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중이다. 추석을 막 보내고 하루를 보냈다. 낯선 시간의 연속이다. 하루 종일 집안을 정리하고 방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고 기타 등등. 어색한 추석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 시대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맞이한 명절은 이상하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과 가족을 찾아 명절을 맞이하는 대신 집안에 꼼짝 말라는 정부의 촉구를 들었고 그중 꽤나 많은 인간들은 제주도로 여행을 왔다. 30만 명이 온다 하니 과히 한여름 성수기에도 가져보지 못한 숫자이다. 그 와중에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염없이 시간을 떠나보내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가 한창인 올해 추석 시즌에 부모님과 처가댁을 다니는 습관 아닌 풍습을 수행 해온 지 20년이 지났다. 어느덧 당연하다 싶은 관행이 시간이 지나니 깨지기 시작한다. 먼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장인어른도 갔다. 장모님은 요양원에 계시고 아버지 홀로 굳건히 사시는 곳을 지키고 있다. 올해 88세이시니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덧 당연하다 싶은 관행이 시간이 지나니 깨지기 시작한다
추석 시즌이 시작되기 2주 전 육지를 다녀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올해는 코로나 핑계로 추석에 집에 올라가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생각을 정한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작정 방문을 안 할 수는 없다. 올해의 계획은 기존과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 제주에 내려온지 6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 산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더불어 장인어른의 유언에 맞도록 뿌려진 관악산을 다녀올 요량이다. 평촌에서 오르는 관악산 중턱의 전망대까지도 오르기로 했다. 거기에 인천 아버지 댁을 다녀와야 한다. 다행히 장모님이 계신 요양원은 노인들이 계신 곳이기에 면회가 전면 금지됐다. 명절이면 대부분의 가정이 겪는 이동의 모양새가 나라고 특별히 다를 일이 없다. 다만 TV나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온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의무와 책임이 남아있을 뿐이다.
어찌됐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기회다. 2박 3일간의 일정을 두고 예전에 반복했던 인천과 평촌 그리고 관악산을 첫날, 멀리 예산의 공원묘지에 묻혀계시는 어미니 산소를 두 번째 날로 잡고 시간을 안배한다. 서울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이틀간 주초까지 제출해야 할 공모 제안서를 수정하며 호텔방에 홀로앉아 시간을 보낸다. 아내는 서울 지인들과의 약속에 아들은 친구들과의 모임에 바쁘다. 호텔방에서 밤늦게 바라다보는 서울의 풍경은 나름 이채롭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코로나로 인해 어느덧 시름시름 앓는 도시의 기분이랄까. 나 역시 몸이 버겁다. 암튼 2박 3일의 추석을 앞당겨 보내고 집에 오니 예년과 같은 추석을 보낸 느낌이다. 아직 2주나 추석이 남았는데.
그래서 인가 추석명절 시작 전까지 추석 연휴의 느낌조차 잃어버렸다. 전날까지 회의에 미팅을 계속하다 보니 내일부터 추석이란다. 꼭 해야 할 한두 군데 선물을 전달하고는 모든 것이 끝난 느낌이다. SNS에 계속해서 올라오는 추석 덕담과 메시지가 번거롭기만 하다. '난 이미 추석을 다 보내고 왔는데 무슨 덕담은'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참으로 자의적인 시간 보내기다.
연휴 전날 오후부터 연락이 멈췄다. 덕담 메시지를 빼고는 업무 관련 연락이 없다. 이메일도 멈췄다. 평소에 습관처럼 들어가는 북마크해놓은 홈페이지에도 더 이상 업데이트된 내용이 없다. 뉴스도 추석 뉴스 외에 새로울게 없어져버렸다. 고스란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다가온다.
그래서인가 휴식의 편안함이나 나른함 대신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잠이 오지 않는다. 그동안 밀렸던 숙제를 하듯 공모사업 서류를 온라인으로 제출하고 자잘한 기획서를 마감한다. 앞으로 내가 가지고 가야 할 작은 조직, 향후 만들어야 할 회사와 단체의 역할에 대해 R&R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젠장 맘을 비운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소속기관이 이렇게나 많아야 하다니. 그럼에도 새롭게 회사나 단체를 만들 욕심이 계속 생긴다. 돈도 안 되는 이 같은 일을 계속하는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이쯤 되면 일중독이 분명하다.
