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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l 31. 2022

12. 안 되는 게 디폴트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12. 안 되는 게 디폴트



 그렇게 무작정 집에 쳐들어온 가영은 놀랍도록 빠르게 이 집에 적응했다.


 문제는 오히려 병호였다. 병호는 매일 저녁 9시 무렵, 직원들에게 마감을 맡기고 먼저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매일같이 보이는 이 풍경이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바로 자기 집 거실 소파에 쌩얼에 반바지를 입고 앉아 TV를 보고 있는 가영의 모습이었다.


“왔어?”


 삑삑 거리는 도어락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가영은 그냥 병호가 들어선 현관문 쪽을 슥 한번 보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가영이 보고 있는 TV 화면은 그때그때 달랐는데, 드라마일 때도 있었고 영화일 때도 있었고 무슨 정신 사나운 아이돌 가수 무대일 때도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에 빠졌는지, 주구장창 틀어 주는 재방송을 홀린 듯이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의 박가영은 마치 무슨 최면에 걸린 것처럼 TV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병호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병호는 명치가 꽉 조일 듯이 답답해졌다.


 ‘대체 보일러는 왜 이렇게 빵빵하게 틀어놓은 거야?’


 저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꼴을 보아하니 오늘도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간 것 같았다.

 벌써 한 달 째였다. 가영이 이 집에 들어온지도. 어영부영 있다 보니 어느덧 올해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병호는 이 현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TV 화면에 빨려들어갈 듯이 시선을 고정한 30대 중반 딸래미의 뒷모습을 보면서 병호는 한숨을 쉬었다. 

쟤는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살 셈인가?

처음에 병호는 닥친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내 딸이 이럴 리가 없어.’


가영과 같이 살기 시작한 그 주, 초창기의 병호의 머릿속은 오직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평소 병호는 어디 가서 대놓고 자식 자랑을 하는 그런 스타일의 부모는 아니었다. 오히려 딸을 깎아내리면서 겸손을 떠는 스타일이었다. 


‘제 딸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고, 철도 덜 들었죠. 얼른 시집가야 할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병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제 딸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도 혼자서 학교도 잘 다니고, 성적도 잘 받고, 대학도 알아서 잘 가고 취업도 해서 10년 넘게 회사도 문제없이 다녔지 않았나.


 끼고 살아도 속 썩이는 자식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그에 비하면 박가영은 훌륭한 딸이었다. 비록 아직 시집을 안 가긴 했지만, 뭐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렇게 다 내려놓고 그의 집으로 기어들어오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병호는 현실을 부정하며 계속해서 가영을 어르고, 달래고, 타이르려고 했다. 등산을 다녀와 옷을 갈아입고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등등. 병호는 잠깐잠깐 그렇게 시간이 날 때마다 소파에 누워서 태평하게 책을 읽고 있는 가영의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어 댔다.


“이젠 뭐하고 살 건데?”

“조금 쉬면서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다시 직장 구할 거야?”

“회사는 다시는 가기 싫어.”

“그럼 회사 안 가고 뭐 하려고?”

“아, 모른다고.”

“차라리 공부를 하는 건 어때?”

“공부하고 싶은 게 딱히 없는데… 뭐, 일단 그것도 생각은 해볼게.”

“언제까지?”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병호의 물음에 가영이 읽고 있던 책 표지를 탁, 덮었다.


“몰라.”


‘저렇게까지 딱 잘라 말할 일인가?’


 병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나이 박병호의 삶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퀘스트의 연속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일찍 자수성가했고, 그러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바닥까지 한방에 추락해 보기도 했다. 이후로는 사업 재기를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해야만 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언제나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고, 이제 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으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아래로 내리꽂곤 했다.


 타고난 ‘팔자’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런 험난한 삶 속에서도 병호에게는 언제나 눈앞에 닥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들은 전부 생존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렇게 용맹한 전사처럼 인생에 주어지는 과업을 헤쳐 60 중반의 나이가 된 지금, 병호는 자기 딸이 하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나 여태까지 너무 열심히 산 것 같아.”


!?

!?


 놀라서 눈을 치켜뜨는 병호의 이마에 선명한 주름이 잡혔다. 병호는 방금 자신이 들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병호의 입장에서 보면 직장인 가영의 삶은 그렇게 빡세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가영 나름대로도 직장에서 일은 열심히 하겠지만, 그래도 가영이 병호처럼 빚을 지기를 했나, 식당에서 하루 종일 선 채로 불하고 씨름을 하기를 하나, 장사를 하면서 돈 때문에, 그리고 사람 때문에 머리를 싸매기를 하나?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려고 따라가기 급급해서는…. 내가 진짜 뭘 원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할 기회도 없었다고.”

