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샤 국립공원에 하루 더 묵을 수 있게 되면서 할 수 있는 게 두 가지나 늘어났다. 하나는 캠핑지 내 워터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야간 게임 드라이빙을 하는 것이었다. 노을 지고 어둠이 찾아왔으니 이제 야간 게임 드라이빙을 하러 갈 차례였다.
캠핑지에 입장하면서 관계자에게 야간 게임 드라이빙을 할 수 있는지 문의해 두었었다. 당일 두 자리가 남는다고 했다. 네 명 모두의 자리는 없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두 명이라도 보고 가자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누가 갈지 고심하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별 고민도 없이 예지랑 내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유는 예지랑 나는 휴가 차 온 여행이라 보름 남짓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자기들은 아프리카에 한 달간 머물러 사파리를 할 기회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납득이 갔지만 매번 먼저 양보하는 모습에 나는 또 머쓱했다. 내 내면의 소리에서는 양보할 마음이 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여행지에 와서 이렇게 사심 없을 수 있을까. 나는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건 시간과 돈과 의지를 투자해서 꼭 하는 편인데 이렇게 양보를 받을 때마다 내가 살아온 습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다 같이 할 수 없더라도 나는 꼭 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랐던 습관.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도 돼? 고마워요, 고마워!"
예지랑 나를 데려다주러 하국 오빠와 지석이도 모두 야간 게임 드라이빙 시작 장소로 향했다. 욕심을 비운 사람에게 행운이 따르는 것일까. 출발 전에 가이드가 선(先) 예약한 관광객의 투어 취소로 두 자리가 더 빈다는 소식을 알렸다. 딱 두 자리가 더 남는 것이다. 해서 그냥 우리를 데려다주려고 쫄래쫄래 나온 하국 오빠와 지석이도 함께 야간 게임 드라이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런 작은 것들이 너무나 기뻤다.
우리는 지붕도 없는 철제 지프차에 신나게 올라탔다. 가이드는 각국 관광객을 다 태운 뒤 담요를 나눠주고는 곧 차를 출발시켰다. 체감상 1분 여가 지났을까. 야영객들이 머무는 캠핑지와 동물 고유 영역 사이를 나누던 큰 문이 드러났다. 사실 동물들은 인간들이 정해둔 구역과 정말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문부터는 가이드가 적외선 등으로 어둠을 비추며 동물들을 찾았다. 거의 시작하자마자 야간에 활동하는 동물들이 나타났다.
가장 처음 본 것은 나무 위에 걸터앉은 표범이었다. 낮에 본 것들은 초식동물이 대부분이었는데 밤에는 맹수가 나타났다. '이게 아프리카 사파리의 정수구나' 하며 보자 하니 정말 TV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스펙트럼이 무척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스마트화된 대도시부터 태초의 것일 것 같은 대자연까지 말이다.
다소 이상한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난 사무실에서 컴퓨터 두드리면서 일하는 사람인데, 지금 내 눈앞에 맹수가 있구나. 나는 컴퓨터도 알고 맹수도 아는데, 맹수는 자신은 알지만 컴퓨터를 모르겠지?' 컴퓨터와 맹수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를테면 21세기 사람인 내가 비행기를 타고 조선시대를 여행하는데, '벼루와 먹'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마트폰도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너무 무섭기도 했다. 이건 실체가 없는 무서움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무서움이었다. 지붕도, 창문도 없는 지프차에서 사파리가 진행됐는데 표범이 너무나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난 이 맹수와 거리가 더 가까웠다. 동행들이 나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창가 쪽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가이드가 사진을 찍을 때 플래시를 터트리는 걸 허용했는데, 함께 사파리를 한 관광객들이 플래시를 터트릴 때마다 표범이 사람들 쪽을 쳐다볼까 봐 무서웠다. 혹은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서 사람 냄새가 나서 본능적으로 차량 안을 덮칠까 봐 두려웠다. 표범의 점프력으로 충분히 도달할 만큼 차량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물어 뜯기면 어떡하지, 무서워 죽겠다"를 연발하고 있었는데 표범은 연극하는 동물처럼 사람은 인식하지도 못했다.
차 아래 하이에나들은 사람들을 좀 인식하는 것 같았다. 하이에나는 표범을 대적하기 위해 떼로 나타났는데, 유일하게 봐도 반갑지 않은 동물이었다. 행동이 야비해 보이고 '구구구' 우는 소리도 기분 나쁘게 들렸다.
