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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ug 21. 2022

15. 소개(犬)팅

개의 날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15. 소개(犬)팅



그 뒤, 몇 주의 시간이 더 흘렀다. 어느덧 2월 설 명절 연휴가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박병호는 쉼 없이 달렸다. 설, 추석 명절 당일과 전날 딱 이틀만 쉬는 <박가네 불고기>의 리듬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번만큼은 도저히 명절이랍시고 형제자매들을 만날 면목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다른 식구들에게 알릴 수 있단 말인가?


 30대 중반 딸래미가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채로 집구석에 틀어박혀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 사실을 말이다. 그나마 병호에게 자식이라고는 딱 박가영 하나밖에 없는데. 


 심지어 가영 또래의 조카들은 이미 죄다 결혼해서 애가 하나나 둘 정도는 있었다. 병호의 형제의 자녀들, 즉 가영의 사촌들 중에서 여태껏 싱글인 데다 자식 하나 없는 것은 가영이 유일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가영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 조카 하나도 결혼했다.


 사나이 박병호는 사랑하는 조카들이 결혼할 때마다 매번 축의금을 100만 원씩 시원하게 쾌척했다. 언젠가는 본인도 받을테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가영의 상황을 보면… 본인이 그 축의금을 회수할 날은 요원해 보였다.  


 “으헤헤헷….”


 지금 가영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소파 위를 뒹굴고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고정한 그곳에는 8인치 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태블릿 PC 가 있었다. 가영이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늘 그녀와 함께 하는 저 태블릿 PC. 병호는 그걸 볼 때마다 어디 갖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가영이 밖에 나가서 싸돌아 다니면서 남자라도 만나고 돌아다니면 모르겠는데, 허구한 날 집구석에 누워서 저렇게 태블릿 PC나 끼고 있으니.  


 저 망할 태블릿 PC는 가영을 언제나 따라다녔다. 물론 그녀가 그것을 누운 자세에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진지하게 태블릿 PC를 거치대에 세워두고 키보드를 연결한 채 뭔가를 타이핑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병호가 보는 가영의 모습은 대부분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이 모습대로였다.


 ‘쯧쯧. 저 기계 쪼가리가 완전 남편이나 다름없구먼.’


 LCD 화면 속 세상에 온 정신을 사로잡힌  듯한 가영의 모습을 볼 때마다 병호는 속이 착잡해졌다.

 ‘친척이고 가족이고 뭐고, 올해는 보러 가지 말까? 대충 바쁘다고 하고….’


 그렇게 박병호가 60대 중반의 나이에 뒤늦은 명절 증후군을 앓고 있을 무렵.

 정작 병호에게 명절 증후군을 선사한 장본인인 박가영의 머릿속에는 다가오는 명절에 대한 걱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웹소설뿐이었다. 현대 판타지 아이돌물 웹소설을 연재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이후 그녀는 몇 주 동안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여 설정과 플롯, 캐릭터 구상까지 끝낸 상태였다. 이제 시놉시스 작업이 끝나면 좀 더 다듬어서 초반 20회 정도의 비축분을 쌓을 예정이었다. 그런 다음 텍스피아에 무료 자유 연재를 시작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데뷔 가즈아.’


 가영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그러면서 가영은 틈틈이 인풋에도 힘썼다. 얼마 전 작가 카페에서 ‘초보 작가 지망생을 위한 꿀팁’으로 언급된 아래 팁을 보고 나서였다.


‘막상 연재 시작하면 인풋하기가 쉽지 않으니 인풋은 쉬는 동안 최대한 많이 해 두세요.’


 그래서 가영은 정말 열심히 인풋을 했다. 그녀의 하루는 거의 둘로 양분되었다. 그녀는 주로 머리가 맑은 오전 시간을 활용하여 작품 구상을 하고, 비축분 원고를 쓰고 계속해서 다듬었다. 이후  남는 시간은 영화, 드라마, 웹소설, 웹툰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워치리스트에 쌓아두었던 모든 콘텐츠를 머리에 때려 넣듯 보는 데 몰빵했다. 속으로 계속해서 ‘인풋만이 살 길이다!’를 외치면서. 


 그런 기준에서 보면, 곧 최종화가 다가오는 <프린스 메이커>를 열심히 보는 것도 인풋의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가영이 무료 연재 데뷔작으로 점찍어둔 소재도 아이돌 오디션을 소재로 한 것이었으니까.

 가영은 자기 나름대로는 무척 공을 들여 철저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과정이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병호의 잔소리는 점점 심해졌다. 그런데, 이제 그 방향이 좀 달라졌다.


 병호는 이제 가영에게 더 이상 ‘취업해라’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가영이 ‘웹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한 뒤 대판 싸운 그날 이후 병호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해탈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영이 하고 싶은 대로 두려는 심산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가영이 저렇게 혼자 고집을 부리다가 곧 쫄딱 망해서 지가 알아서 안 한다고 하겠거니 하고 그냥 두는 것 같았다.


 대신, 병호는 가영에게 던지는 공에 살짝 스핀을 주었다. 변화구를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영아.”

 “응?”

 “넌 내가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갑자기 그런 얘긴 왜 해? 할머니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시는데.”

 “너 아빠 젊을 때 개고생한 건 알지? 길에서 노숙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러고 8년을 살았어. 나는 아마 오래 못 살 거야. 몸을 너무 막 썼으니까.”

 “…”

 “나 이러다 갑자기 죽으면 너 진짜 이 세상에서 혼자 어떻게 살래?”

 “…”

 “식당은 안 물려받는다고 하지, 직장은 안 다닌다고 하지. 자꾸 나이만 처먹어가지고, 진짜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병호는 목소리를 무겁게 깔고 그렇게 한참을 밑밥을 깔았다. 가영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본론을 꺼냈다.