“그래서, 그냥 이러고 있겠다고?”

“응. 이제라도 찾아봐야지. 내가 하고 싶은 일.”


병호는 혼란스러웠다.


‘자아 찾기라니…?’


이것이 63살 부모와 35살 자식의 대화일 수가 있는 건가?

30대 부모와 10대 자식이면 몰라도.


병호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매고는 나즈막히 가영을 불렀다.


“가영아.”

“응?”

“요새 고등학생들도 꿈 얘기는 안 한다….”


 심지어 뉴스를 보면 요새는 가영의 나이의 반토막밖에 안 되는 고등학생들도 꿈같은 건 찾지 않았다. 개중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미리미리 공시를 준비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차라리 다시 육아를 하라면 하겠다. 손주 봐줄 준비 OK란 말이다. 그렇지만 다 큰 딸에게 찾아온 사춘…아니 지랄기에 팔자에 없는 30대 육아를 하게 생긴 병호는 속이 갑갑해졌다.


 “넌 남들 같으면 시집가서 독립할 나이에! 이렇게 다시 부모 집 들어와서 사는 거 불편하지도 않아?”

 “괜찮은데.”

 “너, 옛날에는 나랑 같이 못 살겠다며?”

 “그건 10년도 더 전이잖아. 사람 마음은 원래 계속 바뀌어.”


 얄밉게도, 한 마디도 안 진다. 병호는 기가 막혔다. 차라리 20대 때 같이 살다가, 30대가 되어서 내보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렇지만 한창 클 10대, 20대 시절에는 별거하다가 다 늙은 30대, 60대가 되어서야 동거하는 가족이라니… 뭔가가 너무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병호의 갑갑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땐 그 때고, 막상 살아보니 뭐…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은데?”

“…”

“아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직전까지의 대화의 양상에 비춰봤을 때 좀 의문스러울 정도로 듬직한 말투였다.


‘뭐지, 그래도 금방 다시 독립해서 나가겠다는 건가?’


 병호가 그렇게 잠시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는데, 가영이 뒤이어 말했다.


“50세 이하 성인 30%가 부모와 동거한대.”

“…”

“오늘 뉴스에 나오더라.”

“… 네가 할 소리냐?”


 병호는 다시 한번 제 혈압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박병호에게 닥칠 시련의 날들에 비하면, 이것은 단지 서막에 불과했다.







***





똑똑-


“박가영, 일어나라.”

“아, 진짜, 쫌!”


 아침 댓바람부터 노크 소리에 눈이 떠지자마자 가영은 짜증을 냈다. 


 박가영이 이 집에 기어들어왔던 초창기. 박병호는 제 눈앞에 닥친 모든 상황을 부정하며 가영을 다시 사회 전선으로 돌려보내려고 애를 썼었다. 약 한 달 정도 그렇게 소용 없는 노력을 한 다음에야 그는 제 노선을 바꿨다.


 가영을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이 집 안에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병호가 집 안에 있을 때만이라도 가영이 제 맘대로 널브러지지 못하게 들들 볶으면서 말이다.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병호의 목소리에 가영은 짜증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병호가 등산에 갈 시간이다.


 가영이 온갖 한숨을 푹푹 쉬어대며 잠이 덜 깬 몰골로 방문을 열면, 그 앞에는 언제나 완벽하게 등산복을 갖춰 입은 병호가 서 있었다. 아침형 인간 박병호의 모닝 루틴에 가영의 기상을 확인하는 과정이 추가된 것이다.


 ‘그냥 혼자서 일어나서 등산 다녀오면 될 거 가지고….’


 병호는 꼭 이렇게 가영을 깨웠다. 처음에는 등산까지 같이 데려가려고 했었는데 그건 이내 포기했다. 가영이 너무 격렬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신 저렇게 꼭 잠은 깨워놓고 나갔다. 아침부터 퍼질러 누워 있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이.


 병호는 그렇게 꼭 가영의 기상 여부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현관문을 나서 등산을 하러 갔다. 어차피 병호가 조금 있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출근한다는 것을 아는 가영은 더 이상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그녀는 대충 과일 몇 개를 집어 깎아 먹은 다음,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그리고는 마음에 드는 채널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채널을 넘겼다.


 박가영, 퇴사 2개월 차.

 지금은 일단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1차적으로 세운 목표는 퇴사하기 전까지 회사에 기가 쏙 빨려서 못했던, 밀린 즐거움을 잔뜩 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장은 왓플릭스로 1일 1 시리즈 깨기를 하는 한량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동영상을 너무 많이 봐서 어지러워지면 잠깐 끄고 보고 싶었던 만화책이나 소설을 잔뜩 쌓아놓고 읽기도 하고. 

