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링컨이었던가. 4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게. 지금 내 모습은 내가 책임질만한 모습인가. 얼굴을 내비치는 게 자신은 있는 것일까.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남는다. 내 얼굴을 보고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은 실소가 나온다.
외모 콤플렉스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인간들이 군락을 일구어 사는 곳에서는 다 발생했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의 미인이나 미남의 기준이 사회적, 개인적 요구에 따라 달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욕구는 상대방을 통해 가장 좋은 우성인자를 가진 종족을 보존하고 번성시키고자 하는 생명의 유전적 본능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남녀가 서로 만나는데 꼭 종족보존과 2세를 위해 만나지는 않는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발정기가 아닌 시기에도 섹스가 가능하고 그 자체를 통해 삶의 의미나 욕망을 해소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니 그 과정 자체가 어쩌면 진화된 것이자 사회적인 문제 발생의 커다란 근원이 되는 셈이다.
동시에 그 과정이 없다면 인간이 문명을 계속해서 발전시켜왔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말이다. 종족보존 및 번성을 위한 행위 말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욕정이나 이성에 대한 갈구가 역사의 발전에 상당 부분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꼭 발전이라는 형태를 띠지는 않았던 경우도 많지만 시대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동인이 됐던 적은 꽤나 되지 않았나 싶다. 헬렌을 차지하기 위한 트로이전쟁이 발생해 역사를 바꾸었고 로마 집정관들이 계속해서 들이대던 클레오파트라도 그러했다. 동양으로 오자면 당나라 현종 시절의 양귀비 역시 한 나라를 격랑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역사적인 남녀상열지사로 한창 몸을 달구던 시절이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언제였을까.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의 춘향은 당시 16세였던가 그랬고 셰익스피어 작품의 안타까운 비극의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10대였다. 대부분 세기의 미녀가 인구에 회자되는 나이 역시 10대 아니면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젊은 시절의 사랑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으로 추앙되는 대신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여주는 애정에 대한 갈구는 추하거나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비치기 일쑤다. 최소한 어처구니없다는 인식을 갖는다. 물론 세대가 바뀌어서 중년의 사랑에 대한 파격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드러나기는 하지만 역시 관심은 파격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기 일쑤다. 약간의 성격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중국 청나라 시절의 끝자락을 기록하던 서태후는 미소년에 대한 색욕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꽤나 많은 색탐이 있었던 모양인데 무엇하나 정상적으로 비치는 모습은 아니었다. 서태후의 속사정을 알 도리야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색욕에 물든 기괴한 권력자로 알려진 것만은 사실이다.
한때 나이 든 노년의 사랑을 담은 영화가 세간의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기억하는데 70대의 노인의 사랑이야기를 다뤄 꽤나 신선한 충격을 줬던 기억이 난다. 결국 '70대는 사랑을 하지 않는줄 알았는데 그들도 사랑을 하네' 였던거 아니었나?
젊은 시절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개팅을 하거나 결혼을 위해 맞선을 보는 일까지 모든 사랑의 행위는 10대부터 2,30대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30이 지나고 40을 넘어 아니 50줄에 들어서도 독신이 되면 주변으로부터 일정 부분은 포기를, 일정 부분은 안타까움으로 늘 주제가 비슷해진다. 결혼을 안 할 거냐? 라든가. 누구 만나는 사람 없어? 등등.
중년이 되면 혼자되어서도 문제고 부부가 별일 없이 지내도 문제인 시대다. 혼자되면 짝을 찾거나 찾아주긴 위한 숨 가쁜 주변인들의 노력이 한창일 테고 별일 없이 지내는 부부는 어디선가 일탈을 꿈꾸거나 불륜의 잠재적 대상자가 된다. 수많은 불륜 스토리는 중년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 지 오래다. 주변을 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중년이 최소한 애인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만나는 눈물겨운 과정을 쉽게 않게 찾을 수 있다. 이혼과 사별 혹은 독신이라는 상황도 있고 엄연한 일탈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등산을 함께 오는 커플의 대부분은 불륜커플이라는 이야기 속에 부부와 애인관계를 구분하는 시시한 이야기도 전한다. 배낭 2개를 메고 산행을 하면 애인이고 하나를 메면 부부라는 이야기까지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자칭 로맨스가 넘쳐난다.
