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메타버스를 알어?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우여곡절 끝에 미래사업전략TFT의 킥 오프 미팅이 시작되었다. 참석자들의 자기소개로 미팅이 시작되었다. 회의실을 가득 채운 20명 이상의 인원들이 차례로 한 명씩 일어났다. 태반은 과장 급 이상이었고, 가영과 비슷한 대리 급 직원들은 4,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데 한 바퀴 다 돌고 나니 시간은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것 때문에 회의실 예약을 두 시간이나 잡았나?’
이쯤 되니 이런 의문을 갖는 게 합리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미팅의 진행을 맡은 것은 미래사업전략 TFT 총책임을 맡은 것은 전략기획실장이었다. 슬라이드 화면에는 그가 (혹은 그 아래 실무 직원이 밤을 새워서)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PPT 화면이 커다랗게 떠 있었다.
그 장표에는 최근 5년 동안 국민서점 웹사이트를 통해 책을 구매한 독자들의 연령층과 구매 권수, 분야, 고객 등급 비율이 막대그래프와 수치 값으로 한 번에 표기되고 있었다. 전략기획실장은 비장한 말투로 PT를 시작했다.
“저희 국민서점은 창립 이래 쭉 인터넷 서점 1위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전자책이나 중고책 마켓 등을 내세운 특화 서점들이 속속 등장하고, 오프라인 기반의 대형 서점들이 온라인으로 유통처를 전환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는 상황 속에서 저희 국민서점의 입지에도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말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듯, 전략기획실장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제 손가락을 화면의 막대그래프에 올렸다.
“보시면, 저희 국민서점 사이트에 방문하여 도서를 구매하는 총 고객 수는 지난 5년 간 꾸준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1020 고객의 유입은 저조한 반면 기존 충성 구매 고객층의 연령대가 올라가면서 저희의 전반적인 주 이용 고객 연령층도 3550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위기의식을 고양시키고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나름의 연출인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한 그는 리모컨을 눌러 PPT의 다음 장을 넘겼다.
가영은 그 장표를 보자마자 아찔해졌다. 화면에는 ‘미래사업전략’이라는 말과 함께, 요즘 여기저기서 각광받는 메타버스 게임, 증강현실 서비스, NFT 마켓 플레이스 등의 이미지가 서비스명과 함께 캡처돼서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관련하여 최근에 신문기사에 언급된 것들은 죄다 끌고 온 듯했다.
그 상태에서 전략기획실장이 한번 더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테두리가 둘러진 텍스트 하나가 화면 가운데서 빙글빙글 돌면서 튀어나왔다.
M.E.T.A.B.U.S
가영은 탄식했다.
‘저건 대체 무슨 버스냐. 71번이냐, 1200번이냐….’
어쩐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통에 가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리 국민서점도 보다 젊은 층의 고객들을 유입시키기 위해 이제 이런 미래 기술과의 융합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즉, 메타버.스를 도입해야 한다 이겁니다.”
가영이 슬쩍 곁눈질로 보니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메타버스의 스펠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메타버스를 논한단 말인가. 정말 대환장할 지경이었다.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하면, 이는 제2의 인터넷입니다. 오랜 기간 대한민국 인터넷 서점 1위를 유지해 온 업계 선도 기업으로서, 저희는 누구보다 빠르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아니, 메타버.스로의 전환을 이뤄야 한다고 봅니다.”
가영은 전략기획실장의 입에서 메타버.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이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영은 지금 이 회의실에 참석하여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 과차장님들 중 몇 명이나 메타버스 게임을 해 보았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인원들 중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가영조차 피노키오 같은 유명한 메타버스 게임이 몇 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NFT 야 뭐, 두 말하면 잔소리고 말이다.
결국 이 대환장의 TFT가 마무리될 무렵, 전략기획실장이 가영 및 대리급의 직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을 때.
“그러니 모쪼록 이번 미래사업전략 TFT는 우리 젊은 2030 세대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잘 끌어줬으면 합니다.”
가영은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히도록 답답해졌다. 미팅 직후가 점심시간이었지만 밥맛도 없을 정도로.
***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젊은 사람들로만 TFT 구성을 하던가.」
퇴근 후 지하철을 타자마자 가영은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분노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2030이 봉이지 뭐.」
은수가 말했다. 가영의 회사 근처에 위치한 출판사에 다니고 있는 은수는 가영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만난 지 햇수로 20년이 넘은 이후로는 서로 몇 년 차 친구인지 굳이 계산하지 않는 사이였다.