 세상에는 이렇게 볼 것도 많고, 읽을 것도 많은데.  


 10년 넘게 서점에서 소설책을 파는 MD 일을 해 왔면서도 정작 박가영 본인은 자신이 판매하는 콘텐츠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 굉장한 아이러니 같았다.


 그래도 그 좋은 시기가 마냥 오래 가진 않았다. 병호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그렇게 콘텐츠에 파묻혀 산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가 되자, 그 병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왓플릭스 볼 거 없어' 병.


  하루 종일 만화책만 읽고 소설만 보고 드라마만 보는 것도 첫 1,2주는 좋았는데 한 달 정도 되니까 살짝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시간 쪼개서 왓플릭스를 볼 때는 식당에서 서비스로 주는 감질맛 나는 사이즈의 야쿠르트병 하나씩만 까먹는 살짝 아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눈떠서 잠들 때까지 영화하고 책만 보면서 사는 것은 그 쪼매난 야쿠르트병 30개를 쉬지 않고 빨대를 꽂아서 하나씩 들이키는 느낌이었다. 맛이 없진 않은데, 좀 물리긴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백수 생활 자체가 물리는 건 전혀 아니었지만.


 가영이 그렇게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며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고 있었을 그때.

 가영을 백수 매너리즘에서 극복하게 만들어 준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바로 12월에 새로 런칭한 서바이벌 방식의 남자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린스 메이커>였다.


 그것은 잔인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뮤직넷 채널에서 새로 런칭한 신규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특성은 마치 게임과도 같은 시스템이었다. 기존에 익히 있었던 남자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고전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와 같은 육성 시뮬레이션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프린스 메이커>의 시청자들은 직접 트레이너가 되어 88명의 팔팔한 남자 아이돌 연습생을 육성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최초로 메타버스 방식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메타버스 서비스 피노키오와 제휴, 협력을 해서 진행되는 <프린스 메이커> 오디션은 현실의 방송과 피노키오 서비스 안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피노키오에 마련된 뮤직넷 캐슬이라는 맵에 88개의 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88명의 연습생의 이목구비를 재현하여 만든 프린스 아바타들이 들어 있었다.


 각 아바타들은 실제 연습생이 부여받은 번호와 동일한 번호를 받았는데, 그 공간 안에서 시청자인 국민 트레이너들과 챗봇으로 소통하고 미션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다만 연습생은 트레이너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지만 트레이너 쪽에서 연습생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순 없었다. 그들 사이의 의사 소통은 철저히 선택창과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민 트레이너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피노키오에 접속하여 각 연습생의 방에 들어가 주어진 선택창을 기한 내에 선택했다. 그리고 렇게 다수결에 의거하여 가장 많은 답변이 몰린 선택지대로 해당 연습생의 트레이닝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매주 국민 트레이너에 의해 육성된 각 아이돌 연습생들의 능력치는 방송에서 섭외한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통해 매주 스탯 형태로 화면에 표기되었다. 전주에 비해 레벨이 조금이라도 성장하지 못했거나, 이벤트를 따내지 못한 참가자는 하위 순위부터 차곡차곡 탈락되었다. 때문에 최종 데뷔 멤버 8인의 프린스가 결정되기 전까지 국민 트레이너들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현질을 이끌어 내도록 설계된 뮤직넷의 상술이었다.


 국민 트레이너들은 자신이 소통하고 트레이닝하고 싶은 연습생을 육성하기 위해서 인당 코인을 지불해야 했다. 그것도 매번. 그렇게 지불된 코인의 액수가 클수록 해당 연습생이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받을 수 있는 트레이닝 수준이 올라가는 철저한 피라미드 시스템이었다. 연습실 층수를 지하에서 옥탑으로 올려준다던지, 녹음 부스를 코인 노래방 크기에서 라디오 부스 크기로 키워 준다던지.


 시청자는 ‘트레이너’ 일뿐이었기 때문에 프린스들의 생존과 방출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투표권이 없었다. 최애의 데뷔가 달린 당락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멀리서 서포트 형태로 최애의 성장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트레이너들은 오히려 더 미친 듯이 과몰입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현질을 해댔다. 꽤나 악독한 시스템이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진화하다 못해 이 정도 수준까지 오다니….’


 가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덕질이 아니다.

 식스틴즈로 남돌판에 입덕한 이래 근 20년을 덕후로 살아온 업계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랬다. 지금 가영은 덕질을 하는 게 아니라 콘텐츠 업계의 진화와 흐름을 목도하며, 그 흐름에 직접 참여해 보는 중이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숭고한 행위였다. 


