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들꼬들 매력적인 맛
인도에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던 작년 3월, 나는 새로운 생활에 정신없이 적응하는 동시에 끝없이 집밥 메뉴를 고민하느라 한껏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과일이나 요구르트 등으로 간단히 차릴 수 있는 아침, 남편은 회사에 가고 아이는 학교에 가는 점심을 빼고라도 일주일에 아홉 끼 정도를 각기 다른 메뉴를 생각해서 요리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메뉴 고민과는 별개로, 제대로 된 한국 음식도 간절하게 생각났다. 거창한 음식을 먹고 싶었던 게 아니다. 따뜻하게 갓 지은 밥과 나물 등 서너 가지 밑반찬을 곁들인 밥상을 누가 뚝딱 차려줬으면 싶었다.
무슨 밑반찬을 먹고 싶은지 생각하다 떠오른 반찬이 무생채였다. 그 때는 아직 인도의 여름이 시작되기 전인 3월이라 아침 저녁 공기는 아직 쌀쌀한 계절이었다. 그래서 무생채가 생각났을까. 40년 동안 한식을 먹고 자란 나의 무의식에 찬바람 불면 나오는 월동무가 가장 맛있다는 진리가 뿌리내리고 있었나보다.
빨갛게 무친 새콤달콤한 무생채 맛이 떠오르자 당장 오늘 만들어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참 순진하고 상식도 없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통통한 무를 '조선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무는 한국에서만 판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럼 인도에는 무가 없나? 엄청 길쭉하고 매운 무가 있기는 있다. 그런데 무는 날씨가 추워져야 나온다. 완연한 봄날씨에 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 뭔가를 못하게 되면 더욱 그것을 하고 싶은 법. 나의 몹쓸 기억이 소환해 낸 무생채의 맛을 한번 떠올리고 나니 무는 없지만 어떻게든 비슷하게 해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무와 비슷한 재료가 없을까 머리를 굴리던 중 그린 파파야가 떠올랐다. 태국 음식 쏨땀이 그린 파파야 샐러드이니 생으로 무치면 무와 식감이 비슷할 것 같았다. 게다가 파파야는 늘 슈퍼에 널려 있으니 분명 그린 파파야도 있을 것이었다. 슈퍼마켓 배달 앱을 뒤져보니 '생 파파야(Raw Papaya)'가 있었다.
생 파파야와 그린 파파야가 어떻게 다른지 찾아 보니 둘 다 익지 않은 파파야를 부르는 말이었다. 당장 그린 파파야 한 덩어리를 주문했다. 난생 처음 보는 그린파파야는 무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단단했고, 반으로 갈라 보니 향이 거의 없어서 양념에 무치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린 파파야를 채 썰어서 고춧가루로 색을 입히고, 인도 설탕 재거리, 식초, 그리고 멸치 액젓을 조금 넣어 버무렸다. 파도 썰어 넣고 깨까지 뿌리니 모양과 냄새가 제법 무생채 같아 기대가 됐다. 맛은 과연 어떨까? 실망스럽게도 내가 생각한 아삭하고 알싸한 무생채는 아니었다. 뭔가 부족한 맛이 아쉬웠다.
그러나 먹다 보니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무는 아삭아삭하지만 그린 파파야는 꼬들꼬들하고 오독오독한 식감이 있다. 또한 무는 잘못 고르면 맛이 세고 매운데 그린 파파야는 매운맛이 없어서 아이 반찬으로 주기도 좋다. 무생채 특유의 알싸한 맛이 부족해서 아쉽다면 고춧가루를 좀 더 넣어 살짝 맵게 먹으면 된다. 반찬 없을 때 뜨거운 밥에 달걀 후라이 하나 올리고 그린 파파야 생채와 김가루 넣어 참기름에 쓱쓱 비벼 먹으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짜파게티와 함께 먹어도 별미이다.
요즘도 나는 무가 나오지 않는 계절에는 종종 그린 파파야 생채를 만들어 먹는다. 꼬들꼬들한 그린 파파야 생채, 인도 밥상에서 무생채의 훌륭한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