「말도 마. 꼰대들 그러는 거 원 투데이냐고.」
인경이었다. 대학에 졸업하자마자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떡하니 합격한 뒤 장기 근속중인 그녀는 은수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사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은수와 인경 서로 그냥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은 대학에 진학 후 처음 나간 동문회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된 뒤였다고 한다.
가영이 다니던 대학과 은수가 다니던 대학은 바로 옆에 이웃처럼 붙어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의 자취방도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가영은 은수를 보러 자주 그녀의 학교로 놀러가곤 했다. 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가영이 은수를 보러 갈 때마다 그 술자리에는 꼭 인경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영 또한 인경과 대화를 트고 친해지게 되었다.
박가영, 유은수, 차인경 세 명이서 10여 년 전 그날, 술값 1/n 정산을 위해 파게 된 단톡방은 이제는 가영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세 명으로 이루어진 이 소박한 단톡방은 지난 10여 년간 세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역사를 다 담고 있었다.
은수가 유럽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낮밤이 바뀌었을 때에도, 인경이 전 남자친구의 양다리로 인해 헤어진 후 매일같이 술로 병나발을 불던 때에도, 가영이 국민서점 합격 전 연이은 탈락으로 자존감이 바닥 치던 취준생 시절에도.
그 어떤 경우에도 이 단톡방의 대화가 24시간 이상 중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톡방 상단에는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단톡방을 폭파해 줘’라는 메시지가 공지사항으로 고정되어 있을 정도로 할 말 못 할 말을 쏟아내는 막역한 방이었다.
뭐, 그렇게 인생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지지고 볶고 욕하고 풀어내는 것이 30대 미혼 여성 세 명이 험난한 세상을 개같이 버티는 방식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이제 서로가 직장생활에서 뭣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 어떤 영화를 보고 뭘 덕질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마치 뇌 자체가 동기화된 것처럼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야, 예전에 나 유튜브 채널 기획했던 거 기억 나?]
은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은수가 지금 다니는 출판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표가 직접 은수를 불러서 그런 말을 했었다고 했다.
「알지. 그때도 대표가 '젊은' 직원들이 기획해야 한다고 했다며.」
「응. 막 ‘은수 씨, 평소에 유튜브 채널 많이 보잖아. 점심시간에 자리 점심하면서 유튜브 켜놓는 거 다 봤어’라고 하는데 개소름끼치더라고 ㅋㅋㅋㅋ」
「그래도 어쨌든 결국 네가 다 하지 않았어?」
「뭐, 까라면 까야하니까.」
은수가 입으로만 저러면서 결국은 다 해준다는 것을 아는 가영은 가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걸 보면 그나마 은수가 우리 중에 가장 조직 친화적인 인물일지도 모르지.’
단지, 그게 좋아 보여서 리스펙 하는 것과 가영 본인이 직접 그것을 시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뿐이었다.
「근데 그때 대표가 그러더라고. ‘내가 은수 씨, 덕업일치 도와주는 거야.’라고.」
「무슨 개소리임? ㅋㅋㅋㅋㅋㅋ」
「점심시간에 내 모니터는 훔쳐 보면서 정작 내가 보는 채널이 죄다 고양이 유튜브 채널인 건 안 봤나 봐.」
「그니까. 그게 책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ㅋㅋㅋㅋ휴…」
'ㅋㅋㅋ'를 쓰고 있었지만 'ㅋㅋㅋ'를 쓴다고 해서 정말 현실에서 웃음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은수는 결국 어떻게든 출판사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런칭해냈다. 다만, 오픈 초기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아 대표의 흥미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담당자였던 은수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옳다구나 하고 바로 손을 놓아버려 지금은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
아마 가영도 그럴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메타버스를 온라인 서점에 도입하여, 윗분들의 마음에 들 뭔가를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할 운명인 것이다. 단지 2030 세대라는 이유만으로, '주축’이 되어서.
「몰라, 말로는 내가 메인이 아니라는데… 정작 메인인 사람이 없어. 심지어 서 팀장은 메타버스가 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가영은 오늘 결국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회의실에서 빠져 나오는 길에 서 팀장이 정 과장과 함께 서로 맞장구를 치며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이런 거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더라. 박 대리만 믿는대 ㅋㅋㅋ]
「근데 차라리 그냥 계속 모르면 다행인데, 결국에는 그거 다 하나하나 설명해가면서 해야 할걸?]
「맞아. 그게 진짜 중요해. 윗사람 이해시키는 것도 능력이다, 야.]
은수의 말에 인경도 이골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적어도 인경이 이 쪽 분야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큼은 신뢰할 수 있었다. 인경이 다니는 회사는 블라블라에서도 꼰대들 많기로 소문난 보수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회사였다. 때문에 윗사람들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늘 인경의 몫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걸 알았냐면… 후… 나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실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친구들의 말에 가영은 숙연해졌다.
