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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토스 Dec 17. 2024

눈물 어린 잔치국수

우리 모두 힘들었던 그때

 한국에서 보낸 컨테이너 짐이 아직 도착하기 전, 가구도 없이 텅 빈 집에서 그릇 몇 개, 냄비 몇 개만 가지고 캠핑 아닌 캠핑 생활을 했던 인도 생활 초반의 일이다. 익숙한 살림이 없으니 내 집 같지 않아서 마음은 한국도 인도도 아닌 허공 그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지만, 나의 새로운 업무인 집안 청소와 요리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슈퍼마켓에 가도 두부도, 고기도, 생선도 구할 수 없고 있는 것이라곤 정말 닭고기뿐인 현실에 충격을 받아 우울해하고 있던 중, 고심 끝에 생각해 낸 메뉴가 바로 잔치국수였다.


 필요한 재료는 소면, 달걀, 당근, 양파, 버섯, 그리고 여기서 구할 수 없는 애호박 대신 주키니. 한국에서 소중히 챙겨 온 소면 외에는 모두 여기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3대째 이어져 내려온 잔치국수 전문 식당을 운영하는 손녀의 마음가짐으로 요리에 임했다. 재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채 썰어 프라이팬에 따로따로 볶아 내 고명을 만들고 달걀지단을 부쳐 가늘게 썰었다. 소면을 여러 번 찬물에 헹궈 끈적이는 전분을 없애고, 육수는 간편하게 마법의 해물 동전 육수로 해결했다.


 과연 한국에서 먹던 맛과 똑같았다. 가족들 모두 정말 맛있다고 즐거워하며 먹었다. 그런데 그때 일곱 살이었던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눈물이 나서 더 이상 국수를 못 먹겠어."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한국에서 살던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알고 보니 잔치국수는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 주시던 시어머니께서 아이에게 자주 해주셨던 음식이었다. 그걸 먹으니 아이도 저절로 한국 생각이 났을 것이었다. 그놈의 음식이 뭔지!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추억과 그때 나의 기분까지 떠올라 버린다. 기쁜 날을 축하하기 위해 먹던 잔치국수가 눈물을 불러올 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잔치국수를 만든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아이가 자주 먹었던 음식이 뭔지도 몰랐던 지난날의 무심했던 내가 한심했다.


 아이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와 남편이야 스스로 결정을 내려 인도에 오기로 한 것이었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를 따라가야 하는 아이가 겪게 될 혼란이 인도에 오면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아이는 아마도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혼란스럽고 억울했을 것이다. 영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해 힘들고, 먼 통학거리에 지쳐 학교 가기 싫다고 매일 울면서 잠들었다. 밤에 울다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도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다.


 나 또한 눈물이 났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 떨어져 넘쳐나는 시간을 혼자 감당하며, 제일 중요한 하루 일과가 메뉴를 고심하고 요리하는 일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한국에서 누리던 많은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올 생각을 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온 가족이 함께 인도로 오는 것에 대해 남편과 충분히 상의하고 결정했지만, 길가에 널린 쓰레기, 그 쓰레기를 먹는 소, 그 사이에서 자동차 창문을 두드리는 거지를 매일 보며 앞으로 4년을 살아야 할 이곳에 정을 붙이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자주 아득해졌다. 역시 마찬가지로 힘들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남편에게는 이런 마음을 얘기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눈물을 삼키던 시절이었다.


 아이의 눈물에 놀라서 그 뒤로는 한 번도 잔치국수를 해 먹지 않았다. 앞으로도 굳이 해 먹지는 않을 음식일 것 같다. 아이는 그 일을 기억할까? 이제는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편해진 아이에게 그때 일을 기억하냐고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잘 견뎌주어 정말 고맙다고 꼭 안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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