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랑 내가 일상에 적응하고 있을 때 한 달간 아프리카 여행을 마친 하국 오빠와 지석이가 한국에 돌아왔다. 인터넷이 될 때마다 여행 사진을 보내주긴 했지만 "한국 가서 얘기해줄게"가 워낙 많았어서 여행 후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돌아오자마자 다시 만났다.
1차 만남은 가평으로 1박 2일로 후기 여행을 떠났다. 가평 여행에서 재밌었던 건 아프리카 여행 때 맡았던 각자의 역할이 모두 바뀌었다는 거다. 아프리카 여행 때 운전대를 한 번도 잡지 못했던 나는 운전을 해서 동행들을 한 명씩 픽업했고, 해외여행 계획에 감을 못 잡던 하국 오빠는 '국내는 자신 있다'며 숙소를 예약했다. 사진 못 찍는다고 놀림을 받았던 지석이는 사진을 맡아 찍었고, 예지만이 아프리카 때와 엇비슷하게 총무와 요리를 담당했다.
가평으로 떠나는 금요일 퇴근길에는 비가 억수로 많이 왔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드(hard)하게 여행할까? 왜 국내에서도 이렇게 쉬운 게 없을까? 나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른 날로 여행 날짜를 바꿔야 하는 건 아닌지 동행들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허나 아무도 취소하자는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걱정하는 건 나뿐이었다. 나 빼고 아무도 이 장마를 개의치 않아했다. 차에서 정인의 「장마」를 선곡할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늘 걱정하고 예방하는 나도 용기를 내서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비 많이 오는 날 운전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독수리 타자가 오타 없듯이 초보 운전자인 내가 이끈 차도 무탈하게 가평에 도착했다. 가평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그쳤다.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는 건 위험하지만 그래도 잘 왔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풀벌레 소리, 개구리 소리가 들렸고 고양이들이 숙소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우리는 비 온 뒤 청초해진 야외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여행 가기 전에 서로를 잘 몰랐을 때 얘기, 우리가 얼마나 죽이 잘 맞는 동행이었는지, 남자 둘이서 한 아프리카 여행은 어땠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에토샤 국립공원에서처럼 행복이란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란 걸 재차 알았다. 다음 날에도 운전을 해야 했던 나는 조금 더 일찍 잠이 들었고 나머지는 밤을 꼬박 새워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예지가 끓여준 라면이 아니라 무려 감자탕을 먹고 밖으로 나갔다. 가평 근처 계곡에서 수박을 나눠 먹고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가평에서 아프리카 때 사진을 모두 정리해서 동행들 각자의 외장하드에 모두 나눠주었다. 하국 오빠와 지석이는 더 이어진 아프리카 여행에서 케냐 커피와 팔찌를 사 와 선물했다. 이들과 함께라면 빠짐없이 좋은 날들이었다.
2차 만남은 두 달 뒤에 이태원에서 이루어졌다. 그 사이 예지는 남미 여행을 다녀왔고 하국 오빠는 새로운 분야에 취업을 했다. 예지는 남미 여행이 어땠는지 후기를 들려줬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나서 '세상 넓음'을 체감했는데 남미는 또 얼마나 넓을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지석이와 나는 '남미는 언제 가보지?' 하며 궁금한 만큼 마음이 부풀었다. 하국 오빠는 자리 잡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직업군인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 것이다. 결혼도 여자 친구의 양해를 구해 1년 미루었다고 했다. 이때 하국 오빠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는데 서른이 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부러웠다.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 '너무 큰 것을 보고 왔다'며 벅차 했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 아쉬웠다. 우리는 하국 오빠를 따라 이태원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헤어졌다.
하국 오빠의 여자친구 분이 캘리그라피를 준비해주셨다. 그녀는 산타 아가씨다.
3차 만남은 그다음 해 초에 이루어졌다. 압구정에 위치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였다. 그 사이 지석이는 취업을 했고 나는 퇴사를 했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지석이는 직장인이 가져야 할 책임감, 성실함, 계획성을 이미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들어가는 게 문제지 들어가기만 하면 훌륭한 사회 일원이 될 참이었다. 그런 친구를 알아본 회사가 드디어 생긴 것이다. 마땅히 잘될 사람이 잘된 것 같아 다행한 일이었다. 지석이는 여행에서도 그랬지만 취업 준비도 담담하게 해내는 것 같아 안정감 있어 보였다. 나는 지석이와 바통터치하듯 퇴사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퇴사 이후 3개월 간의 중남미 여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다들 내가 겁이 많은 걸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라 '네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 했는지 알아'라며 격려해주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왔냐'라고 했을 때 내가 크게 우쭐대지 않았던 건 나 혼자는 절대 못할 여행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준 이 동행들 덕분에 아프리카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중남미에는 이 동행들 없이 혼자 가야 해서 불안했다. 나도 내가 간다고 해놓고 잔뜩 쫄아있었는데 이들이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웠다. 특히 하국 오빠는 우리를 위해 각자 상황에 맞는 성경 말씀 캘리그래피를 선물했다. 그즈음 '신이 있는 것 같다'로 마음이 기운 상태라 내가 받은 글귀가 무척 마음에 와닿았다.
