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리챔 김밥
인도에 정착한 지 두 달,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컨테이너 짐이 도착했다. 물론 우리 짐은 진작에 왔지만, 내가 기다렸던 것은 새롭게 발령받은 같은 회사 다른 주재원 분의 컨테이너였다. 인도에는 한국 물건이 다양하지 않고 특히 식료품은 구하기 힘들거나 한국보다 많이 비싸다 보니 컨테이너 이사를 할 때 실을 수 있는 가능한 식재료를 다 싣는다. 또한 회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남편 회사의 경우 다른 직원이 발령받아 주재지에 올 때 컨테이너에 꼭 필요한 개인짐을 조금 실을 수 있다. 우리 짐을 받은 지 석 달도 안 되었을 때라 필요한 물건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통조림 햄이 간절히 필요했다. 왜 나는 통조림 햄을 기다렸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먼저 한국인의 소울푸드 '김밥'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김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일잔치, 소풍 등 즐거운 행사에 김밥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김밥은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하다. 달걀, 고기, 각종 야채가 골고루 들어간 김밥은 5대 영양소를 빠짐없이 갖춘 완전식품이다. 김밥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어디서든 쉽게 먹을 수 있다. 김밥 프랜차이즈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마다 유명한 김밥집이 있으니, 김밥은 과연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맞다. 그러니 인도에서도 먹고 싶은 게 당연하다. 인도에 오고 어느 날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러나 한식당에서 김밥을 사 먹자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김밥은 한식당이 아니라 분식집에서 먹어야 제맛 아닌가. 그의 영원한 짝꿍 라면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당근, 오이, 시금치, 버섯 등 기본적인 재료는 아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고기 한 종류만 넣으면 집에서 김밥을 말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여긴 고기 없는 나라였지. 그렇다면 닭고기를 넣어야 할까? 닭고기 김밥이라니, 들어보지도 못했고 이제 닭고기는 좀 그만 먹고 싶다. 아, 이래서 통조림 햄이 필요한 것이었구나. 통조림 햄은 김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스팸, 리챔, 런천미트 등 수많은 통조림 햄이 있지만 그중 단연코 최고급(?)이자 통조림 햄의 대명사는 스팸이다. 625 이후 미군 부대에서 배급하던 식품이라 영양가는 별로 없고 칼로리가 높지만, 스팸은 한국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음식이다. "따뜻한 밥 위에 스팸 한 조각"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짭짤한 스팸은 공식 밥도둑이다. 어렸을 때는 단골 도시락 반찬이었고, 좀 커서는 자취생들의 고급스러운 반찬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내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가공 다짐육이 몸에 뭐 그리 좋겠냐 싶어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굳이 먹이지 않았다. 요리하기 간편하다는 장점에만 기대기엔 고기, 생선 등 좋은 식재료가 너무 많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인도 가기 위한 준비를 하던 때, 먹을 게 별로 없으니 한국 통조림을 최대한 많이 실어가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평소 통조림 햄을 먹지 않았으니 나는 끝까지 통조림 사지 않았다. 스팸이야 뭐 어디에서건 살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김밥에 넣을 햄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갔으나 역시 베지테리언의 나라답게 스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달려간 한국 슈퍼마켓에서 찾은 스팸은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그제야 내가 왜 말을 안 듣고 사 오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그래서 나는 통조림 햄을 잔뜩 컨테이너 짐에 싣게 된 것이었다. 그걸 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어딘가 찜찜해 조금이라도 나트륨이 적은 걸 사겠다면서 고른 게 스팸이 아닌 리챔이었다.
통조림 햄을 먹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김밥을 쌀 때만 리챔을 넣는다.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먹어 보겠다고 끓는 물에 삶아 기름을 뺀 후 굽지만 크게 기름이 빠지는 것 같지는 않다. 자주 먹는 것은 아니니 건강에 심각하게 영향이 있지는 않겠지 싶어 눈을 질끈 감는다. 이것마저 없다면 먹을 게 너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김밥에 넣으면 정말 맛있다. 이것이 바로 김밥 맛이지 싶다. 인도에서 통조림 햄의 존재 이유, 바로 김밥을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