다만 TV나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온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의무와 책임이 남아있을 뿐이다
추석 명절 전이니 아내와 함께 장 보러 마트에 간다. 중간에 새롭게 생긴 마트가 눈에 띄어 가보니 그다지 살만한 물건이 별로 없다. 예전 같으면 과일을 우선적으로 사고 고기와 기타 명절 기간 중 먹어야 할 무언가를 찾아 헤맬 텐데 다 부질없다. 일단 의사의 명령으로 과일을 멀리하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큰 짐을 덜었다. 과일을 구매 목록에서 제외했다. 사과 배가 이다지 비싼 가격일 이유를 모르겠지만 안 사게 되니 다행이다. 사과와 배를 만지작 거리다 다시 내려놓는다. 명절에 당연시했던 고기들도 눈에 뜨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앞으로 5일간 집에서 해 먹을 준비를 위해 필요한 야채와 약간의 육류와 해산물 그리고 당일 저녁에 먹을 회를 고른다. 오늘은 참지회다. 내일은 오징어찌개가 어떠냐는 아내의 말에 무조건 수긍. 그나마 내가 몇 개라도 먹던 떡은 당뇨로 인해 이미 음식리스트에서 사라진 지 오래. 아내와 아들은 떡을 쳐다보지도 않으니 떡, 아니 송편은 아무런 유혹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뭔 명절이 이렇게 허무할까.
세끼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식구들의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오전 시간은 먹는 시간에서 제외했다. 점심 겸 아침이 12시로 고정된 느낌. 점심과 저녁 두 끼를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추석 명절 당일 느지막이 일어나 무얼 할지 고민 중이다.
"이번 명절은 집안 정리 기간"
아내의 선언으로 모든 일거리가 정리됐다. 이불을 걷어 24시간 세탁소에 가서 세탁을 시작한다. 건조까지 한 시간 30분이나 걸린다. 그 사이에 집으로 와서 밥 먹고 옷가지 정리. 이불을 찾아오고 여름옷을 박스에 넣어 가을 옷과 교체한다. 내 옷도 그렇지만 집사람 옷이 한참 걸린다. 다음은 집안 정리. 버릴 수 있는 쓰레기를 꺼내는데 내 방이 문제다. 온갖 자료집과 문서와 책으로 가득하다. 사무실을 그만둘 때 4년간 모아 온 자료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왔으니 오죽 많은 자료와 책들이 뒤죽박죽이랴. 어찌할 수가 없다. 새롭게 사무실이 세팅되기를 기다리며 잠시만 잠시만 하며 보낸 시간 동안 코딱지만 한 방의 반이상이 책과 자료로 파묻혀있다. 그 옆에 새롭게 그림을 시작한 아내의 그림 도구들. 취미생활에 필요한 악기와 배낭. 그리고 무엇보다 늘 정리 불가능에 가까운 내 모자들이 온 방안을 정신 사납게 한다. 모자를 세어보니 중절모를 제외하고 12개다. 겨울용을 서랍 안에 넣어두었으니 합하면 20개는 족히 된다. 모자를 차곡차곡 담아두기가 어렵다. 늘 당일의 상황에 따라 쓰고 나가야 하는 모자가 다르니. 남들이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암튼 고육지책으로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자료집 한 박스를 눈물겨워하며 폐지로 내보낸다. 그나마 약간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다음은 악기 청소. 대단한 연주가도 아니고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트럼펫의 겉모습이 탁한 은색으로 변하고 밸브 안에도 녹색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걸 무시하고 불어댄 지 꽤나 오래됐다. 아들에게 청소방법을 묻고는 샤워기로 내부를 청소하고 다시 마른 걸래로 닦고 오일과 광택 약으로 악기 청소에 시간을 들인다.
