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I Have a Dream)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팀장님,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이세요?”
[MD님 퇴사하시고 한동안 연락 못 드렸잖아요. 곧 연말이기도 하고, 한 번 생각나서 안부 인사차 전화드렸어요.]
가영은 기분이 묘해졌다. 오랜만에 이 팀장의 목소리를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 쌩얼에 추리닝 반바지를 입고 있는 이 박가영은 이래봬도 불과 두 달 전까지 국민서점에서 현역으로 일하던 MD였던 것이다. 정작 가영은 백수의 삶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 사실을 가끔 까먹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게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그러니까요.]
이 팀장은 씁쓸한지 살짝 한숨을 쉬었다.
[MD님은 요새 뭐 하고 지내세요?]
“저요? 그냥 좀 쉬고 있어요.”
[그래요? 퇴사하신 지 벌써 꽤 되셨잖아요.]
“네, 근데 뭐 아직 좀 더 쉬려고요. 곧 연말이기도 하고.”
간단히 안부 인사를 교환한 이 팀장이 마침내 오늘 전화의 진짜 용건을 꺼냈다.
[MD님, 시간 괜찮으시면 다음 주 쯤 한번 저희 회사 근처로 놀러오실래요? 제가 커피 살게요.]
***
12월 마지막 주. 가영은 아버지 집으로 이사한 이래 거의 최초로 얼굴에 비비크림을 찍어 바르고 서울에 나왔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곳은 합정에 있는 M출판사 바로 근처에 있는 카페였다.
가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페 구석 창가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가 가영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MD님, 이 쪽이요! ”
가영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자신을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좌우로 흔드는 이 팀장을 발견하고는 바로 그쪽으로 다가가 맞은편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이 팀장님, 완전 오랜만이에요!”
“그러니까요! 잘 지내셨어요?”
“아니에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저야 뭐 사무실이 바로 요 앞인데요 뭐. MD님, 뭐 드실래요?”
두 사람은 가영의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다시 함께 카운터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며칠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카페에는 아직 캐롤 분위기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길거리에 온통 연말 분위기가 넘실넘실 흘러 넘쳤다.
곧이어 가영이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두 사람은 앉아서 한동안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이 팀장의 회사에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 했다.
“사실은 저희 작년부터 장르소설 쪽 매출이 꽤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서요. 내년 초에 웹소설 사업부를 따로 분사하려고 해요.”
“진짜요? 팀장님도 거기 가시는 거예요?”
이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사하면서 IP사업을 전담하는 조직을 신설하려고 하는데, 제가 그 쪽을 담당하게 되었거든요.”
“와, 팀장님! 완전 잘된 거 아니에요? 축하드려요!”
가영은 기쁜 표정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자, 이 팀장이 멋쩍게 웃었다.
“잘 모르겠어요. 저도 IP 쪽은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공부만 엄청 하는 중이에요.”
“팀장님은 뭐든지 잘 하실 거예요.”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저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긴 해요.”
가영의 칭찬에 이 팀장은 얼굴을 붉혔다. 조금 쑥쓰러운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진심으로 이 일을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듯 했다.
“저도 10년 넘게 계속 영업팀에만 있어서 그런지 살짝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때마침 이런 기회가 생긴 거죠. 회사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하고요.”
“그럼 이제 승진하시는 거예요?”
“일단 새로 나올 명함에는 ‘본부장’으로 직함을 넣긴 했어요.”
“와!! 그럼 이제 본부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MD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직 명함도 안 나왔는데요.”
이 팀장의 말에 가영은 왠지 기분이 미묘해졌다. 두 사람은 각각 국민서점의 MD와 출판사의 영업 담당자로 처음 만나 오랜 시간을 교류해 왔다. 그러다 가영은 퇴사했고, 이 팀장은 이제 팀과 소속을 옮겨 신생 회사의 본부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호칭은 가영이 국민서점을 떠나기 직전의 시간대에 그대로 멈춰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묘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 만나더라도. 가영에게 이 팀장은 ‘이 팀장님’인 걸까? 가영은 언제까지고 ‘MD님’인 거고?
