다. 이게 도대체 뭐지? 내 삶은 여기서 이렇게 재조정되어야 하나? 내 삶의 끝마무리를 벌써 지어야 한다고...
무엇하나 준비되고 있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인생을 철저히 다시 되돌아봐야 하고 새로운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누가 아무리 이야기해주어도 알 수 없고 어떤 책에서 강조하더라도 결코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중압감이 온몸을 누른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이것을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인가? 무엇하나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바쁘게 시작된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가 지났다는 사실. 그렇다고 자동으로 웰빙의 시대로 넘어가지 않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많은 고민 속에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눈을 깜빡이면 지니가 새 세상을 보여주듯 현실은 전현 녹록하지 않다. 이크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고민이다.
냉정과 열정사이에는 미지근함만이 있을까. 아님 온화함이 먼저 있을까. 차분하리라던 연말의 분위기를 망쳐버리듯 끝나지 않은 일들로 온통 소용돌이를 쳐대던 세모를 보내고 나서도 마음의 흥분은 도통 가라앉지가 않는다. 어디서부터 인가를 냉정히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어려운 난제를 만나면 차분히 앉아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되짚어보면 무언가 분기점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의 아수라장을 야기하는 원인과 이유를 차분히 풀어보고자 한다. 잘 안된다. 아직 소용돌이가 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인을 내부에서 찾을지 외부에서 찾을지를 결정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에 몸에서는 무리한 신호만 나온다.
인생이 죄다 그렇듯 몸이 안 좋은 시절이 되어서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내게 어쩌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어이없는 상황을 깨닫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련만 여전히 사고방식과 행동에는 변함이 없음을 알게 됐다. 왜 그대로일까. 어떤 경우를 되짚어봐도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끝나고 있는 현실이 더 이상 전환의 꼭짓점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계속해서 머뭇거린다. 내게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으리라는 전제 속에서 행동하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수술을 하고 난지 6개월이 지났다. 각심을 불러일으켰던 잠깐의 시간을 지나고 보니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 있다. 새로운 웰빙시대의 단축키는 여전히 형성되어 있지 않다. 습관이 바뀌지 않았다. 돌아보면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자발적 야근을 당연시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 머리는 일로 가득 차 있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깨는 날들이 계속되더니 수술 전의 시기와 증상이 비슷해졌다.
어쩌면 단축키가 만들어 지기 좋은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몸의 이상반응에 조금씩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몸속의 장기를 드러내고 배에 수술 자국을 남긴 것 말고 나에게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닐진대 하루하루 조금씩 살만하다 싶으니 요요현상이 일어난다. 참 어리석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무게를 자신의 건강만을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충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이해는 하지만 아직 몸은 그에 반도 못 미치는 현실이다.
어느덧 새해가 후딱 밝아온다. 2002년의 흥분을 뒤로하고 이제는 2020년이다. 숫자의 순서만 하나 바꾸었을 뿐이다. 세상이 너무나 달라져있다. 그 사이에 나 역시 무너져 내렸고 내가 생각하는 웰빙은 저 멀리서 바이 바이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그래도 생존을 위해 살던 시대를 벗어나 보고자 발버둥 친다. 어쩌면 단축키가 만들어 지기 좋은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몸의 이상반응에 조금씩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두려움이 때로는 새로운 길을 만들 일도 있을 것 같은 순간이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 오리라 믿고 단축키를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