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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29. 2022

04. 정상인 이상 가족

기분 나쁜 나, 비정상인가요?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04. 정상인 이상 가족



주말 아침이 밝았다. 


 가영은 준성에게 소식을 들은 그날 바로 병호에게 전화했다. 이번 주말에 오준성의 부모님과,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사는 그의 큰 누나와 둘째 누나,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줄줄이 병호의 가게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을.


 병호는 지금쯤 부지런히 가게를 돌아다니며 목을 빼놓고 가영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가영과 함께 등장할 준성과, 준성의 가족을 말이다. 


 이번이 그들의 첫 방문은 아니었다. 가영과 준성이 서로의 가족에게 각각 소개된 이후, 병호가 식당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준성의 가족들은 병호의 가게로 삼삼오오 밥을 먹으러 왔다. 주로 서울에 사는 준성의 누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1년에 한 두 번 정도 준성의 부모님이 상경하는 때에는 이렇게 다같이 병호의 가게에 오곤 했다. 


 준성은 두 사람이 연애한 지 3년 정도 되었을 무렵부터 차근차근 제 식구들에게 가영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첫째 누나에게, 다음에는 둘째 누나에게. 그 다음에는 서울로 딸을 보러 올라오신 어머니에게. 


가영이 준성의 식구들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준성의 아버지였다. 가영은 그를 두 사람의 4주년 기념일 여행차 함께 방문했던 대구의 한 식당에서 소개받게 되었다. 


 막상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준성은 자신의 식구들을 가영에게 소개하는 데 그다지 스스럼이 없었다.

 그에 비해, 가영은 어쩐지 자신의 아버지에게 준성을 소개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냥 항상 마음속 한 구석에 뭔가 꺼려지는 구석이 있었다. 


 준성이 가영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가영은 준성을 처음 만난 소개팅 자리에서 이미 본인이 한부모 가정의 자녀이며, 평범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유치하고 겁에 질린 행동이었다. 


‘이러고도 내가 좋다면 할 수 없지. 네가 알고도 선택한 거니까’


이러한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 지극히 자기 방어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 가영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경이었다. 처음 만난 날 가영이 바로 그렇게 자신의 가정환경에 대해 준성에게 털어놓았을 당시 준성의 반응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미 첫인상에 가영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준성은 가영의 남다른 가정 환경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이 어떠했든 지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대단한데요? 마음이 곧고 단단한 사람 같아요.”


 생각보다 산뜻한 준성의 반응에 가영은 놀랐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연히 가영의 가정환경은 준성과 가영의 연애가 시작되는 데에 어떤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아마 그때 무의식적으로 준성에게 느꼈던 호감이 조금 더 깊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가영은 첫 만남에서의 준성의 태도를 높이 평가했고, 그랬기에 때때로 준성에게서 못마땅한 점을 발견해도 어느 정도 참아주는 부분도 있었다. 그랬기에 지난 7년 동안 가영은 적어도 준성이 그런 부분에서 자신을 못마땅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마침내 긴 고민 끝에 준성을 처음으로 병호에게 소개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영이 처음으로 준성을 병호의 가게에 데려갔던 날. 처음으로 여자친구의 아버지 앞에 선 준성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한 태도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었다. 


 가영이 가게 일을 이것 저것 돕는 동안 준성도 옆에서 제 팔을 걷어 부치고 서빙을 하거나 테이블을 치우곤 했다.  


 병호는 훤칠한 키에 인상도 멀끔한 준성을 보자마자 이미 첫눈에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저렇게 첫만남에 이미 한 식구인 것처럼 싹싹하게 굴기까지 하니 더더욱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가영이 와서 가게 일을 도우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면서, 준성이 조금 가게 일을 도우는 모습을 보고는 기뻐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 날 저녁 가영과 준성을 동네에서 제일 비싼 고깃집으로 데려가 소고기 특수부위를 쏠 정도였다. 


