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틱 체험

08. 지금 바틱이 대수가 아니고

by 게으른 기록자

발리에서 이런저런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역시 따로 예약하지 않고 떠났다. 그래도 인도네시아 전통 공예인 바틱(Batik) 체험은 꼭 해보고 싶었다.


아침에 숙소 침대에 누워 근처 적당한 곳을 찾아 왓츠앱으로 예약했다.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어영부영 또다시 눈에 띄는 한국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점심 먹기 전에 거리 구경을 좀 하고 싶었는데,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곳은 김밥, 라볶이와 특이하게도 쌀국수를 함께 파는 곳이었는데, 주문하려고 하자 무슨 사정이 생겼다면서 30분은 기다려야 한단다. 상황이 이러하니 주문하지 않아도 비는 피하게 해주겠다면서. 우산 없이 다른 식당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빗속에서 열심히 도로를 보수하는 인부를 구경하며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잠들었더라. 셋 다 불편한 자리에서 나름의 잠을 청했다. 아이는 밥이 나올 때까지도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쌀국수와 라볶이를 먼저 먹고, 아이가 주문한 김밥이 조금 남았을 즈음에 아이를 깨웠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를 시간이 촉박하여 후루룩 먹이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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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하는 곳이 근처라 남편이 아이를 안고 뛸 생각으로 채비를 하는데, 마침 돌아다니며 우비를 파는 아저씨가 지나가시길래 급하게 사서 쓰고 이동했다.


간판을 따라 골목길 안 오래된 집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우붓에 와서 숙소나 가게가 아닌 가정집(으로 보이는 공간)에 들어가 보는 것이 처음이라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평상에 앉아 소일거리를 하고 계시는 백발의 할머니를 보니 우리네 시골의 모습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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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작은 건물을 지나 더 깊숙이 들어가니 본격적으로 바틱 체험하는 공간이 나왔다. 이미 한 동양 여자분이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고, 우리도 조심조심 자리를 잡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큰 냄비에서 왁스 냄새가 났다.


비가 와서 낭패였다. 평소라면 마당을 넓게 쓸 수 있었을 텐데, 비 때문에 지붕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단 연필로 스케치를 마치고 나서는 붓에 왁스를 조금씩 묻혀가며 라인을 따라 그려야 하므로 냄비에서 멀리 갈 수가 없다. 바닥은 빗물로 미끄럽고, 아이는 신기한 게 잔뜩이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우리 부부의 신경은 곤두서고...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본격 체험을 시작했다.


피차 엉성한 영어로 의사소통하며 이해한바, 바틱 체험의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스케치북 정도 크기 종이에 그려진 수십 장의 도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다.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틀에 얇은 천을 씌운다. 그 아래에 고른 도안을 대고 연필로 라인을 따라 그린다. 왁스를 묻힌 붓으로 연필 스케치를 따라 그린다. 이후 과정을 통해 왁스는 지워지기 때문에, 왁스를 묻힌 부분은 염색되지 않고 원래 천 색깔(우리의 경우 하얀색) 그대로 남는다. 왁스 칠이 끝나면 특수한 염료로 색을 칠한다. 눈에 보이는 염료 색이 그대로 염색되는 것이 아니기에 칠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이후 약품인지 물인지 모를 뜨거운 액체가 담긴 통에 천을 넣었다가 건지면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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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이가 팀이 되어 작품을 만들기로 하고, 나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끝까지 완성할 만큼 집중하지는 못했다. 결국 남은 건 아빠의 몫... 나는 나대로 내 걸 예쁘게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한껏 집중했다. 자기 몫을 끝낸 아이는 내 바틱 채색을 도와주었다.


다른 후기들을 찾아봤을 때 ‘아이들이 잘 못해도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작품이 나옵니다’ 식의 평을 보았던 터라, 다소 유치한 나의 작업도 작품이 될 줄 알았건만. 정확히 내가 만든 그대로의 결과물이 나와서 다소 아쉬웠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이가 귀여운지 자꾸 ‘한국 말고 발리에서 살아’, ‘엄마 아빠는 가라고 하고 오빠(Bali brother)랑 살까?’ 식의 농담을 던져서... 가뜩이나 낯을 가리는 아이가 부담스러워했다. 아이가 반응이 없으면 그만할 법도 한데 계속해서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을 집요하게 던지니 난감했다. 나도 몇 번은 반응을 해주다가 포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이가 딱히 유쾌해하지도 않는 그 상황에서, 내가 조금 더 단호하게, 정색으로 대처하는 게 나았을까?


평소 분위기 깨는 걸 잘 못하는 나로서는 이런 내 성격 때문에 아이가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내가 나서는 게 맞을까? 아니면, 정말 싫다면 아이가 직접 나서서 ‘No’라고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축축한 바틱을 어디 담아주지도 않고 가져가라고 해서... 어정쩡하게 접어 들고 털레털레 나왔다. 이 작은 천 조각 두 개로 무엇을 하면 좋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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