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명함이 필요해졌다

by 너구리

20년 들어 직장을 그만두면서 잠깐 동안이지만 기존의 명함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적이 있었다. 어쩔까를 고민하다가 하나씩 사용 가능한 명함을 만들거나 외부에 속한 조직의 명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명함이 4가지다. 직장생활을 할 때 하나의 명함을 썼지만 지금은 필요에 따라 4가지의 명함을 사용한다. 뭐하러 명함이 4가지나 필요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다 필요하다는 답이 나온다. 용처에 맞게 꺼낼 순간이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하던 직장을 그만둔 지 일 년이 넘어서였다. 함께 파트너로 일하던 행정 공무원들을 만나면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한창 일하다 그만두고 사라져 버렸는데 갑자기 나타나니 의아한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시청을 갈 일이 생겨 시청 국장과 부시장에게 잠깐의 인사를 하고 올 일이 생겼다. 행정과 주민의 사이에서 일하는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인지라 양쪽의 접촉이 잦았던 직업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 갑자기 사라졌으니 서로 마주칠 기회가 줄었고 그들 역시 끊임없이 이어진 인사발령으로 수없이 많은 인연들이 스치기에 만나야 만나는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야 행정과 일하던 시간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온 상황이지만 영전해서 발령 난 사람들에게 가벼운 축하인사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다.

여전히 많은 제주인들이 묻는 인사말이지만 아직도 제주에 있느냐는 물음을 이 날도 여지없이 듣게 됐고 더불어 지금은 뭐하느냐는 질문 역시 따라붙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일까. 공식적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는 일이 없으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백수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사실 백수라는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위치를 곧이곧대로 사용하면서 나 자신을 어필할 만큼 막연한 사이도 아니기에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근래의 생활을 설명한다. 물론 아직도 여전히 설명이 어렵기는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젊은 시절의 백수는 곧 다른 직장을 구해서 옮기기 전 혹은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쉼의 기간으로 '나 자유로워'라는 외침을 가지고 있었다면 었다면 중년의 백수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혹시라도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직장인이라면 더 쉽게 이해하겠지만 50대 후반이 넘은 나이에 백수라는 위상은 그야말로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가 더 크다. 원래부터 사업을 했던 사람이거나 대외적인 직함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그들은 사업하는 사람들로 여겨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야인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 어쩌질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뭐하는 사람이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 직업이 있는 사람이야? 뭐해서 앞으로 먹고살 건데. 퇴직금이 빵빵하다거나 부동산이나 다른 재산이 많거나 유산이라도 많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백수면 어떻고 사업 가면 어떤가마는 사회라는 게 그 같은 인간이 주류가 아니니 어쩌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중년의 미래는 백수라는 어쩔 수 없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운 좋게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가업을 잇거나 소일거리라도 찾아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그게 꼭 자신의 일상과 딱 들어맞는 경우를 찾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경우가 아닌다.

여전히 농담처럼 뭐하냐는 질문에는 백수라고 대답하지만 어느새 책상 위에는 다양한 형태의 명함이 놓여있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소장이나 대표, 어느 경우에는 이사 혹은 지사장, 어느 경우에는 책임연구원, 어디에는 감사 등등 많은 명함이 존재하지만 어느 명함에서도 월급은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그 명함들을 가지고 다닐 때 늘 위치에 따라 사용하는 명함을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이사로서 함께 참여하는 회사의 입장을 반영해야 할 것이고 어느 경우에는 내가 독자적인 프리랜서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해야 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명함을 하나 더 만들었다. 예술단체의 이사 명함이다. 그리고 그 뒷면에 예술가의 직책을 집어넣을 생각이다. 수필가 혹은 시인이라는 예술가의 분야를 집어넣고 살아갈 예정이다. 무엇 때문에 나는 명함에 집착을 하게 될까. 내 문제가 아니라 내 나이 때가 문제가 되는 것이리라.

여전히 중년의 나이에는 사회적으로 은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이전의 사회경제적 구조하에서 중년은 더 이상 일자리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50대가 넘어가면 교사나 공무원이 아니고서는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 하고 현직에서 물러날 일을 걱정해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와중에 덜컥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벌거벗은 개인으로 자리 잡게 된 상황이라면 그때 느끼는 불안감과 초라함은 사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돈도 돈이지만 이 사회에서 더 이상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비닐천막이나 아크릴판이라도 장막을 두르는 것이 필요한 법이다. 코로나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시와 비애 혹은 동정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투명 색지라도 필요한 것이다. 바람이 불거나 큰 비가 오거나 외부의 강한 자극이 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여전히 내가 사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집에서 삼식이 생활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나설 수 있고 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으며 대외활동도 가능해지는 법이다.

어떤 이를 만나면 어떤 명함을 사용해야 할지 꽤나 헷갈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명함이 없이 백수라는 존재로서 내가 육지로 가지도 못한 채 제주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다는 느낌은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명함은 어쩌면 과거 시대의 유산일 수도 있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제공해줄 수 없는 허울 좋은 겉포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명함으로 먹고살고 사회적 위상을 확인해왔던 세대에게 새로운 명함을 부여하는 일은 어쩌면 몇십 년 동안 방치해온 자기 아이덴티티를 만들지 못한 채 맞이한 중년의 삶에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까지 죽지 않았다거나 내가 무엇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사전 검열의 첫 번째 단계로서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는 작업. 그 명함에 중년은 나름 시간을 기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명함에 쓰인 이사라는 직함이나 소장이나 대표라는 직함에 목을 매며 주머니 속에 돈 한 푼 없어도 당당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지만 예전에 호텔이나 중요한 장소의 다방으로 전화가 오면 다방 주인이 "oo동 김 사장님?" 하고 불렀을 때 거의 대부분의 중년들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찾는 게 아닌지 귀를 쫑긋 기울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그 상황이 어찌나 우습고 황당했던지. 모두가 사장인 상황이 우스웠지만 대부분이 머리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서류봉투 하나씩 들고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설득과 호소를 이어가던, 아니면 약속한 상대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수없이 담배를 피워대던 예전 중년들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나도 그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가끔은 예전의 호칭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나 몰라 전 국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소장님이라거나 이사님이라거나 하는 호칭에는 여전히 적응 전 단계인 상황인지라 정체성의 혼란이 없을 수는 없다. 이전의 호칭이 좋았겠지만 그렇게 안될 바에는 새로운 호칭에 적응하는 삶을 기대하고 있다. 중년에게는 새로운 명함들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만나보거든 뭐하시는지 물을 때 명함을 주거든 반갑게 받아주면 좋겠다. 설사 그 명함을 통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확인되더라도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며 그 직함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많은 것이 녹아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최소한 삼식이가 아니기에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생을 겪으며 쌓아온 경험을 잘 사용할 방법을 협의하면서 이끌어 내면 더 좋고.

허울 좋은 명함이 불필요한 중년도 많다. 그들은 스스로 개척한 삶에서 주인이 되었으면 좋은 일이다. 역시 모든 중년이 그렇지 않듯 당분간 나는 명함을 여러 장 사용하는데 스스로 동의하기로 했다. 내가 무엇이든 좀 더 자세히 그리고 명확히 노선을 정할 때까지는 그 명함들은 어쩌면 가능성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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