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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ug 14. 2022

14. 아버지는 짜파게티가 싫다고 하셨어

중년 금쪽이는 반항중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14. 아버지는 짜파게티가 싫다고 하셨어



“석쇠불고기 정식 두 개 하셔서 26,000원입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영은 기계적인 감사 인사를 내뱉으며 계산대 POS기의 결제 버튼을 누르고 신용카드를 꽂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일련의 매끄러운 동작이 마치 어디 미래의 SF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 같았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뇨, 그냥 주세요.”


 계산을 마친 가영은 카드를 빼내어 손님에게 돌려주었다. 홀 직원들이 방금 손님이 빠진 테이블로 빠르게 다가가 자리를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정도 테이블이 정리가 되어갈 때쯤. 가영은 카운터 옆에 놓인 마이크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아, 아. 대기번호 16번, 16번 손님 들어오세요.”


 가영의 인간형 안드로이드 같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가게 바깥에 울렸다. 곧 가게 입구 문이 열리며 16번 손님들이 들어왔다. 가영은 무감한 표정인 상태에서 입꼬리만 끌어올려 그새 다 치워진 빈자리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가영은 손님이 착석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와 멍한 표정으로 POS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후 2시 반이었는데도 가게는 아직 만석이었다. 아버지 가게 장사가 잘 되어서 돈이 잘 벌리는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그 때문에 가영이 주말마다 가게 홀과 카운터를 지키는 알바 자리를 떠맡게 된 것은 별로 기쁜 일이 아니었다.


 작년 연말, 그러니까 대략 한 달 전쯤. 


가영이 ‘웹소설을 쓰겠다!’고 당당히 선언했을 그 때 병호가 지었던 표정은… 뭐랄까….


그래.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가영은 멍하니 POS를 보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





“마흔도 꿈꿀 수 잇는데.” 


가영의 반항적인 말대꾸에 병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속으로 한동안 뭔가를 눌러 삼키던 병호는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넌 미친 거니?”


 이번에는 가영이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병호로서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른 집 부모들은 이미 한 20년 전에 뗐을 자녀의 진로 고민 따위에 뒷목을 잡아야 하다니. 남들 같으면 지금 손주를 안고 있어야 할 나이란 말이다.


“그래. 한 회사에서 오래 일했으니까 좀 쉬어보고도 싶겠다 싶었어. ‘길어야 한 두 달이겠지, 좀 쉬다가 다시 제대로 된 일을 찾거나 하겠지’ 하고 한 달 정도는 잠자코 기다려 준거란 말이다.”

“…”

“그런데, 뭐? 소설을 쓰겠다고?”

“응.”

“너 정말… 다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생각은 없는 거냐?”

“응. 회사는 다시는 가기 싫어.”


 그래도 가영은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처음부터 굉장히 확실하고 일관되게 의사 표현을 해왔던 편이었다. 


‘어쩜 저렇게 똥고집인 건지….’


 병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지 멀쩡하고, 아직 인생이 창창히 남아 있는 30대 중반의 딸래미가 집구석에 틀어박혀 뒹굴거리는 것도 꼴 보기 싫어 죽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소설 나부랭이를 쓰겠다니.


 저 답답스런 꼴을 앞으로 또 얼마나 봐야 하는 걸까.


 막상 냅두면 또 허구헌 날 집에서 TV나 보고 책이나 보겠지? 밥 먹고 똥만 싸면서?


 그건… 안될 일이었다.


 병호는 결심했다.


“그럼 나와서 가게 일이라도 좀 도와. 소설인지 뭔지, 하루 종일 아무 짓도 안 하고 이 집구석에 눌러앉아서 뜬구름이나 잡으면서 빈둥거리는 꼴은 더는 못 본다.”

“그치만…”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 나가.”


 완고하고 엄격한 병호의 목소리는 이것이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명령임을 알리고 있었다.


“나와서 네 밥값이라도 벌란 말이야. 일당은 쳐줄 테니까.”

“…”

“억울하면 월세 대신이라고 생각해. 양심적으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가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병호의 제안을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보는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가영이 병호에게 말했다.


“그럼 주말에만 나갈게. 평일에는 나도 할 일이 있어.”

“뭔 할 일?”

“소설 써야지. 대신 주말은 꼬박꼬박 다 나갈게.”

“…”

“어차피 평일엔 몰리는 시간대 빼고는 사람 그렇게 많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지금 박가영이 그리는 빅 픽쳐는 주 5일은 집에서 탱자탱자 놀면서 소설을 쓰고, 주 2일은 가게에서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가영의 역제안에 병호도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다른 직원들처럼 주 6일 출근을 시키고 싶었지만, 가영의 말대로 평일에는 가게에 굳이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괜히 가영에게 일당만 더 뜯기는 셈이 될지도 몰랐다.