 이토록 가영의 마음은 비장하고, 진지했지만…

 그와 별개로 병호에게 이 상황은 무척 괴로운 것이었다. 매일 퇴근할 때마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52인치 풀 HD TV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재방을 미친 듯이 N차로 돌려보고 있는 30대 중반 백수 딸래미의 모습을 본다는  말이다.


 심지어 가영은 병호에게 살짝 새끼 영업(?)을 시도하기까지 했었다.


“아빠, 잠깐 폰 좀 줘봐.”

“폰은 왜?”

“앱 깔아서 우리 윤성이 좀 육성하게.”

“윤성이…?”

“응. 내 새끼. 얘가 윤성인데 완전 귀엽지?”

“…”

“얘 장난 아냐. 요즘 완전 내 삶의 낙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가영은 정말로 자기 새끼라도 보는 듯이 발그레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에 병호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새끼들 말고 진짜 네 새끼를 데려와!”


 이렇게 비록 영업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가영은 덕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고집 센 박가영의 아버지답게 박병호도 또한 나름대로 은밀하게 딸래미 갱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좀 시대 착오적인 방향이었다. 


“넌 쟤처럼 소녀 가장도 아닌데 왜 손 하나 까딱 안해? 빨래라도 좀 하던가.”


 병호는 가영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병호가 요즘 보고있는 일일 드라마 속 여주인공 ‘샛별이’처럼 집안일이라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가영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오시잖아.”


 ‘오긴 오지. 일주일에 한 번 오니까 문제지.’

 어쨌든 ‘좀 쉬겠다’는 가영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가영은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놀았다. 병호는 딸의 저런 모습을 처음 봤다. 


 그렇게 옥신각신해도 결국 집구석에 틀어박힌 딸래미가 굶지 않게 냉장고를 채워놓는 것은 병호의 몫이었고, 집 치우고 빨래하는 것은 주 1회 방문하는 가사 도우미의 몫이었다. 

 박가영은 그렇게 밥 먹고 똥만 싸는 기계가 되었다. 가영은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이 세상에 그 어떤 생산적인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늬 모습은 너무도 태평해 보였다. 이 상황에 안달을 내고 있는 것은 오직 박병호 뿐이었다. 


 병호는 그런 딸의 한심한 모습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가영이 했던 말이 서라운드로 울리는 것 같았다.


'50세 이하 성인 30%가 부모와 동거한대.'


 병호도 그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캥거루족.'


가끔  TV에 나왔으니까. 


TV서는 다 커서도 부모와 함께 사는 어른 아기들을 '캥거루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첫 취업, 결혼, 출산 연령등이 점점 늦어지면서 부모로부터 자녀의 독립이 늦어지는 가정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도 봤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저 부모들은 참 갑갑하겠다.’ 하고 안쓰럽게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자신의 상황이 될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병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제 딸이 저렇게 놀고먹는 것도 지겨워서 차라리 각성해 주기를.







***





 병호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일까?


 박가영의 각성 시기는 그 해의 마지막 주를 얼마 남기지 않고 찾아왔다.


 어느 오후, 가영은 평소처럼 거실에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 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는 지금 어쩌다 켠 SNS에서 눈에 걸린 M출판사의 피드를 보고 조금 우울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M출판사 단편 소설 공모전 / 덕질 > 당선작 8편 심사평 공개!


M출판사의 앤솔로지 프로젝트 No.2,

<덕질이 체질> 은 202N년 3월에 출간됩니다.


3번째 테마로 찾아올 다음 공모전에도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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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생각 없이 켠 SNS였는데….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아래로 스크롤하던 중. 하필이면 어쩌다 이 게시물이 눈에 딱 걸려버린 것이다.

화면 속 M출판사 피드의 공지 이미지의 '더 보기' 버튼을 눌러 글을 읽는 가영의 눈빛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어차피… 알고는 있었다. 떨어졌다는 걸.


 ‘당선작 발표일도 훨씬 지났는데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렇다. 그녀는 이 공모전의 당선작 발표일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일에 굳이 M출판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찾아보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회피였다.


 물론 가영이 애초에 자신의 소설이 공모전에 당선될 것이라고 막 크게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 단편 소설을 쓰는 것이 그녀에게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참가 과정에서 M출판사 이정아 팀장의 권유가 있긴 했었지만, 아마 이 팀장조차 가영이 당선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 말 자체가 그냥 서점 MD 기분 좋으라고 접대용으로 흘린 멘트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오히려 이 팀장도 가영이 설마 자신의 말을 듣고 진짜로 소설을 써서 지원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수도 있다. 