 그래도 가영은 그런 준성이 고마웠다. 그 전에 가영이 준성의 가족들을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뻣뻣하면서도 어색한 태도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했다. 그 날, 가영은 고깃집 자리 한 켠에 앉아 조용히 병호와 준성의 모습을 지켜봤다. 활짝 웃는 낯으로 소고기를 구우며 병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준성의 모습을 보니 문득 그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스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준성의 가족들을 만날 때면 늘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과연 내가 이 집안의 식구가 되어도 좋은 걸까?’하고 긴가민가했던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병호와 함께 있는 준성의 모습을 보면 그런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이런 확신이 생겼다.


 ‘아,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


 가영은 그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날 기분 좋게 취한 준성을 조수석에 태우고 차의 운전대를 잡은 것은 가영이었다. 조수석에 탄 준성은 가영이 차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굳이 창문까지 내려가며 병호에게 헤헤 웃으며 연신 인사했다. 


 “들어가십쇼, 아버님!”


 준성은 아버지와 가게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조금씩 조용해졌다. 이내 차가 외곽순환도로에 접어들었을 때쯤에는 완전히 조용해진 뒤였다.


 아마도 거의 하루 꼬박의 시간 동안을 '만점 짜리 남친' 캐릭터를 유지하느라 적잖이 기가 빨린 모양이었다. 가영은 그런 준성의 모습마저도 고마웠다. 그만큼 노력해줬다는 증거니까. 뻗어 있는 준성에게 가영이 넌지시 물었다. 


"오늘 어땠어?"


 준성이 피곤할 것은 잘 알지만, 그럼에도 가영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사시리 둘 사이에 이 질문을 먼저 한 것은 가영이 아니라 준성이었다. 가영이 마치 도장깨기를 하듯 준성의 식구들을 한 명 한 명 만날 때마다 준성도 가영에게 항상 이렇게 물어보곤 했었던 것이다. 


 "너희 아버님 완전 싸나이 중의 싸나이시던데? 진짜 멋지시더라."


 준성이 병호를 추켜세워주었다. 젊은 시절에 많이 힘드셨을 텐데 그렇게 재기에 성공해서 잘 되는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요새 그렇게 손님이 끊이지 않고 잘 되는 가게가 흔치 않다고.


“내 여자친구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로서도 배울 점이 많은 분 같아.”


혀가 마를 듯한 준성의 칭찬에 가영은 조금 기분이 으쓱해졌다. 


그때였다.

한참을 들뜬 목소리로 칭찬을 늘어놓던 준성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목소리의 톤을 바꿔 말했다. 


"아, 그런데 막상 보니까 조금, 약간 아쉬운 건 있지…"


아쉽다고? 뭐가? 

취해서 중얼거리는 준성의 말을 들은 가영이 의구심에 반문을 하려던 찰나, 준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별 건 아닐 수도 있는데…”


끝으로 갈수록 점점 흐릿하게 풀리는 말투를 보니 생각보다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 살면서 장모님 밥상은 한 번도 못 얻어먹어 보겠구나 … 하는, 그런 거?"


 시속 80 km의 속도로 도로를 정속 주행 중이던 가영은 그 말에 하마터면 끽-하고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대신 가영은 룸미러를 통해 옆에 의자를 잔뜩 뒤로 젖히고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준성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뽀득하고 힘이 들어갔다. 


 ‘장모님 밥상이 뭐 어쩌고 저째?’


 직전까지 그의 입으로 들어간 소고기는 다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1++ 등급의 소고기로도 정녕 그놈의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장모님’이 잡아주는 씨암탉은 이길 수 없는 것인가?


 당황스러움에 말문이 막힌 가영은 이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버럭 화를 내면, 상대가 그냥 생각 없이 던진 가벼운 농담에 과민반응을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가영은 애써 이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됐어, 별 의미 없이 한 말일 거야. 애초에 강준성이 그렇게 생각이 깊은 놈도 아니고.’