「하여튼, 박가영이 당분간 고생 좀 하겠네.」
「아 몰라. 하여튼 요새 되는 게 없어. 오늘 보니까 주식도 겁나 꼬라박았는데...」
「야 너 그거 결혼 자금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그러다 돈 다 날리면 강준성 너랑 결혼 안 하는 거 아냐?」
「후… 그럴 수도 있지.」
3년 전부터 말로는 ‘결혼하자, 결혼하자’ 하면서 계속해서 결혼 자체는 미뤄지는 것도 어찌 보면 돈 때문인데. 혹시라도 준성이 지금 가영의 주식과 코인 잔고 현황을 보게 된다면 무슨 잔소리를 또 얼마나 해댈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프러포즈 아직이야?」
「응. 그래도 내년쯤엔 날 잡자는데…」
「야, 벌써 올해 3달 밖에 안 남았다. 그냥 최후통첩 해.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그래. 장기 연애하다 헤어지는 경우 많더라. 그냥 네가 옆구리 먼저 찌르고 얼른 가버려.」
가영은 말없이 스마트폰의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서 메신저 앱을 꺼버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지하철 문에 머리를 기댔다. 창 밖으로 어둑어둑해지는 한강이 보였다. 무겁게 내리깔리는 어둠 때문인지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축 처지는 것 같았다. 가영은 어쩐지 무척 피곤해졌다.
***
“왔어?”
오피스 빌딩들 사이에 위치한 작은 빌라 2층. 가영이 초인종을 누르자 준성이 문을 열었다. 가영의 손에는 역 앞 가게에서 사 온 치킨이 들려 있었다. 배달시키면 배달비 청구한다고, 가영더러 오는 길에 겸사겸사 사 오라고 한 것이었다.
준성은 가영 인생의 유일한 남자 친구였다. 애초에 가영은 대학에 다니면서 미팅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아르바이트도 과외같은 것만 했어서 밖에서 누굴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같이 조별 과제를 하거나 스터디를 하면서, 술자리에서 만나면서 호감을 가진 남자들은 종종 있었으나, 어떻게 하면 그들과 ‘아는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알지 못했다.
취업을 한 다음에는 더욱 그랬다. 일-집-일 루트를 반복하며, 가끔씩 은수와 인경을 만나서 노는 게 고작인 그녀의 적적한 삶에는 도저히 남자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디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교통사고라도 일어나지 않고서는 말이다.
그렇기에 가영에게 연애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남의 일’에 가까웠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가영은 모태솔로로 살면서 길거리의 연인들을 보며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었다.
‘남들은 대체 다들 어디서 누굴 어떻게 만나서 저렇게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오래 혼자 지내는 가영을 보고 회사 사람이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강준성이었다. 준성을 소개해 준 사람은 다른 부서 사람으로, 평소 가영과 교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부서 사람들과 조인 회식을 하다가 우연히 나온 소개팅 얘기에 얼떨결에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엉겁결에 만들어진 자리에 나타난 상대가 바로 강준성이었다. 키가 크고 멀끔한 인상의 준성은 가영보다 한 살 위로, 수도권에 위치한 대기업의 한 공장의 시설 관리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준성은 여태까지 가영이 살면서 본 적도, 엮인 적도 별로 없었던 그런 남자였다.
책도 안 읽고, 운동 좋아하고, 차와 드라이빙을 좋아하는 단순한 남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영은 준성이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인 점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졌다. 사실 누군가와 책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른 방면에서 새로운 화제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더 신선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가영이 전날부터 ‘처음 보는 사람과 어떻게 밥을 먹지?’ 라는 생각으로 잔뜩 걱정했던 첫 만남은 걱정이 무색하게 순조롭게 흘렀다. 저녁을 다 먹은 두 사람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대화는 카페의 영업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눈치를 보던 카페 종업원이 테이블에 찾아와 '죄송하지만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라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서야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민망해 하며 밖으로 나왔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진 늦은 시간, 지하철 역 개찰구 앞에서 준성은 가영에게 애프터를 신청했다.
가영은 준성에게 호기심을 먼저 느꼈고, 그것은 이후 호감으로 이어졌다. 준성이 가영에게 느낀 것은 호감이 먼저이고, 호기심이 나중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은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7년을 쭉 만나왔다.
강준성은 박가영에게 있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인생 첫 연애의 대상이자, 아마도 별 이변이 없다면 마지막 연애가 될 대상이었다.
“오느라 고생했네, 얼른 앉아.”