표범과 하이에나를 한참 쳐다보다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가이드가 등을 비춘 곳은 워터홀이었다. 그곳엔 코끼리 가족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너무나 고요했던 나머지 '꾸르럭 꾸르럭' 물 마시는 소리가 지프차까지 다 들렸다. 적외선 등 덕에 코끼리들이 비밀스럽게 물에 반영되고, 그 위로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과 하나의 달이 떠 있었다. 동화 같은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사진으로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걸 일러스트로 표현하는 걸까. 그림에는 재주도 없으면서 그 장면은 일러스트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동화 같았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어 머리에, 기억에, 마음에 새겼다. 그 평화로운 장면은 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이에나와 코끼리는 무리 지어 다닌다. 생존을 위해서. 하이에나의 시선은 호시탐탐 눈치를 살핀 탓에 늘 외부로 향해 있고, 코리끼의 시선은 작고 여린 것들을 가운데로 모아두어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이에나가 몰려다니면서 하는 일은 맹수의 먹잇감을 빼앗는 것이고, 코끼리가 무리 지어 다닌 이유는 새끼를 양육하고 가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먹이를 빼앗는 것과 가족을 보호하는 것. 훔치는 것과 지키는 것. 그것이 이 두 무리를 보는 나의 시선을 갈랐다. 야비한 것과 아름다운 것 말이다.
무리 지어 사는 인간들은 하이에나처럼 살고 있을까? 코끼리처럼 살고 있을까?
그 이후에도 게임 드라이빙은 2시간가량 이어졌다. 그렇지만 초반에 본 표범, 하이에나, 코끼리가 거의 다였다. 계속 포인트를 옮겨가며 동물들을 찾아봤지만 인상적인 동물들이 나타나진 않았다. 밤에 지붕이 뚫린 지프차로 초원을 옮겨 다니니 찬 바람이 살을 에었다. 체온이 떨어지니 잠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태어나서 체온이 떨어져서 잠이 오는 경험을 처음으로 겪어 봤다. 졸려서 잠이 오는 게 아니라 추워서 잠이 온다는 걸 알아서, 정신을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관광객 모두가 추워서 힘들어 보였다. 펭귄들처럼 다들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특히 하국 오빠와 지석이는 갑자기 게임 드라이빙을 하게 되어서 반바지 차림이라 더 추웠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특히 더 정신을 못 차렸다. 모두가 게임 드라이빙이 얼른 끝나길 바라며 버티고 버텼다. 표범을 본 게 아니라면 이 투어가 후회될 정도로 극강으로 추웠다.
드디어 투어가 끝나고 우리는 몽롱한 기분으로 캠핑 사이트로 돌아왔다.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아껴둔 라면을 먹기로 했다. 살기 위해 먹는 라면이었는데 또 라면을 끓이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전직 해병대 대위였던 하국 오빠가 군대에서 야전하듯 라면 끓이기를 진두지휘 했다. 일단 우리가 갖고 있던 은박지로 냄비를 만들었다. 은박지 냄비가 어설퍼 보였는데 의외로 물 한 방울 세지 않는 간이 냄비가 되었다. 그다음에 나무를 모아 땔감을 만들고, 온갖 종이들을 다 태워서 불씨를 만들었다. 그런데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세 명이서 종이를 넣고 바람을 일으키며 불을 살렸고, 나머지 한 명만이 계란, 햇반을 추가해 라면을 조리했다. 일명 '바쁘게 먹는 라면'이었는데, 먹는 와중에도 계속 불씨에 종이를 넣고 바람을 일으켜야 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임 드라이빙을 하느라 체온이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따뜻한 라면을 먹으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손발은 차더라도 가운데 몸은 따뜻해야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것 같다.
이제 잘 준비를 했다. 텐트가 하나뿐이어서 모기장으로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이게 다 돈을 아끼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건데 또 하국 오빠랑 지석이는 재밌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모기장에서 남자 둘은 일찍 잠들었고 예지랑 나는 자기 전 별을 더 구경하다 자기로 했다.
나미비아에서 이동하며 별을 정말 많이 봤지만 이 캠핑장에는 또 유난히 별이 많았다. 하늘에 별 모양 돗자리를 펴둔 것 같았다. 게임 드라이빙을 하든 라면을 먹든 양치질을 하러 가든 계속 계속 이 별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한국에선 드러나지 않는 별들이니까. 잠시 뒤 같이 구경을 하던 예지도 자러 텐트에 들어갔다. 나는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나와 본격적으로 별 사진을 촬영했다. 여행하며 내내 실패했던 별 사진을 다시 찍어보기로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잘 찍어둔 별 사진도 많지만 내가 본 이 별들을 꼭 담아보고 싶었다. 환상적일 것 같았다. 카메라를 여러 번 조작해보며 별 사진을 찍었다. 찍을수록 점점 더 나은 별 사진이 나왔지만 갖고 온 카메라와 렌즈의 한계도 느껴졌다. 이 사진을 1000장 붙어놓은 게 이 하늘인데, 이걸 다 담아가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조금 무서워졌다. 캠핑지 주변에 자칼들이 돌아다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게임 드라이빙을 하러 갔을 때 표범이 캠핑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장비들을 수습하고 텐트에 들어갔다.
여행은 상상이 만들어낸 겁을 동반한다. 하지만 '겁'을 밖으로 드러낸다고 해서 모험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루라도 비겁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험하는 일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
이날 하루는 동화 같고 환상적이고 추억 그득하고 춥고 피곤하고 무서웠다……. 그리하여 행복했다. 비겁하게 '가만히' 있지 않아서였으리라. 하늘에는 사막 모래알 개수만큼의 별들이 제각각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