'혜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리라.' (여호수아 1:9)
아는 말씀이 많지 않아서 이 글귀를 마음에 품고 중남미 여행길에 올랐다. 아프리카 때 느꼈던 대자연의 우주적인 느낌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었다.
4차 만남은 여의도 한강 공원 난지 캠핑장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중남미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기념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중남미에서 사 온 선물과 한국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남아공 사바나(Savanna) 맥주를 구매해갔다. 예지랑 하국 오빠가 만날 때마다 뭔가 손에 쥐어주니, 지석이와 나도 조금씩 뭔가를 준비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석이는 선물로 도서를 준비해 왔다.
이날은 비가 억수로 많이 왔는데 우리는 왜 또 이런 날 캠핑을 하냐며 '절대 쉽게 안 만나, 아니 못 만나'하며 웃겨했다. 이날 캠핑을 하며 아프리카 때와 대비되는 상황이 하나 있었다. 한강에서 라면 끓이기 기계로 라면을 먹은 것이다. 한강에서 먹는 라면은 에토샤 국립공원에서 부채질해가며 '바쁘게 먹는 라면'을 떠오르게 했다. 한국에선 이렇게 쉽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는 불씨 살려가며 먹었다며 추억을 되새김질했다.
빗소리에, 음악까지 흘러나오는 텐트 안에서 우리는 근황을 이어갔다. 이때 하국 오빠는 결혼 계획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예비신부에게 프러포즈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하국 오빠의 프러포즈 아이디어를 같이 내줬다. 그리고 여행 때 듣지 못했던 예지와 지석이의 꿈도 물어봤다. 예지의 꿈은 '나이 들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었고 지석이의 꿈은 '항상 꿈꾸며 사는 것'이었다. 친한 친구였지만 예지의 꿈을 처음 듣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예지에게 종교적인 부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고 그만큼 그동안 우리가 얘기하지 못한 카테고리가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지석이의 꿈을 들으면서는 루틴한 일을 잘 해낼 것 같은 지석이도 그 마음속에는 늘 뭔가 꿈틀거리기를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미비아의 길 위에서 하국 오빠의 꿈은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었고 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모두의 꿈을 알게 됐다. 누군가는 그 꿈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은 모호하지만 지향하는 바에 마음이 가 있었다.
나는 꿈에 대해 얘기하는 게 참 좋다. 누군가는 꿈이 없어도 된다고들 하고 꿈 때문에 더 괴로워진다며 꿈에 대해 말하기조차 버거워한다. 그러나 꿈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나는 꿈 얘기를 하는 게 좋다. 그런데 꿈을 먼저 물어봐주기까지 한다니. 꿈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이 사람들을 알게 돼 감사했다. 모두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5차 만남은 하국 오빠의 결혼식에서였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좋은 가을날이었다. 하국 오빠는 발이 넓어서 알면 알수록 놀라웠는데 심지어 연예인의 가족이 되었다. 그게 많이 신기했다. 하국 오빠도 화장해두니 연예인 같았다. 우리 모두에게 캘리그래피를 직접 써준 신부도 보았다.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하국 오빠가 매우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라 결혼식이 많이 유쾌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예지와 지석이와 나는 따로 카페에 둘러앉았다. '그는 갔다. 이제 유부남이랑 놀지 말자!'
6차 만남은 그다음 새해에 이루어졌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강남역, 그곳에 자리한 교회에서 만났다. 예지가 '사랑의 수고'를 자처해 초대한 자리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자리에서 근황을 물었다. 지석이는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는 듯했고 예지는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이 책을 쓰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하국 오빠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전했다. 태명은 열매. 그는 '좋은 아빠가 되는' 꿈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동행들 모두가 각자 하던 고민에서 조금은 벗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기존에 살았던 방식과 조금 다르게 살 '운명을 바꿀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이젠 내 차례다.
이들과 여행하고 또 그 이후에 여러 차례 만나며 느낀 건 성인이 된 후에 '내가 살아가는 모양을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되게 큰사람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마음속에는 이상주의적이고 뜨거운 무언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모순 때문에 '특이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 평소에 몇 겹으로 감춰두며 지냈다. 그런데 이들 앞에서는 오히려 이들이 품은 큰 생각에 늘 놀라는 타입이니 그 안에서 그리 튀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이하다'는 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변두리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 높은 개방성을 지닌 사람들 품에서 맘껏 자유로워졌다. 이들은 다른 모양으로, 다른 도전을 하려는 서로를 많이 격려해줬다. 성인이 된 이후, 어쩌면 사회인이 된 후 진실한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운데 내가 살아가는 모양을 응원해줄 사람을 만난 듯했다.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