 가영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술에 취한 준성은 차게 식은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코를 드르렁 골며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이후 1시간 여의 길을 혼자 운전하면서, 가영은 역시 준성과의 결혼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대략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그 날의 기억과 준성의 대사, 그 대사를 듣고 가영이 느꼈던 감정 등등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쩐지 좀처럼 잊혀지거나 흐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가영의 머릿속에서는 선명한 기억이지만, 정작 준성은 본인이 그날 술김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준성은 명절 전후나 누나들이 올 때면 그 때마다 가영과 함께 병호의 가게를 찾았고, 병호 앞에서 늘 최선을 다하며 예비 사위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 날, 차 안에서 준성이 무심코 던진 말에 식어버린 가영의 마음 일부는 어쩐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가영은 언젠가 그 날 그 순간을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화를 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



“안녕하세요~ 가영이 아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셨죠?”

“아이고, 오셨어요?”


 준성의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가게에 들어서자, 그날따라 홀에 나와 왔다갔다 하고 있던 병호가 대번에 나와서 준성의 가족을 맞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오랜만에 올라와서 저희 손주들도 보고, 같이 밥도 먹는 김에 겸사겸사 이렇게 아버님 얼굴도 뵈면 좋잖아요, 호호.”


 병호는 그렇게 준성의 어머니와 가볍게 입구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준성의 식구가 먼저 가게 내부로 들어오고, 가영이 뒤늦게 준성과 함께 들어왔다. 병호는 준성을 보자마자 손을 덥석 잡으며 크게 반가워했지만, 가영하고는 가벼운 목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그러더니 병호는 미리 비워뒀던 단체석으로 준성의 식구와 가영을 안내했다. 


 4인석 테이블과 6인석 테이블을 붙여 만들어 둔 단체석에 10명이나 되는 준성의 일행이 자리를 잡았다. 병호는 그때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아예 직원들을 테이블 근처로는 오지도 못하게 하고 본인이 직접 고기며 셀프 뷔페에 있는 반찬을 부지런히 가져다 날랐다. 가끔씩 가게에 오는 덕분에 가게 돌아가는 사정에 능숙한 준성이 일어나서 반찬을 가져오려고 하자, 병호가 준성을 저지하며 말했다.


“자네는 앉아 있어, 나랑 가영이가 할 거니까.”


  병호의 말에 가영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호와 함께 반찬 뷔페 코너에 가서 이것저것 퍼다 자리로 나르기 시작했다. 


 병호의 식당은 병호가 직접 개발한 레시피의 양념으로 구운 석쇠 불고기를 메인 메뉴로 내세우고 있었다. 병호가 근수의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주방 한켠에서 틈틈이 개발한 오리지널 레시피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병호가 예전에 고향에서 먹던, 돼지 삼겹살을 얇게 저며 짭조름한 양념에 재워 석쇠에 끼워 대충 구워 먹던 그 맛을 재현한 것이었다. 일전에 한 방송에 모 연예인이 찾는 ‘찐 맛집’으로 소개된 이후에도 몇 번 더 크고 작은 방송을 타면서, 이제는 주말이 되면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한번 먹어보려고 올라오는 맛집이 되었다.


 그렇지만 석쇠 불고기만을 전문으로 하는, 다른 식당에 비해 메뉴판이 비교적 단촐한 이 식당에 단골이 바글거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병호가 이 식당에서 석쇠 불고기 레시피 다음으로 가장 공을 들인 반찬 뷔페 덕분이었다. 가게 한가운데에 위치한 반찬 뷔페에는 매번 12가지가 넘는 다채로운 반찬들이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석쇠 불고기 정식을 주문하는 손님들은 누구나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그 뷔페는 날마다 한두 개씩 주력 메뉴가 바뀌었다.