가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 팀장이 물었다.
“그래서, MD님은 요새 정말 그냥 쉬시는 거예요? 별다른 건 안하시고요?”
‘어…. 이런 질문. 예상한 질문인데도 좀 난처한데.’
가영은 살짝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요즘 하고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밥 먹고, 영화 보고, 똥 싸고, 책 보고, 또 밥 먹고, 그러다 자는 것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자신의 현실을 이 팀장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가영에게 있어 이 팀장은 직장 생활을 하다 만난 몇 안되는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이 팀장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 팀장이 이젠 더 이상 서점 MD가 아닌 자연인이자 백수인 가영에게도 연락해서 이렇게 얼굴 보고 안부도 나누고 있겠는가?
가영은 이 팀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영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저 요새 그냥 공부하고 있어요.”
“공부요? 어떤 거요?”
“어… 그러니까, 음… 시나리오랑 스토리텔링 쪽이요.”
가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뻔뻔하게, 이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화 보고, 소설책 보고. 이런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미래의 자산이 되긴 할 테니까.
“어머, 정말요?”
그러나 이 팀장은 그런 가영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이 팀장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왜요? 시나리오도 한 번 써보시게요?”
“어… 그게 딱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혹시 배워두면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한 번 거짓말하기가 힘들었지, 막상 운을 떼니까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가영은 보이지 않게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연신 ‘선의의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되뇌었다.
그런데 이 팀장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마침 너무 잘 됐네요.”
“…네?”
가영은 순간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팀장은 지금 이 상황을 진심으로 반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가영이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팀장에게 좋을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은 말이죠. 저 오늘 MD님한테 제안 드리려고 뵙자고 한 거예요.”
“…네??”
‘제안이라니?’
가영은 눈을 멀뚱하게 떴다.
“MD님, 저랑 같이 콘텐츠 IP 쪽 담당자로 일해 볼 생각 없으세요?”
“아…. 혹시 지금 구인 중이신 건가요?”
“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분사해 나가면서 처음 생기는 팀인지라 인원이 좀 많이 부족하거든요.”
가영은 얼떨떨한 기분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MD님 의향을 먼저 여쭤봐야겠지만,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게 MD님이었어요. 소설 분야 MD로 오래 일하시기도 했고, 평소에 이런 저런 분야에 관심도 많으시잖아요. 그러니 이 쪽 분야 일도 잘 맞으시겠다 싶어서요.”
“그렇군요….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영의 얼굴이 쑥스러움에 조금 붉어졌다. 2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커리어고 뭐고 다 집어치우겠다고 ‘다있소는 항상 사람을 뽑는다!’, ‘여차하면 다있소!’ 뭐 이런 염불이나 외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물론, 가영의 퇴사 소식이 온 업계에 알려졌을 때, 은근슬쩍 이직을 권유해 온 출판사들이 몇 군데 있긴 했다. 그 때마다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당분간은 좀 쉬고 싶다’는 매크로 답변으로 칼같이 거절했지만 말이다.
“솔직히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조심스럽긴 해요. 당장 조직장인 제가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고 당분간 삽질도 많이 할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늘 하던 책 판매에서 벗어나 이렇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보는 건 분명히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만큼 MD님도 관심이 있을 수 있을 듯해서 한 번 말씀드려보고 싶었어요.”
이 팀장의 말투는 진중하면서도 의욕이 느껴졌다. 그녀가 가영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이 자리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한 65% 정도는 긍정적인 쪽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온 것 같았다 .
그런 이 팀장의 희망찬 눈동자를 눈앞에 둔 가영은 지금 진심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퇴사한 지 두 달째.
아직은 뭐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놀고 있다.
근데, 노는 게… 너무 좋다.