다시 얼굴로 돌아가서 흔히 잘생긴 젊은 남자를 좋아하는 중년 여인들의 안타까움을 제외하고 엇비슷한 나이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이들에게 미모는 어떨 의미일까를 생각해본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은 당연한 일이어야 하니 최소한 누군가를 싫지않게 하는 미모(남녀 모두 포함)는 당연한 일일테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종종 본다. 애초에 중년의 남녀문제를 관심거리도 되지 않는 개소리로 보는 경우는 차치하고 수없이 많은 동창 모임이나 동문회에 다녀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어린 시절에는 결코 상상도 못 해봤던 거칠고 대범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종종 본다. 깜짝 놀라 아예 발걸음을 끊는 사람도 있고 그 같은 만남이 좋아 모임에 적극적인 사람까지 어린 시절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수많은 관계가 즐거운 모임으로 지속된다.
사실 그 같은 모임의 예가 제시하는 특징은 얼굴이나 미모보다는 결국 사람들에게 비어있는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들었거나, 외로움으로 하루하루가 힘들었거나, 혹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본성이 교육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 가려지고 차단됐던 것을 뒤늦게 알아차려 자신의 이성 본능에 대해 알게되는 등 다양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중년에게 미모는 여전히 중요한 일일 테지만 얼굴이 사람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얼굴을 만들어 주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세월의 무게를 알게해주는 상대편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나를 포함한 중년들이 각자의 입장이 다르기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성을 만나는지 각자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소울메이트라고 만날 수도 있고 뒤늦게 발동한 성적 욕구가 이성과의 만남에 중요한 동인이 될 수도 있다. 경제적 결핍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해서 일수도 있다. 단지 말 상대가 그리워서, 문화적 소양을 교류할 수 있는 모임이나 파트너가 그리울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중년이라고 해서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젊은 시절에 가졌던 본성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멋진 이성도 좋지만 돈의 중요성을 알기에 경제적 풍족함의 중요도를 높이 평가하고 사람 됨됨이가 얼마나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주는지 알기에 인간적인 사람을 찾는다. 여전히 미모가 중요한 사람도 있고 여전히 한탕을 하려는 위인들도 존재한다.
시간이 무대를 옮기면서 만남의 룰을 조금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다양한 위험요인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부비트랩을 쳐놓았다. 가난, 질병, 건강, 사업, 무지, 성격 등 젊은 시절에 드러나지 않았던 다양한 요소를 시험하면서 부비트랩에 걸려 폭사하는 경우를 만들고 이를 넘긴 인간들이 중년을 맞이하면 그 과정을 불륜이나 일탈일 수 있지만 삶은 계속되기 마련이다. 각자의 룰이 바뀌었을 뿐이다.
중년의 불륜은 파격이 아닐뿐더러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요소가 훨씬 다양해졌을 뿐이다. 사람이 다양한 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젊은 시절이 가능성의 시절이었다면 이제는 가능성보다는 결과와 노력 가끔은 운발이 좌우하는 시대에 돌입했다. 어쩌면 그 같은 결과를 놓고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인간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번 해보고 싶은 욕구들을 발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2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려 들면 얼굴의 생김새는 내가 가진 모든 내적인 것을 표출하는 것이다. 성형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인성은 성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많은 중년여성이 피부와 몸매에 대해 집착하고 많은 남성들은 뱃살과 대머리로 고민이다. 다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적으로 중용하지는 않다. 그런 요소를 여전히 중요한 기준으로 삼든 자신의 색깔을 갖든 결국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는 셈이다.
나는 스스로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는다. 한 10년은 된듯 하다. 많은 이들이 대머리를 고민하고 있을때 나는 그 고민을 던져버리기로 했다. 머리에 들이는 시간과 정열과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을 고민한다. 모자를 쓰고 어떤 모자가 어울릴지를 고민한다.
젊은 시절 나는 존재감 없는 외모로 사람들에게 나를 인지시키는데 꽤나 고민을 해야했다. 나와 만나고 지나도 워낙 특이함이 없는 인상이기에 다음에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잘 기억못하는 사업파트너나 거래처가 많았다.이제는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 오히려 내가 상대편을 기억못하는게 문제가 된다. 나의 외모적 특이함으로 알고있음에도 내가 몰라보니 고민이다. 결국 외모도 선택의 일이 아닐까.
청년들이 중년의 시절까지 어떻게 살아갈지 잘 모르듯 중년들 역시 노년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전혀 모른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초보자이기는 역사가 아무리 흘러도 마찬가지니 말이다. 초보자에게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한다. 살아볼 뿐이고 지금도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중년의 만남과 외모선택도 해볼테면 해볼 뿐이다. 그게 인생의 가장 확실한 동기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