책상 위의 불필요한 복사지와 전단지들을 한 무더기 모아 폐지로 보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책상 위의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모아둘 플라스틱 박스를 골라 그 안에 옮겨 담았다. 그럼에도 책상 위는 늘 어지럽다. 업무를 위한 기본적인 필기도구와 파일은 물론 매일같이 제시간에 먹어야 하는 약 4종류가 눈앞에 있어야 한다. 당뇨를 체크하기 위한 도구 4가지도 언제든지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중년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의료용 도구와 약들을 등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숨 가쁜 하루를 보내고 책상에 앉아보니 10% 정도는 정리가 된 느낌이다. 이게 다 언제 헝클어지고 흐트러질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정리를 했다는 안도감에 휩싸인다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생각하고 방을 다시 둘러보는데 여전히 어지러운 것들이 있다. 쓸데없는 가방과 무엇보다 여름 선풍기가 아직 각 방과 거실에 놓여있다. 아내는 건조기 옆으로 정리용 수납함을 옮기자 하고 여름내 사용했던 작은 이불과 빨아놓고 어디에도 두지 못한 이불을 이불 보관 비닐에 압축해서 담아놓자고 한다. 이불을 정리하고 나니 안방의 침대 옆에 수북이 쌓였던 이불이 치워졌다. 그리고는 선풍기 정리. 선풍기가 각 방에 한 대씩 그리고 거실의 서큘레이터까지 합치니 4대가 된다. 각각을 재활용 봉투에 담아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묶고는 코딱지만한 창고 문을 열었다. 여기가 또 복마전이다. 어찌 정돈을 해야 할런가. 압축한 이불과 선풍기 4대. 그리고 사방에 널브러진 여행용 캐리어 3개. 안마용 매트 또 아내의 그리다만 그림까지. 공간의 미학을 운운하며 공간 재정리에 들어간다. 어찌어찌 다 집어넣었다. 그 사이 구석에 자리 잡은 낚싯대가 눈에 들어온다. 낚시를 배우고 싶다. 낚시를 가본 지 얼마나 오래던가. 지난주에 갈치낚시를 가고 싶었으나 선약으로 인해 포기했는데 다행히 일본을 향해오는 태풍으로 출항을 하지 않았다 하니 기쁜 마음으로 10월로 연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다시 한번 갈 날이 올 것 같다.
숨 가쁜 하루를 보내고 책상에 앉아보니 10% 정도는 정리가 된 느낌이다. 이게 다 언제 헝클어지고 흐트러질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정리를 했다는 안도감에 휩싸인다. 다시 정신이 맑아진다. 아마도 아무 생각 없이 집안 청소에 몰두한 이유일 게다. 평소에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어젯밤에 이어 서류로 정리하고 3장짜리 기획서를 프린트한다. 내일은 이걸로 관계자들과 차담회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까지 새로운 기획을 구현하고픈 나 자신을 보면서 서울에서 30여 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내려왔는데 어느덧 대상만 다르지 내가 일하는 행태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게 아닐까. 아니면 바뀌기 싫던가.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하면 좋겠지만 당뇨로 인한 제약은 나름 인내심을 이끌어낸다. 그렇담 밤늦은 야간 산책이다. 저녁시간의 술 한잔을 멀리하고 야간 산책을 택한다. 근처 공원을 넓게 두바퀴 돌아보니 1시간의 시간이 지났다. 걷는 중 한밤중이라고 보도 위에 작은 뱀이 떡하니 누워있는 걸 보니 괜히 섬뜩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그 뱀을 지난 후부터는 보도 위에 떨어진 지푸라기와 나뭇가지가 모두 뱀으로 보인다. 두 번째 바뀌를 걸을 때는 그 지점을 돌아간다. 뒤돌아보니 뱀으로 보였던 녀석이 나뭇가지였다. 아까의 뱀은 제갈길을 간 모양이다. 여전히 뱀은 적응하기 힘든 동물이다.
서울에서 30여 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내려왔는데 어느덧 대상만 다르지 내가 일하는 행태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게 아닐까. 아니면 바뀌기 싫던가.
모든 것을 마치고 자리에 누우며 생각이 많다. 추석을 낯설게 보내는 방법에 대해 그동안 수도 없이 꿈꾸고 노력도 해봤다. 몇 년 전부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기 위해 전주나 추석 전날 육지를 돌아보며 인사를 하려 애를 썼다. 그리고는 당일에는 집에 내려와 쉬는 것이 최선의 노력이었다. 이제 추석 연휴를 온전히 보내며 내가 얼마나 준비되어있지 않은지 알게 된다. 단지 이전의 틀에 박힌 연례행사가 맘에 안 들어 그를 피할 방안만 모색했을 뿐이다. 남은 시간은 어찌 보낼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제대로 쉬던가. 일을 하던가. 아니면 잠만 자던가. 그 무엇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보낸다. 코로나로 닥친 이상한 추석 명절을 정말로 낯설게 보내고 있다.
이게 최선인가. 글쎄 잘은 모르지만 앞으로 이 같은 인생이 계속될 느낌이다. 기존의 틀로는 전혀 적응이 힘들 테니 나 역시 예전의 알지 못한 시간에 의해 길들여진 습관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시대에는 여전히 버겁고 힘든 시간들을 맞이할 것 같다. 세상이 바뀌는 것도 매크로 하게 힘든 일이지만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무엇을 어찌하며 살아야 하는지 힘겨운 시간들이 남아있음은 분명한 듯싶다. 포기할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의지는 여전히 남아있으니 그렇게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는 게다. 누구도 앞길을 예측하고 알려주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