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쓸모를 아무리 역설해도 훨씬 더 쓸모없음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이미 세상의 모든 관심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에 대해 집중되어 있고 어찌하면 이들을 달래 사회의 전면에 안착시킬 것인가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지금 절실한 상태에 와있다. 이대로라면 그동안 중년과 그 이전의 세대가 세대가 갈등과 대물림 등을 통해 나름 반석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자부하는 국가와 사회를 말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있는 것이다. 그만큼 청년들이 우리 사회의 전면에서 중년을 이어받을 바통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의미를 반증한다. 그렇기에 그 초조함의 발로로 세상의 모든 사업은 다 청년사업이 되어가고 있다. 청년이라는 이름 하나로도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중이다.
그런데 청년들은 영 반응이 시원찮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기성세대의 애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스스로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니 기존 형태의 사회적 관행에 대해서는 결코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단 하나 본인들도 기성세대가 그토록 강조하며 경쟁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해 사회의 줄 서기를 만들어놓은 만큼 자신들과 다른 사회적 특혜를 받았다고 인정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분노하고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의 아들이 휴가를 몇 시간 늦게 들어왔다거나 며칠을 구두로 더 썼다고 해도 기성세대의 입장이라면 그래서 그 일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데라고 물었을 테지만 젊은이들은 가진 자의 특혜라는 입장에서 굉장히 분노하고 있었다.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고 분노하는 시점이 다르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놓고 키워놓은 세대인데 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우리가 자라던 그리고 사회에 적응하던 시기와는 사뭇 다른 관점을 너무나도 많이 노출하고 있으니 어렵고 힘들 뿐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면 사업도 하고 지원도 해준다고 하고 모든 면에서 다른 나이 때의 세대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특혜라고 해도 무방할 제안을 던지고 있지만 청년세대들은 꼼짝하지 않고 있다. 모든 이유는 계속해서 곁다리를 긁고 있으며 진정 그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든 기존의 틀 안으로 미끼를 주고 끌어들여 그들이 기존의 성장 위주의 사회를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회적 충원 시스템을 가동하려는 것이다. 근데 말을 듣지 않는다. 답답할 노릇이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해왔는지 확인해보려고 이런저런 주제를 가지고 나 자신을 재단해보기도 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새로운 모습으로 깎아보려고 했다. 그러면 중년이라는 우리 사회의 한때 키맨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나도 그에 편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중년 세대들이 우리 사회에, 우리 가정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쓸모 있는 인간인지에 대해 단 하나도 명확히 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오히려 중년이 진짜 쓸데기 없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만 더욱 팽배해진 느낌이다.
중년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인간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배척의 기류를 타고 한물간 세대로 빠르게 썰물처럼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할 처지에 와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어느 시대의 어떤 세대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앞으로도 꽤나 많은 권력과 경제력과 사회적 주도권을 행사하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일부의 인물에 국한될 뿐이고 중년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은 서서히 잊힐 것이다. 아마도 과거 교과서에 역사적 사실로만 기록된 젊은 시절의 충만한 열기를 혼자만 혹은 또래들끼리만 술안주나 담화의 주제로 소화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쓸모없기 그지없는 중년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좀 더 강조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됐다는 점에서, 그 쓸데기 없음이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표준이 될 것이라는 점에 한치의 의심을 품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중년은 더 이상 중년이 아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중년을 청년 이상의 어린아이로 만들어 놓았고 그들에게 많을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새로운 방안을 찾으라고 요구 중이다. 이전 세대들은 60이 넘어가면 삶을 정리하거나 관조하는 차원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이 예사였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일을 한다는 것은 생활이 매우 어려운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생계유지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고 안쓰럽고 안된 일로 치부됐다. 그리하여 삶을 즐기고 여유롭게 말년을 맞이하겠다는 사람들 중 덜컥 8,90 이상이 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사회에서 퇴임을 하고 30여 년간 이상을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어리석음을 토로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목격하고 있다. 그만큼 의학의 발전은 우리의 준비와는 다르게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나의 장인 또한 58세에 정년퇴직을 한 후 아무런 준비 없이 집과 저축으로 생을 일관하시다가 불과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장인에 대해 기억하는 장면은 비교적 나이가 덜 먹어 힘이 남아있을 적에는 집 뒤편의 관악산이라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낙이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걸음이 힘들어진 이후로는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뉴스 채널을 반복해서 듣는 것 이상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의 장인과 같은 양반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고지도 받지 못하셨거니와 본인조차도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을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무지한 관계로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중년들에게는 일반적인 사회생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개척자로서 시대적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좋거나 실거나 이제 사회생활의 일차적인 정리 이후에 적게는 30년 많게는 50년까지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단, 건강이 예전처럼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불리한 여건하에서. 돈도 얼마 벌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최악의 조건을 달고서는 살면서 삶의 다양한 궤적들을 뒷세대에게 남겨줄 것을 요청받고 있는 셈이다. 그 쓸모없음이 몸으로 땜질하는 태스크를 받았다고나 할까. 아무렇든 간에 인간들로서는 아주 미지의 세계인 것은 사실이다. 혹시라도 그 중간에 혁명적인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명이 더 연장되거나 장기가 새롭게 교체가 된다거나 인공 신체가 보편화된다거나 하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일단은 몸으로 그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 세대가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그 같은 삶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조건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두 번째 과제는 왕성하게 돈을 버는 시기가 아니라 효율성 대신에 지속성을 가지고 경제력을 최소화하는 삶이 어디까지 가능하며 어떻게 사회적 함의를 전달할지를 후세에 기록당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어이없게도 고생은 하던 놈이 해야 덜 힘들다는 평소 내가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앞 세대는 어려움을 견디며 힘들게 힘들게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불태웠다면 지금은 사회를 어느 정도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이제 여세를 몰아 지원은 해주지 않을 테니 새로운 생명연장의 시대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내서 다양한 타입의 삶의 패턴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단, 경제적 여건은 마련해 주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이중고다. 자식새끼 먹이느라 저축도 할 기회가 적었는데,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 역지 없었는데 사회적으로 아직 충분히 노년의 삶을 보장해주지도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밀어붙이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인생들이여!
어쨌거나 그동안의 사회에서는 뒷전으로 밀려나야만 하는 쓸데없는 중년들이 자신의 쓸모를 다시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80년대라는 어려운 시기와 경제부흥기 등등을 거치면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 변화를 몸소 겪은 세대가 이제 다시 파견의 삶을 살려고 한다. 그 쓸데기 없는 중년들이 마음속으로나마 한번 잘 살아보시고 다양한 모델을 다음 세대에게 나누어주면 우리 사회는 또 그렇게 세대 물림을 따라 이어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응원이라도 해봄은 어떨까나. 알량한 중년을 앞세워 다시 한번 사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기회를 다 같이 지켜보면 좋겠다. 어찌 또 알겠는가. 새롭고 황당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