 이것은 병호 본인을 위한 취미생활 겸 자기 계발로 시작한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몇 년 동안 석쇠 불고기 하나만 팔다 보니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이렇게 사이드 메뉴에서 다양한 변주를 주면서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반찬은 낙지볶음이었다. 뷔페에 내놓기에는 단가가 꽤 비싸서 별로 자주 하지는 않는데, 보아하니 준성의 식구들이 해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둔 것이 틀림없었다. 병호는 커다란 접시 위에 새빨간 낙지볶음을 산처럼 쌓아서 연신 배달하면서 준성의 가족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물었다.


“맛은 어떠세요? 부족한 건요? 혹시 불편한 건 없으신지 모르겠네요. 뭐 더 갖다드릴까요?”


그런 병호의 태도에 가영은 어쩐지 덩달아 긴장되고, 정신이 사나워졌다. 급기야는 입맛도 없어졌다. 그러나 테이블 구석탱이에 앉은 가영이 뭘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은 이미 병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반면, 준성의 식구들은 말로는 ‘아니에요’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는 시늉 한 번 하지 않으며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병호는 그 모습에 안심하는 것 같았다. 


 식사가 다 끝난 뒤, 병호와 가영은 준성의 식구들을 인근에 새로 오픈한 으리으리한 대형 베이커리 카페로 데려갔다. 준성의 누나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카페에 딸린 넓은 정원을 좌우로 가로지르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가영은 준성의 가족들에게 빵과 음료를 사서 안기고, 사진을 찍어주고, 잠시 대화를 했다. 계산은 모두 병호가 했다.  


 점심 피크 시간에 병호의 가게에 들이닥쳤던 준성의 식구들은 카페의 테라스에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주말이라 장사가 바쁘셨을 텐데, 저희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래 있다 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에요. 가시기 전에 잠시 저희 가게에 들렀다 가시죠. 제가 불고기 좀 싸놨어요.”

“어우, 아니에요. 오늘도 덕분에 너무 잘 먹었는데…”

“제가 주방에 이미 다 싸놓으라고 했어요. 꼭 가져가셔야 합니다.”


 잠시간 형식상의 실랑이를 한 끝에, 결국 준성의 식구들의 손에는 주렁주렁 석쇠 불고기와 반찬 뷔페에서 잔뜩 퍼담은 반찬들이 들렸다. 아마 각 가족 별로 이틀 정도는 반찬이든 뭐든 안 해도 될 것이었다.


“잘 먹고 가요.”


 봉지의 사이즈를 보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단지 석쇠 불고기 하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끊어질 듯한 손잡이를 보니 뷔페에 있는 12첩을 반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준성의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묵직한 비닐봉지 여러 개를 트렁크에 실었다. 조수석에 타기 전, 준성의 어머니가 병호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저희, 정식으로 상견례 자리에서 뵙죠.”


 상견례. 그 말이 뭐라고, 병호가 뭔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영은 옆에서 그런 병호의 표정을 보며 깜짝 놀랐다. 병호가 60세를 넘긴 직후부터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며, 드라마를 보며 슬쩍슬쩍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저 말 어디에 이렇게까지…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처올릴 정도의 트리거 요소가 존재한단 말인가?


 준성의 식구들을 먼저 그렇게 모두 보낸 다음에야 준성도 자기 차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 


“가영아, 우리도 가자.”


그러나 가영은 차에 타지 않고 가만히 고개만 좌우로 저을 뿐이었다.


“오빠 먼저 가. 나 아빠랑 얘기 좀 하고 갈게.”

“그래? 기다려도 되는데.”

“아니야, 좀 걸릴 것 같아. 먼저 가서 푹 쉬어.”

“알았어. 이따 집 들어가면 연락해” 


준성은 그렇게 인사한 뒤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준성의 차가 도로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가영은 다시 가게 안에 있는 병호에게로 향했다. 병호는 가영이 혼자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혹시 오늘 자신의 헌신적인 접대(라고 밖에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에 뭔가 잘못된 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가영에게 빡침과 위화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가영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병호에게 다짜고짜 화를 냈다.