 문제는, 홀 매니저가 그만둬서 지금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구인공고를 내고 사람을 계속 뽑고는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도 평일에는 어떻게든 가게가 돌아가긴 했으니까. 그래도 가영이 주말만에라도 꼬박꼬박 가게에 나와준다면, 가게를 굴리기가 약간 더 수월해질 것 같긴 했다.


“… 알았다.”


 결국 이런저런 계산기를 돌려본 끝에, 두 사람 사이에 타협안이 성사되었다. 첫 출근일은 새해 첫 주말로 정했다.


 박병호 64세, 박가영 36세.

 세대 구성원 두 사람의 나이를 합치면 딱 100세가 되는 역사적인 한 해의 시작이었다.






***




 그리고 그 역사적인 새해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3주가 지났다. 가영은 약속한 대로 주말마다 꼬박꼬박 <박가네 불고기>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주말마다 12시간씩 가게의 카운터를 지키는 가영의 눈은 마치 간을 육지에 빼두고 온 토끼처럼 영혼이 없었다.


 그 의욕없는 모습을 박병호가 놓칠 리가 없었다. 병호는 64세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오픈 주방을 진두지휘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 마치 안드로이드 같이 표정을 잃은 가영의 뚱한 모습을 보게 되면 또다시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이렇게 가영을 주말에라도 집 밖으로 끄집어내어 일을 시키면 괜찮을 줄 알았다. 뭐,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도 종종 주말에 와서 피크타임마다 일을 도와주고 가긴 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병호가 집뿐만 아니라 일터에서도 가영의 꼴 보기 싫은 모습을 더 많이, 자주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도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말이다.


 지금 카운터에 뚱한 얼굴로 서 있는 가영은 새해를 맞이하여 나름대로 심기일전해보겠답시고 머리를 짧게 똑단발로 자른 상태였다. 그녀는 주말마다 커다란 후드티에 추리닝 바지를 대충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가게 카운터에 섰다.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다. 


 원래도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지만, 저렇게 추레하게 입고 무표정하게 멍을 때리고 있는 얼굴을 보니 마치 똥이라도 씹은 것 같아 보인다. 그야말로 억지 춘향이 따로 없었다.


 보다 못한 병호가 가영에게 표정 좀 펴라고 한 마디 하려고 주방을 나서 카운터로 다가가던 중이었다. 마침 병호 또래로 보이는 손님이 계산대에서 가영에게 카드를 내밀며 하는 말이 들렸다.


“부모님 돕는 거니? 기특하네.”


 병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병호는 무심코 자신의 딸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제서야  어쩐지 자신의 딸이 좀 나이에 맞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낼모레 마흔인 애가 남들 눈에도 정말 ‘애’처럼 보이는 건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러다 쟤가 철딱서니 없는 30대 중반이라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더 쪽팔릴 것 같았다.


 병호는 아무래도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 가영과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박가영, 퇴사 3개월차.

서른 여섯이 되었다.

이제는 슬슬 노력이라는 걸 좀 해볼 생각이다.


 ‘웹소설을 쓰겠어!’


 라고 결심했던 한 달 전의 그날.


 가영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인터넷 검색창에 ‘웹소설’을 검색했다. 그리고는 검색창에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작가 카페에 가입했다.


 일단 신입 회원으로 가입한 가영은 한동안 부지런히 카페를 눈팅하고 댓글을 달면서 등업 조건을 채웠다.

 그 외의 시간에는 대부분 가장 대표적인 웹소설 연재 플랫폼인 텍스피아에서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평일에는 병호가 출근하면 그때부터 폰을 잡고 소파에 누워 텍스피아에 접속했다. 텍스피아 사이트 메인의 대분류 화면에 표시되는 현대판타지, 무협, 로맨스판타지, 현대로맨스, BL 분야의 베스트 목록을 매일매일 체크하면서 각종 웹소설을 읽었다.


이른 바, ‘인풋’이었다.


 웹소설 작가들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행위를 전부 인풋이라고 칭했다. 때때로 영화나 다른 소설 등도 인풋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그 대상은 주로 다른 웹소설이었다. 작가 카페의 기성 작가들은 항상 이렇게 입을 모아 강조했다. 


‘웹소설을 읽어보지도 않고 웹소설을 쓸 순 없다.’