일부 직장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주말이나 휴가가 좋은 이유는, 그것이 가끔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
요컨대, 휴일에도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영도 처음 퇴사를 감행하기 전, 그 부분을 좀 걱정하긴 했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가영의 인생에 이렇게 아무 할 일 없이 '통째로 비어 있던' 시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착실한 모범생으로 살았던 가영의 삶은, 8살 이후 거의 27년 동안은 평일에 학교에 가거나 출근하는 것이 당연했던 일생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시간 자체가 얼마 안 가 질리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계속 놀다 보면 지겹지 않을까?
내가 잘 놀 순 있을까?
그래도 한 한 달까지는 괜찮겠지?
솔직히 두 달 정도 되면 슬슬 지겹지 않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제 놀았는데 오늘도 또 놀고 내일도 또 노는 하루하루는…정말 좋았다.
매일매일이 너무 새롭고, 짜릿했다.
가끔은 이런 생각까지 들어 억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뭐야, 이 좋은 걸 나만 모르고 살고 있었잖아 ?'
적어도 가영에게는, 휴일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영은 지금 눈 앞에 둔 이 상황이 몹시 난처했다.
‘어떡하지? 난 좀 더 놀고 싶은데….’
그렇지만 가영은 차마 그 순도 100%의 진심을 입 밖으로 곧이 곧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건 이 팀장님에게 인간적인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떠세요?”
가영에게 그렇게 물어오는 이 팀장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것 같았다. 그녀는 가영이 잠시 갈등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가영이 만약 입사를 하게 되면 맡게 될 포지션과 업무 설명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가영은 순간, 정말로 미안해졌다.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에 대고 어떻게… 자신이 감히…
‘전 아직 덜 놀았어요. 회사 일…하기 싫어요….’
라는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영은 또 한 번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그렇지만, 양심상 아까처럼 약간의 진실은 섞었다.
“팀장님, 제안은 정말 감사한데요. 사실은 제가…”
가영은 그렇게 이 팀장을 붙들고 아까 전의 간단한 근황 토크에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 팀장의 권유대로 M출판사의 단편 소설 공모전에 실제로 작품을 응모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공모전에 작품을 응모했던 감정적 배경. 과거에 2차 창작을 즐겨했었다는 이야기.
사실, 이 팀장은 가영의 아이돌 팬픽을 꽤 여러 편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놀라워 하진 않았다. 그들은 비록 업무 관계로 만나긴 했지만 가끔씩 식스틴즈 이야기를 나누는 덕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영의 감정에 뭔가 동요가 일어났다.
“그런데, 그 거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소설을 쓰는 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물론 그 시작은 처음에는 분명 이 팀장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선의의 거짓말’이었지만….
갈수록 말하다 보니까, 가영도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팀장에게 털어놓고 있는 그녀의 스토리가 정말로 가영의 진심인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운 좋게 자리에 앉으면 떡실신하기 바빴던 저였는데, 공모전 준비하는 기간에는 정말 모든 시간을 쥐어 짜내서 소설을 썼어요. 그렇게 틈틈이 조각조각 쓴 글들을 집에 들어가서 짜 맞추고 배열해서 다시 정리하고.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채워가다 보면 새벽 2, 3시가 다 되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어요.”
분명 처음에는 선의의 거짓말을 위해 약간의 진심을 섞으려 했을 뿐인데… 어느샌가부터 가영은 당시 느꼈던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 팀장의 제안에 대한 100% 진실한 답은 아니더라도, 그녀의 진심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제출은 했는데,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회사에 생각이 미쳤구요. 제가 회사를 다니면서 뺏기는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시작된 가영의 진심 토크는 결국, 이런 감동적인 결론으로 막을 내렸다.
그녀의 퇴사는 사실 ‘한 번쯤은 제대로 된 소설을 본격적으로 써 보고 싶다는 풍운의 뜻을 품고 인생 중반에 선택한 중대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팀장은 가영이 말하는 동안 한 번도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영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래서 가영은 조금 더 자신의 선의의 거짓과 진심 그 사이의 어딘가에 좀 더 깊이 심취한 채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가영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 팀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랬군요…. 설마 MD님한테 그런 꿈이 있었는 줄은 몰랐어요.”
