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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기와 아날로그 시대

by 너구리

꽤나 오래전이다. 당시 회사 초년병이던 시절 회사 부장 한 분은 거의 매일 은행에 다녀오곤 했다. 회사 1층에 ATM기기가 있음에도. 다른 사정이 있는 줄 알았지만 후일 다른 선배에게 들은 이유는 ATM기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가는 것이었다. 문명의 이기를 전혀 이해 못하는 시대착오라고 생각하곤 했다.


몇 일전이다.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이 단체 이름으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통장을 개설하러 은행에 갔다. 행원이 사인하라고 형광펜으로 표시해주는 곳에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면 된다. 행원의 안내에 따라 서명을 하고 비밀번호를 결정하고 통장 개설이 끝났다. 인터넷뱅킹을 위한 온라인 등록을 할 차례다. 6자리의 번호 생성기를 받고 기업아이디를 적어넣고 계좌이체 할 때마다 안전을 위한 계좌이체번호 등록. 다시 체크카드를 만들기 위해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집에 가서 공동인증서를 발급받고 거래를 진행하면 된다.


사실 시키는 대로 따라하기만 했는데 거의 40분이상이 걸렸다. 무엇보다 그 많은 비밀번호와 아이디 등 여러 가지가 많다보니 기억할 재주는 없고 바로 핸드폰에 메모를 해둔다.


옆 창구를 둘러본다. 나와 거의 같이 창구에 들어선 초로의 여인은 아직 고군분투 중이다. 누구에게 돈을 붙여주고 누구 이름으로 입금해주고 등등을 요구했지만 타인의 이름이다 보니 쉽게 할 수 없는 내용인 듯 싶다. 결국 핸드폰에 앱을 깔아서 사용하기로 합의한 행원과 고객은 비밀번호 설정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행원이 영문, 숫자, 특수문자를 합해 10자리 이상을 비밀번호로 만들어야 한다는 순간 그 아주머니는 멘붕의 상태에 도달한 느낌으로 답이 없다. 서너 번 이상 이야기를 반복하며 행원의 목소리 톤도 높아가고 아주머니는 그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한참이 지난 후 아주머니의 멘붕 이유가 밝혀졌다. 어떻게 평소 쓰지도 않는 영문 숫자 특수문자를 합해서 각 10자씩 30자의 비밀번호를 만들고 이를 외울 수 있느냐는 것이 하나였고 특수문자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걸 10자나 만들라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밀번호를 30자이상 만들라는 것으로 이해한 오해가 풀리고 특수문자라는게 물음표, 느낌표 등을 말한다다는 것을 이해시키며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30자의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음 사람을 위해 창구를 빠르게 나오면서 옛적 부장님이 생각났다.

나도 그렇지만 그 여자 분에게 문명의 이기는 어떤 소용이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이라고 설명은 하지만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4자리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6자리,8자리,10자리로 계속 늘고 숫자에서 영문 대문자 소문자, 특수문자 등으로 점점 복잡해지는게 문명의 발전방향인 셈이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생활 곳곳에서 모든 일들이 빠르게 랜선으로 진행중이다. 현재도 활발한 은행, 증권 같은 분야는 물론 회의와 예술 등 예기치 않은 분야까지 그 영향의 파급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생활의 편리함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진행될 사회의 변화는 문명의 이기 대신에 고립과 절망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건을 사거나 돈을 부치는 일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문명이란 무엇일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서 우울감이 앞선다. 여전히 아날로그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배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 재 근/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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