 이제 막 망생이가 된 가영은 인터넷에 올라온 기성 작가 선배들의 충고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단 한동안은 느긋하게 상위 랭킹에 올라오는 분야별 웹소설들을 읽어보면서 인풋에 힘써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본인이 어떤 분야에 재미를 느낄지, 쓴다면 어떤 분야를 쓸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볼 예정이었다.


 그래서 가영은 각 분야별로 일단 10위권 내에 꾸준히 올라오는 모든 소설의 10회 차 정도까지 싹 다 읽어보았다. 그러다 재미를 느끼거나 괜찮다 싶은 것이 있으면 이어서 쭉쭉 읽어나갔다. 그러다 흥미가 가는 키워드가 생기면 키워드로 검색해서 더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영은 왜 웹소설 작가들이 하나같이 인풋을 강조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웹소설은 상업 소설이었다. 거기에는 일반 소설과는 다른 웹소설만의 문법이 존재했다.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이 읽어보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웹소설은 문장 구조가 간단했고, 대화 장면이 많고 전개가 빨랐다. 문장 한 줄 한 줄에 무게를 주어 독자들을 그 자리에 멈춰있게 하는 대신 뒷 내용이 궁금해서 빨리빨리 읽고 싶어 안달나게 만들었다. 때문에 약 5천 자 정도 되는 한 편 내에도 각각의 기승전결이 있어야 했다. 글 자체는 후루룩 읽히면서도 중요한 전개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구성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이런 식이다 보니 웹소설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술술 그 상황이 마치 그려지듯 떠올랐다. 때문에, 소설이라기보다는 마치 상황을 나열한 시나리오나 대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재밌었다.

 정말로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싶을 정도였다.


 텍스피아에는 각 분야별로 연재되고 있는 소설 종수도 정말 정말 많았고, 키워드도 너무나 다양했다. 볼수록 이 많은 소설들이 무료로 연재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본인이 어떤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러한 취향의 작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웹소설은 소재나 설정에 있어서 거의 한계가 없었다. 회귀, 빙의, 환생과 같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판타지적인 설정을 가미하면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설정이 비현실적이거나 유치하게 느껴지다가도 슥슥 넘겨가며 읽다 보면 어느새 최신 회차까지 쭉쭉 이어지곤 했다. 그러다 최근 올라온 회차까지 다 읽어버려서 '다음 회차가 없습니다'라는 팝업이 뜨면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마치 도파민 중독 같았다. 그리고 세상에는 중독자들이 넘쳐났다. 가영은 텍스피아 상위 랭킹에 오르는 무료 연재 웹소설들의 터져나갈 듯한 조회수를 볼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니, 웹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단 말이야? 이 좋은 걸 여태까지 나만 모르고 살고 있었네.’


 솔직히 가영도 웹소설을 접한 이후로 일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무료로도 이렇게 읽을 수 있는 게 많았다니.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이 이렇게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기발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니? 


 국민서점에서 11년을 일했던 전직 소설 MD 박가영으로서는 그야말로 신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종이책 매출이 점점 떨어지는 게 독서인구가 줄어들어서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스토리를 좋아하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게 아니라, 그들이 시간을 들여 소비하는 콘텐츠의 유형이 바뀐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점점 가영의 마음속에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3주 정도 주 5일 동안 눈이 빨개질 정도로 웹소설들을 들여다봤더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뇌에 웹소설 인풋을 왕창 때려 부은 가영은 이제 슬슬 자신이 어떤 분야로 처음 연재를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떠올렸던 것은 현대 로맨스 장르였다.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가영은 몇 달 전 장기 연애를 했던 준성과의 이별 후 연애에 약간 현타가 와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만들어낸 이야기라지만, 이 상황에서 남녀 간의 알콩달콩하고 애절한 연애물을 잘 쓸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애정 씬에 감정이입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로맨스 작품에 연출해야 하는 섹텐이나 19금 씬을 꼴리게 잘 쓸 자신이 없었다. 정작 현실의 박가영 본인이 섹스를 전혀 못하고 수녀처럼 살고 있다 보니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일단 로맨스 쪽은 제끼자.’


 그렇게 마음 먹은 가영은 자신이 그동안 읽었던 웹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문득 최근 텍스피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 소설이 떠올랐다. 


 최근 종종 1위를 하는 작품은 연예계를 다룬 현대 판타지물이었다. 대충 줄거리는 이러했다. 