“사실 팀장님이 공모전 얘길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도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 상황에 어떻게든 A4 20장을 써내서 제출한 게 대단한데요?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떨어지긴 했지만요.”
가영은 쑥스러움에 가만히 얼굴을 붉혔다.
“음, MD님께 그 공모전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저잖아요?”
“네, 그렇죠.”
“그건 제가 예전에 웹진에서 봤던 MD님의 글을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에요. MD님이 이번 공모전에 냈던 소설은 못 봤지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팀장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좀 황당할 수도 있었다. 이직 제안을 하러 나왔는데, 상대가 갑자기 ‘난 꿈이 있어요’라고 외치는 꼴 아닌가. 그것도 마치 뜬구름 잡듯이 말이다. 심지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지금 이 팀장이 가영에게 건넨 것은 현실을 깨우치게 만드는 냉정한 말이 아닌 따스한 격려와 응원의 말이었다. 그녀는 지금 가영의 심정을 온전히 헤아려 준 것이다.
그래도 그녀 입장에서 보면 인재 영입이 물건너간 것은 맞았다.
그 사실이 좀 허탈하긴 했던 듯, 이 팀장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 근데 너무 아쉬워요. MD님이 제발 ‘콜!’해주길 바라면서 나왔거든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사실, 욕심 같아서는 저희 회사 다니면서도 소설 쓸 수 있지 않을까 권하고 싶은데…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보면 거짓말로라도 오란 소리를 못 하겠네요.”
“힘내세요. 잘 헤쳐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가영의 걱정어린 말에 이 팀장은 활짝 웃어 보였다.
“전 괜찮아요. 바쁘고 힘들겠지만 새로 해 보는 일이라 기대도 많이 되고요.”
“정말요?”
“그럼요. 맨날 익숙하고 똑같은 일만 하면 발전이 없으니까요. 전 어떻게든 해낼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이 팀장의 안색을 보니 다행히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두 사람 다 번갈아 가며 진심을 털어놓은 자리가 되었고 분위기는 꽤나 훈훈해졌다.
가영은 진심으로 이 팀장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갖고 있는 프로 의식과 자부심에 감탄했다. 비록 자신은 이 팀장처럼 일에 진심이 되진 못했지만,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그녀의 롤모델은 언제까지나 이 팀장이었을 것이다.
‘국민서점이라는 회사가 없었다면, 아마 이 팀장님 같이 좋은 분도 만날 수 없었겠지?’
그렇게 가영은 퇴사 후 처음으로 국민서점의 긍정적인 측면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퇴사하고 나서 한동안은 국민서점의 안 좋은 부분만 생각했었는데. 마치 안 좋게 헤어진 전 애인처럼 말이다.
‘이런 게 바로 추억 보정이라는 건가? 하여튼.’
그때였다. 서로 그렇게 '저희 내년에도 힘내요!' 하고 부둥부둥해주고 있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 팀장이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 MD님. 혹시 웹소설 쪽은 관심 없으세요?”
“웹소설이요?”
“네.”
"어떤 건지는 대충 아는데… 읽어 본 적은 없어요."
"그래요?"
가영의 말에 이 팀장은 제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조작하더니 가영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가영이 일하던 국민서점의 온라인 서점 메인 화면 같기도 하고, 커뮤니티 포털사이트 같기도 한 사이트가 하나 떠 있었다. 사이트 최상단에는 '텍스피아'라는 이름이 크게 쓰여 있었다.
"이런 데 연재하는 소설인데요. 요새 플랫폼들이 웹소설 때문에 다들 아주 난리거든요."
"그래요?"
그러면서 이 팀장은 몇 가지 성공한 웹소설의 예시를 몇 개 알려주었다. 그중에는 가영이 지난주에 왓플릭스로 뽀갰던 웹드라마 원작 소설도 있었다. 가영이 호응하며 관심을 보이자, 이 팀장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요새 웹소설이 진짜 잘 나가거든요. 저희 장르소설 쪽 작가도 대부분 이 무료 연재 사이트에서 발굴해요.”