 가영은 그저 오랜 공백기를 깨고 뭐든지 소설 형태의 글을 써서 이름 있는 출판사에 제출해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했다. 애초에 그 글은 가영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고의 컨디션에서 최고의 상태로 쓴 글도 아니었다. 회사 상황이 한창 안 좋을 때 무리하면서 써냈던 소설 아닌가. 물론 가영은 그 당시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나중에 보니 조금의 아쉬움은 남았다. 


마감까지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회사 일에 치이지만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 높고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 말이다.


그래도 가영은 그런 마음을 어떻게든 잘 봉합했다.


그래도 아직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

비록 완벽하게 만족스럽진 않았더라도, 그 악조건 속에서 기한 내에 '소설'다운 걸 하나 써내긴 했으니까.


 결국 가영이 선택한 것은 정신승리였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에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혼자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었던 만큼, 결과도 당연히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음 먹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역시 별개의 일이었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확인사살을 당하고 나니까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영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마감 3주 전에 알게 되어, 급하게 소재를 생각해 내 기한을 맞추기 위해 호다닥 써낸 그 단편 소설이 그녀의 베스트는 아니었다는 것.


 그렇지만, 강철 멘탈이 아닌 가영은 이런 기습에 쓰러진 뒤에도 곧바로 오뚝이처럼 일어나 '난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겐 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라는 허세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정신 승리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가영은 M출판사의 피드 화면을 캡처해 은수와 인경이 있는 단톡방에 보냈다.


「ㅠㅠㅠ 마상이다.」


 메시지 미확인 알림인 숫자 2가 사라지지 않았다. 백수인 가영과 달리 직장인인 두 사람은 아직 한창 일과 중인 듯했다. 그래도 확인 및 답 메시지는 그리 오래지 않아 날아올 것이다. 아마 두 사람 다 지금쯤 PC 메신저를 엑셀 작업창 테마로 바꿔둔 다음 투명도를 60%로 낮춰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역시나. 잠시 후 울려오는 메시지 알람에 가영은 누워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스마트폰을 붙잡고 앉았다.


「왜. 이거 뭔데?」


먼저 톡을 확인한 것은 인경이었다. 뒤이어 가영이 메시지를 입력하는 동안 남아 있던 1이 마저  사라졌다.


「나 전에 공모전 냈던 거. 떨어짐 ㅠㅠ」

「아…ㅠㅠㅠ」


마침 타이밍 적절하게 은수도 대화에 합류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또 마상이야. 흑흑.ㅜㅜㅜ」


 메시지가 확인이 됨과 동시에 톡방에 각종 귀여운 캐릭터들이 바닥을 긁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모티콘들이 올라왔다. 호들갑스러운 반응이었지만 원래 아픔에는 이 정도의 세레모니가 있어줘야 하는 법이었다. 화면을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영은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톡방에 폭우가 쏟아지듯이 눈물 이모티콘이 줄줄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은수가 갑자기 흐름을 끊으며 말했다.


「야, 근데 너무 우울해하진 마라. 어떻게 첫 작품부터 잘 되겠어?」


 역시 은수는 냉정했다. 그렇지만 그 명쾌함이 눈물 어린 톡방 분위기를 삽시간에 뽀송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건 그래… 이게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

「맞아. 인생은 원래 안 되는 게 디폴트야.」


 그 말이 맞다. 


 하긴 뭐 언제는 박가영 인생이 원하는 대로 한번에 쉽게 풀린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나름 순탄하게 살아온 것 같아도 그 안에서 뭐 하나 쉽게 쉽게 얻어진 게 없었던 인생이었다. 당장 전 직장인 국민서점에 취업하기 전에도 얼마나 많은 불합격을 맛보았던가.


 그러니까, 어차피 인생은 안 되는 게 디폴트다. 

 디폴트 값이 0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긴 하니까.

 별로 심각하게 몇 마디 나눈 것도 아닌데, 그래도 십 년 이상 짬이 찬 절친들의 위로라 그런가. 가영은 금방 기운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


「그래서, 지금은 뭐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지. 그냥 존나 누워 있음.」

「야, 좋다. 천국이네. 나 대신 누워서 아이스크림도 하나 먹어줘라, 하O다즈로다가.」

「ㅇㅋ. 지금 까러 갑니다 ㅋㅋㅋ」


‘냉장고에 하O다즈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뜬 것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이정아 팀장 (M출판사)」


가영은 일단 통화하기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팀장님?”

[MD님, 오랜만이에요!]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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