 주인공은 30대 중반의 남성이다. 그는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신당하고, 인생이 나락에 몰린 상황에서 자살을 택한다. 그런데 자살한 다음 눈을 뜨니까 데뷔를 앞둔 신인 아이돌의 매니저로 빙의를 한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빙의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주인공은 진짜 자신을 자살로 몰아갔던 상황과 관련된 비밀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본인이 담당하는 아이돌을 탑의 자리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토리 자체는 흔한 빙의물 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은 현장감이 엄청났다. 아이돌 매니저들이 해야 하는 스케줄 관리나 SNS 및 커뮤니티 관리, 아이돌의 스캔들 관리나 매니저의 고충 등등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댓글로 종종 ‘이 정도면 작가님이 실제로 연예인 매니저 생활을 좀 해본 게 아닐까요?’하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였다.


 실제로 고증이 훌륭한 소설이긴 했다. 거의 반평생 넘게 아이돌 처돌이로 살아와서 나름 빠삭(?)한 가영이 봤을 때도 연출되는 상황이나 묘사에 별로 어색함이 없었으니까.


가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흠…. 아이돌이라….’


 때마침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은 가영이 환장하고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 <프린스 메이커>의 본방일이었다. 가영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TV를 켰다.


 채널은 마침 뮤직넷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뮤직넷 채널에서는 곧 있을 <프린스 메이커>의 본방을 앞두고 이전 회차 방송들을 무한 재방송하고 있었다. 가영은 그 와중에도 본인의 프린스인 조윤성을 찾기 위해 매의 눈으로 풀 HD TV 화면 구석구석을 살폈다. 


무슨 군대처럼 똑같은 옷을 입은 프린스들이 가득 찬 화면을 보니까….


자꾸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가영의 눈빛이 급 진지해졌다.


프린스 메이커….

아이돌.

오디션.

메타버스.


 그런 키워드들이 가영이 지금 시선을 고정한 TV 화면 위로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증강현실처럼 겹쳐졌다. 마치 만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웹소설을 하도 봐서 그런가, 그것이 마치 현대 판타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상태창’ 같아 보이기도 했고.


 눈앞에 뜬 단어들을 훑듯이 바라보는 순간, 가영의 머릿속에 번뜩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거, 한번 2차 창작처럼 접근해 보면 어떨까?’


<프린스 메이커> 같은 가상의 아이돌 오디션이 존재하는 세계관을 만들어서…

내 최애 프린스 윤성이를 모델로 한 주인공을 만들어서…

평행세계에서 내 새끼를 데뷔시키는 마음으로 한번 써보는 거야!


현대판타지 아이돌물로 해서, 2차 창작을 하듯이 1차 창작 콘텐츠를 만들어 보는 거지. 

이름하고 설정만 좀 바꾸면 되잖아? 


 생각을 거듭할수록 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애초에 가영은 2차 창작러 출신이었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아예 팬픽을 쓴다는 생각으로 접근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일단 아이돌 2차 창작이라면 완결 경험도 꽤 있었으니까, 자신도 있었다.


‘유레카!!’


가영은 누워있던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장 설정을 짜 보자!’


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갑자기 솟아오른 열의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였다. 현관으로부터 삑삑-하는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 병호가 돌아온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오던 병호는 주먹을 꼭 쥔 채로 거실 한가운데에 벌떡 일어나 있는 가영의 모습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차라리 하던 대로 소파에 눌어붙어 있기나 하지, 저러고 발딱 서 있으니 뭔가 더 불안했다. 심지어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묘하게 좀 상기되어 있었다.


“왔어?”

“응.”


 그때였다. 켜져 있는 TV 화면에서 <프린스 메이커> 본방이 막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영의 머리가 홱 화면으로 돌아갔다. 그 바람에 턱 라인에 맞춰 자른 똑단발이 홱 휘날렸다.


 몽실 언니 같은 검정 생 단발머리에 헐렁한 긴 팔 박스티에 반바지. 


‘하긴, 저 뒷모습을 누가 30대 중반으로 볼까….’


그 모습에 병호는 마침 가영에게 말하려 했던 게 생각났다. 지난 주말에 말해야지 생각했다가 그새 잠깐 잊고 있던 것이었다.


“가영아.”

“어?”


 가영은 대답은 했지만, 병호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TV에서 흘러나오는 <프린스 메이커> 본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병호는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주먹을 꼬옥 쥐고 서 있는 가영의 뒷모습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낼모레면 마흔인데. 중년 여성이 그런 생머리는 좀 아니지 않나?”