“그렇군요….”
"하여튼 이 시장이 요새 돈 오가는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제가 앞으로 맡아서 할 일도 거의 이 쪽이고요. 한동안은 주로 장르 웹소설 원작 발굴해서 출간하고 2차 웹툰화하면서 수익 내는 구조로 굴리려고요.”
“기왕에 MD님이 글 쓰고 싶다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웹소설 한번 연재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냥 경험 삼아서 하는 셈 치더라도요.”
이 팀장은 꽤 진지하게 가영을 설득했다. 솔직히 일반 소설 등단은 바늘구멍에 소를 통과시키는 것 같이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그것 보다는 웹소설을 쓰면서 글 쓰는 연습도 해보고, 자신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웹소설은 누구나 오늘 당장이라도 써서 올려볼 수 있는 대중소설이기 때문이다.
“일반 소설도 좋지만 웹소설이야 말로 잘 써서 IP 한번 터지면 웬만한 회사원들보다 훨씬 잘 버는 것 같아요. 드물긴 하지만 평생 연금 급으로 수익이 꽂히는 작품도 더러 있는 것 같고요.”
“그렇군요.”
“더군다나 MD님 전에 2차 창작도 했었다고 했죠? 그럼 오히려 더 도전해볼만 해요. 그러면 글 쓰는 방식이 웹소설에 오히려 더 적합할 수도 있거든요.”
이 팀장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하긴, 가영이 옛날에 썼다가 지금은 픽션타입에 백업 겸 올려둔 그 팬픽들도 따지고 보면 일반 소설보다는 웹소설 스타일에 더 가까울 것 같긴 했다.
“정말 그럴까요?”
퇴사 2개월 차, 깜깜했던 가영의 마음 한 구석에서 자그마한 불이 밝혀졌다. 이 팀장이 붙여 준 그 불씨는 조금씩 조금씩 크기를 키우며 점점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그럼요. MD님은 워낙에 트렌드를 캐치하는 센스도 좋으니까. 이렇게 유명한 웹소설 플랫폼들 베스트에 있는 것들 한번 쭉 읽어보고, 스타일 공부해보고 쓰면 재미있게 잘 쓰실 것 같아요.”
업계 관계자로서, 이제는 지인이자 인생 선배로서 가영에게 권하는 이 팀장의 목소리는 굉장히 진지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가영은 덜컥 마음을 먹어버렸다.
그래, 일반 소설은 모르겠지만, 웹소설이라면…
2차 창작을 하던 스타일대로 한번 써본다면, 어쩌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웹소설을 써보자.’
방황하던 가영에게, 이정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
그날 저녁.
해가 지고 나서 거리로 쏟아져 나올 연말의 인파를 피해 일찍 자리를 파한 가영은 병호가 퇴근할 즈음엔 이미 싹 씻고 다시 예의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박가영은 오늘 나름대로 제 인생의 중대 결심을 했지만, 그녀가 외출했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병호에게는 그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가영은 평소처럼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보일러는 빵빵하게, TV는 굳이 켜놓은 상태로. . 핑크색과 검은색이 스트라이프로 교차되어 있는 강렬한 색감의 책 표지에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오늘따라 가영은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병호가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 흘끗 돌아보지도 않았다.
원래 평소에도 병호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올 때 쯤엔 박가영은 영양가 있는 짓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긴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병호의 눈에는 그런 가영의 모습이 뭔가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병호는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서 가영이 누워 있는 3인용 소파 옆에 붙어 있는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제서야 가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병호를 쳐다봤다.
“어, 왔어?”
그 뿐이었다. 가영은 다시 시선을 흘끗 내려 펼쳐진 책을 바라봤다. 아버지를 봤다고 몸을 일으키지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병호는 애초에 기대도 안했음에도 막상 그 꼴을 보니 보기만 해도 한숨이 푹푹 나오고 울화가 치솟았다. 병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앞으로 대체… 뭘 해서 먹고 살 생각이냐?”