치킨 냄새에 들뜬 준성의 손이 가영의 손에서 치킨을 받아 들었다. 아무리 넓게 봐줘도 실평수가 5~6평 남짓한 비좁은 방 한가운데에 작은 상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준성은 그 위로 치킨 상자를 담은 봉다리를 올려두었다.
신발 세 켤레만 나란히 놓아도 꽉 차는 작은 원룸 현관에 제 신발을 벗고 올라서며, 가영은 보이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평일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즉 일주일에 두 번 만난다. 원래는 일주일에 세 번 만났었지만, 가영이 작년에 이런저런 자기 계발에 미쳐서 데이트 횟수를 줄인 이후 이렇게 됐다. 가영의 자기 계발 방황기는 1년 정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시기가 다 지나간 이후에도 어쩐지 횟수를 원상 복구하자는 말을 하지 않아 어영부영 이렇게 굳어진 것이었다.
그중, 평일의 하루는 모든 것이 무조건 정해져 있었다. 준성의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오직 준성이 피곤하다는 이유에서다.
솔직히 집 데이트까지는 괜찮다. 가영도 애초에 밖에 나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괜히 사람 많고 복잡한 데 다니면서 고생하느니, 집 데이트가 차라리 나을수도 있다.
다만 집 데이트를 할 거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넓고 쾌적한 가영의 오피스텔에서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가영의 집은 준성의 집에서 지하철로 1시간이 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영은 아직도 16년 전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자취하던 동네의 오피스텔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다. 가영의 회사 바로 근처는 월세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집 데이트의 장소는 준성의 자취방으로 고정이 되어버렸다.
교대근무를 하는 준성이 가끔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날도 있다는 것을 아는 가영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늘 양보를 하고는 했다.
문제는 첫 취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준성의 전셋집이 너무도 비좁고 열악하다는 것이다. 가영은 이 문제에 대해 준성에게 몇 번이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오빠, 이사 갈 생각 없어? 너무 좁고, 짐도 많아서 갈수록 불편하잖아.”
“왜? 여기 주인이 얼마나 좋은데. 재계약 때 전세금 안 올리는 주인 흔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보태면 요 앞에 신축이나 오피스텔에서 편하고 깨끗하게 지낼 수 있잖아.”
“뭐 어때, 어차피 집에서는 잠만 자는데. 이사도 귀찮고.”
그리고 준성은 이쯤에서 늘 결정타를 날렸다.
“어차피 너랑 결혼하면 큰 집으로 이사갈 텐데 뭐. 그때까진 좀 대충 살아도 되잖아.”
이 대답은 언제나 가영의 명치에 명중했다.
‘그럼 결혼 전에는 돼지우리 같은 집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살아도 된다는 건가?’
가영은 정말로 답답했다. 마치 가장 기본적인 살림을 포함한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전부 결혼 이후로 유예해두었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그 답답함을 처음 느낀 그 시점 이후로, 그 답답함은 특정 상황마다 선명하게 재생되어 왔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그 중 하나였다. 치킨을 앞에 두고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대환장의 TFT 킥 오프 미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가영에게, 준성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래, 힘들었겠네.”
입으로 쯔왑쯔왑 치킨을 뜯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이 마치 인터넷에서 무슨 ‘여친 고민에 공감하는 척하는 법’이라는 매뉴얼이라도 읽은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고개를 끄덕이든지 치킨을 먹든지 리액션만 하든지 하나만 하지….’
막말로 초심 잃고 동태 눈깔이 된 아이돌도 팬사인회에서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라고만 자동응답하면 바로 태도 논란 생기고 팬들도 탈덕하는데 말이다.
그때였다. 영혼 없는 자동응답기 스타일의 답변에 가영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준성이 갑자기 뭔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주말에 부모님 올라오신대. 누나들이랑 모시고 너희 아버님 가게 갈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가영은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콱 막힌 듯 답답해졌다.
“아, 치킨 진짜 맛있다. 방금 튀긴 거라 그런가?”
“….”
“넌 왜 안 먹어?”
준성이 가영의 앞접시에 닭다리를 하나 집어 놓아주었다. 본인이 방금 전까지 가슴살을 잡고 쪽쪽 빨던 그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너 이 세상에 퍽퍽 살 좋아하는 남자 얼마 없는 거 알지? 가영이 넌 땡잡은 거라고.”
“….”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 건지 모르겠지만, 가영은 굳이 말대꾸를 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지금 입술에 번들거리는 기름을 잔뜩 묻힌 채로 활짝 웃는 준성의 표정이 너무 해맑았다.
그러니까 대충 그런 걸로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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