 “아빠. 대체 왜 맨날 저 집 식구들에게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는 거야? 뭔 죄 지었어?”


 가영의 말에 병호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헌신에 헌사를 바치며 ‘역시 우리 아빠 최고!’라고 고마워할 줄 알았던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의 힐난이었다. 예상치 못한 딸의 반응에 마치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잠시 얼얼한 표정을 지은 병호가 뒤늦게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너 이제 시집가면 저 집 식구 될 텐데, 미리미리 잘 보여둬야지!”

“맨날 올 때마다 자꾸 가게 살림 다 털어주고! 밥값 안 받는 건 그렇다 쳐도 매번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주기까지 해? 완전 오바야."


 가영은 말하면서 점점 더 화가 났다. 지금 눈앞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병호의 모습이 어쩐지 서럽기도 했다. 


"어쩌다 한번 그러면 몰라, 매번 자꾸 이러면 저기서도 고마워하지도 않아. 당연한 줄 안다고!”

“딸은 하늘에서 준 손님이야. 곱게 모시다가 보내는 게 내 의무지. 근데 내가 너를 엄마 없이 키웠잖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해도 저 집에서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어.”


 또다. 매번 가영을 빡치게 하는 저 놈의 ‘딸 = 출가외인’ 레파토리. 


‘아니 지금이 대체 무슨 조선시대냐고요.’


 2000년대에 접어든 이후로도 심지어 20년은 더 지났는데.


 병호의 답답한 반응에 가영은 아까부터 도통 내려가지 않던 체증이 더 심화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것은 아까 준성의 식구가 가게에 들이닥친 순간부터 쭉 마음 속에 묵직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가영은 왜 병호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다, 박병호와 박가영이 부녀로 살아가는 모습이 남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박가영은 엄마 없이 컸다. 그리고 아빠 손에도 크지 않았다. 


 박병호가 지금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박병호 스스로 느끼기에 이런 상황이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호는 가영을 그런 환경에 방치한 스스로를 떳떳한 부모로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병호는 준성이 '정상'적인 형태의 가족 구성원을 데리고 들이닥쳐 메뚜기떼처럼 가게를 뜯어먹어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쪽은 정상이고 우리는 비정상이니 우리가 꿀리는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그쪽은 슈퍼 갑이고, 우리는 슈퍼 을인 셈이었다. 


 가영은 그런 병호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됐다. 가영이 엄마가 없이 큰 게 그렇게 큰 잘못인 걸까?박병호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준성의 집 식구들 중 그 누구를 갖다 대더라도 그보다는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고 살고 있으며, 실제로는 어느 모임 자리에 가도 리더 역할을 하는 인싸의 삶을 누리고 있엇다. 그런 인간 박병호가 대체 뭐가 모자라서 매번 저렇게 준성의 식구들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어 벌벌 기는 것이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영에게 무슨 인간으로서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록 부모의 보호 없이 크긴 했지만, 가영이 살면서 무슨 문제를 일으킨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오히려 엄마, 아빠가 없이도 혼자 착실히 공부해서 인 서울 4년제 대학에 진학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서 제 밥값은 하며 잘 살아가는 가영의 모습을 아버지로서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똑 부러진 애가, 심지어 집안의 재산만 따지고 보면 그쪽보다 더 잘 사는 애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기에다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미래의 시댁이 될 존재에게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마치 로비를 하듯이 지극정성을 기울인 다음에 바쳐져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결혼이라는 것이 두 가정의 결합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쪽이 이렇게까지 굴욕적이어야 하나? 


 가영은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어찌 보면 세상에는 형태만 정상이지,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상 가족들보다 더 이상한 가족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가영과 병호가 오랜 세월을 버텨내며 이뤄낸 이상 가족은 비록 그 형태는 이상할지언정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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