가영은 책을 탁 덮었다. 한숨과 섞여 나온 병호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것 같았다.
그녀는 덮은 책을 옆으로 치우며 흘끗 병호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쭉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전신이 다 찌뿌드드한 듯했다.
“아 너무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나야말로 허리가 아프다….’
병호는 그렇게 말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플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병호는 요즘 체력적인 한계를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든든한 오른팔 같던 베테랑 5년 차 홀 매니저가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당장 새 직원을 구해야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연말이라 식당의 일손 수요가 몰려서인지 하루 일당을 15만 원 넘게 불러도 파출이 배정되지도 않았다 .
막상 힘들게 파출 알바를 배정받는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바뀌는 알바들에게 가게 돌아가는 시스템을 알려주고 교육시키는 것도 일이었다. 아무리 꼼꼼하게 주의시켜도 꼭 하루에 한두 번씩은 주문 실수가 발생하거나 테이블에 음식이 잘못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수습은 온전히 사장인 사장인 박병호의 몫이었다.
결국 최근 병호는 직원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홀과 주방을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뿐인 딸년은 그저 태평하게 밥 먹고 똥만 싸는 기계가 되어 소파와 저렇게 한 몸처럼 붙어있다. 자신은 매일매일 이렇게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오는데 말이다.
병호는 더 뭐라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말해봤자 병호의 목소리만 씁쓸해질 것 같았다. 괜히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가영하고 입씨름할 시간에 그냥 씻고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더 자며 기력을 보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니, 그렇잖아도 나 하고 싶은 게 하나 생기긴 했는데.”
가영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병호가 반색했다.
“뭐라고?”
“생겼다고, 하고 싶은 일.”
‘신이시여!’
박병호는 무교였지만 순간 신에게 감사했다.
지금 가영이 한 말은 그녀가 이 집에 쳐들어온 이래 한 말 중에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게… 그게 대체 뭔데?”
병호는 이 희소식에 기쁜 마음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자꾸만 심장이 벌렁거리고, 입꼬리가 씰룩씰룩 위쪽으로 경련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박병호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소설 쓸 거야.”
순간, 병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뭐?”
“소설 있잖아. 사람들 읽는 거. 그런 거 쓸 거라고.”
그러면서 가영은 빠르게 웹소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번뜩거리는 눈빛으로 호소하는 그 모습이 마치 ‘웹소설이 미래다!’라는 프로파간다 배너라도 몸에 두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실 그 주옥같은 설명들은 대부분 그녀도 오늘 이 팀장과의 미팅에서 막 줏어들었던 내용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녀는 웹소설이 잘만 되면 웹툰 화도, 드라마화도 될 수 있다는 내용을 특히 강조했다.
“그, 아빠가 보던 드라마 있잖아. 샛별이 나오는 거. 그것도 웹소설 원작이래. 대박이지?”
가영이 늘어놓는 말을 듣는 내내 병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이 한층 짙어지고 있었다.
사나이 박병호, 살면서 웬만한 일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아왔건만…
지금은 … 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
병호는 참담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설을 쓴다고? 그런 건 네가 할 게 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병호의 말에 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병호는 그런 가영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 사람은 다 자기 길이 있다는 소리야. 네가 소설가로 성공할 거였으면 이미 어릴 때 성공했어야지.”
“…”
“예술가는 뭐,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잘 다니던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팽팽 놀더니,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야?”
가영은 병호가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잔소리가 한 줄 한 줄 마음에 안 드는 듯이 입술을 꾹 문 채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제발 좀 더 늦기 전에 정신 좀 차려. 막말로, 네가 낼모레 마흔인데 꿈은 무슨 꿈이냐고.”
그때였다. 내내 입술만 삐쭉 내밀고 앉아 있던 가영이 팩 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아직 마흔 아닌데.”
“그게 그거지!”
“아닌 것 같은데. 5년이면 차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
“뭐?”
“그리고…”
가영은 병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빛이 새삼 반항적이었다.
“마흔도 꿈꿀 수 있는데.”
‘아이고….’
병호는 제 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