 그 말에, 마침내 가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일주일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프린스 메이커>의 본방이라 한 장면도 놓칠 수 없건만. 그것을 포기하고 병호를 똑바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가영의 눈빛이 매서웠다. 병호는 이쯤에서 늘 가영이 본인의 단골 멘트를 칠 줄 알았다.


‘나 마흔 아니라니까.’


 그런데, 의외로 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병호를 빤히 쳐다보던 가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TV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 똥고집을 어쩌나….’


 곧 중년의 몸에 깃든 중딩의 영혼이라니.


 행여 저러고 다니다 철딱서니 없는 걸 남들한테도 들킬까 봐 정말 겁이 났다.


 그러나 가영은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크게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




 다음날 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병호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거실의 TV는 언제나처럼 켜져 있는 상태였다. 다만, 소파의 등받이 위로 뭔가가 삐죽 솟아 나와 있었다. 마치 푸들처럼 까맣고 복슬복슬하고 꼬불꼬불하고 부피감이 굉장히 큰 무엇인가였다.


 ‘설마 얘가 뭐 어디서 개라도 키우겠다고 데려온 건 아니겠지?’


 병호는 두려운 마음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차마 안으로 한 발짝도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소파 위로 얼핏 보이던 그 까맣고 구불구불한, 부피감을 자랑하는 무엇인가가 흔들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이내 쓰윽, 등받이 위로 올라오며 전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병호가 뭔가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파 등받이 위로 쑥 올라온… 좌우로 부채꼴 모양으로 쫙 펼쳐져 꼬불꼬불거리는 그 털 뭉치 아래로 보이는 박스티와 반바지는….


“왔어?”


 박가영이었다. 다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하루 아침 새에 머리카락이 아니라 웬 까만색 짜파게티 면발 같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악!!”


 병호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히피 펌.”


 가영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멀쩡하던 머리에 갑자기 왜 그런 짓을 했어?”

“왜. 아빠가 그랬잖아.”

“뭐?”

“내 머리가 중년 여성 같지 않다고. 중년 여성 같은 머리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최대한  볶아봤는데, 어때?”


 어쩐지. 

 어제 가영이 ‘나 아직 마흔 아닌데’ 라고 삐딱하게 말대꾸를 안 한다 했다. 


꿈에도 상상 못한 박가영의 급격한 스타일 변화에 병호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딸아,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러한 병호의 동요를 못 본 건지, 못 본 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영이 또 말했다.


“펌 중에 이게 제일 꼬불거리는 거래. 기왕 할 거 확실하게 해야지?”

“…”

“나 이제 중.년.여.성.이니까. 생머리는 좀 그렇다며?”


 가영은 굳이 ‘중.년.여.성’을 하나하나 끊어 뱉으며 강조를 주었다. 아마 전날 병호의 말에 적잖이 빡친 것 같았다. 병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입만 열었다 다물었다 했다.


‘오죽했으면 머리를 저렇게….’


 그러다 결국 한숨을 쉬며 한마디 내뱉었다.  


“너 … 식당일 하는 애가… 설마 내일 그러고 출근할 거냐?”

“뭐 어때. 카운터도 눈에 잘 띄고 좋지 뭐.”


가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 아빠가 인간은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며? 내가 차마 심장 이식은 못하겠어서 대신 머리라도 볶은 거야.”


‘기억력은 좋네….’


병호는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의지도 없어졌다.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라.’

확실히 병호가 가영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있었다. 아마 한 16년은 된 것 같다. 그것은 병호가 가영이 20살이 되어 처음으로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 해줬던 말이었다. 


그릇을 크게 가지라고. 쫌스럽게 살지 말고 동물의 왕 사자처럼 매사 담대한 마음으로 용기 있게 살라고 해줬던 말이었다. 


근데 병호는 16년 전에 가영에게 해줬던 말이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져서 16년 뒤의 자신에게 이런 결과로 돌아오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병호의 황망한 반응에 가영은 씩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래도, 사자머리를 한 캥거루는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걸?”

“…”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가영은 매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가영의 뒤편으로 보이는 TV 화면에는 마침 <금쪽같은 내 새끼> 방영이 한창이었다. 화면 안에서는 뉘 집 자식인지 모를 금쪽이가 한창 말썽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영은 지금 그 화면을 등진 채 병호의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머리통에 까맣고 꼬불꼬불한 짜파게티 면발을 뒤집어쓴 꼴을 하고도 씩 웃으면서.


그녀는 박병호의 하나 밖에 없는 딸래미였다. 30대 중반이고, 현직 백수.

박병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30대 중반도 <금쪽같은 내 새끼> 출연 신청하면 받아줄까? 일단 신청이라도 해봐?’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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