“너 정 일하기 싫으면 얼른 선봐서 시집이라도 가던가. 가서 애라도 낳아. 필요하면 결혼정보회사 같은 거라도 등록해 줄테니까.”

“결혼정보회사?”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영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열받은 듯이 째려보는 딸의 눈빛에 사나이 박병호는 순간 좀 쫄았지만 간신히 쫄지 않은 척을 했다.


“그래.”

“미쳤어? 그런 데다 딸래미 매물로 내놓고 대충 등급 매겨서 후딱 치워버리고 싶은 거야?”

“치우다니…”

“됐어. 아빠 말대로 아직 자립도 못 한 백순데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상대한테도 민폐지. 일단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

“…” 

“결정사에 갖다 바칠 돈 있으면 나한테나 줘. 그 돈으로 컴퓨터나 하나 새로 살라니까.”


 그렇게 딸을 취업을 못 시키면 취집이라도 시키려던 박병호의 플랜 B는 씨알도 안 먹히고 좌절되는 듯했지…만.

그때, 동쪽 방향에서 귀인이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구렁텅이에서 헤매던 병호의 인생을 구원해 주었던 고향 후배, 이근수였다.  









***





 명절 바로 직전 주말. 


예고도 없이 불쑥 가게에 들어선 사람은 반가운 고향 후배이자 인생의 은인인 근수였다. 그의 손에는 병호와 병호의 가게 직원들에게 줄 간식거리와 과일이 양손 가득 들려 있었다.


 평소와 같이 뚱한 표정으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가영은 근수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얼굴을 활짝 밝혔다. 가영이 외쳤다.


“아저씨!”


그녀는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가 근수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었다.


“앗, 가영이구나. 아버지 도와드리러 온 거니?”

“아…. 네.”


 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엄밀히 말하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가영이 나서서 솔직하게 ‘아빠 집에 얹혀 살 월세를 벌러 나오는 거다’라고 상세한 사정을 밝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가영이 근수를 처음 본 것은 가영이 이미 20대를 훌쩍 넘겼을 때였다. 그래도 근수는 가영을 볼 때마다 무척 예뻐했다. 근수는 딸이 없이 아들만 둘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영을 더욱 제 친딸 대하듯 한 것이다.


 가영도 근수를 좋아했다. 그녀는 병호가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에도 근수가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병호는 늘 가영에게 근수가 우리 집안의 은인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곤 했다.


“혼자 오신 거예요?”

“응. 곧 명절이라 잠깐 형님한테 인사 좀 하고 가려고 들렀어.”

“아하. 잠시만 여기 좀 계세요, 아빠 모셔 올게요!”


 마침 대기 손님이 다 빠진 시간대라 가게 안은 한적했다. 가영은 주방에 있는 병호를 불러 데리고 나왔다. 병호는 주방용 장화를 신은 채로 앞치마도 벗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주방 밖으로 나왔다.


 “근수 왔구나!”

 “형님, 그간 잘 지내셨죠?”

 “그래, 밥은 먹었어?”

 “아, 오기 전에 조금…”

 “그래? 그래도 좀 들고 가야지. 오랜만에 왔는데.”


 원래 근수는 병호의 식당 근처의 지점을 포함한 프랜차이즈 식당 지점을 두세 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초에 돌연 가게를 모두 정리한 상태였다. 대신 노후 대비를 겸하여 작은 상가 건물을 하나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었. 그러다보니 근수가 가게를 정리한 이후로는 예전처럼 자주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그럼 조금 맛만 볼까요? 하하.”

“그래. 어차피 우리도 밥 먹을 때 됐으니까, 가영이 너도 같이 먹자.”

“응. 3인 상 차려올게.”


 가영은 상 위에 세팅할 기본 반찬을 차리기 위해 일어나서 카트 쪽으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짜파게티 같았던 가영의 머리는 그간 파마가 조금 풀려 있었다. 집게핀으로 나름 최대한 단정하게 봉인해 두니 이제 그래도 적당히 봐줄 만은 한 상태였다. 근수는 그런 가영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병호가 아니라 근수를 보고 가영의 아버지로 착각할 정도로 따뜻한 눈빛이었다.


“가영이도 다 컸네요.”

“쟨 이미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다 커있었어.”

“그런가요?”

“그럼, 벌써 나이가 서른…”


 병호는 잠깐 망설였다. 순간 가영의 나이가 몇 살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호는 평소에 하던 대로 그냥 퉁치기로 했다.


“곧 마흔이야.”

“헉, 그렇게나 됐어요?”


 근수는 깜짝 놀라 가영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가영은 자기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카트 위에 분주히 반찬을 담아 올리고 있었다. 내친김에 셀프 바까지 한 번에 다 털어오려는 기세였다.


“근데 가영이 왜 아직도 결혼 안 했어요? 남자친구 있잖아요?”

“하…. 그게. 말도 마라. 속 썩어 죽는다 진짜.”

“네?”

“… 헤어졌어.”

“헛!!”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회사도 때려치우고 남자친구랑도 헤어졌다더라고. 상견례 직전이었는데… 내가 진짜 쟤 때문에 미칠 것 같다니까?”


 병호의 한탄이 시작되었다. 근수는 어느새 카트에 반찬을 다 싣고 신난 걸음으로 이 쪽으로 걸어오는 가영과, 인상을 팍팍 쓰면서 딸을 욕하고 있는 병호를 번갈아 보면서 슬쩍 눈치를 봤다.


 “취업하라 그러면 다시 일은 안 한다 그러지, 차라리 선봐서 시집이라도 가랬더니 꼴에 그건 또 자존심 상하나 봐.”

 “그럼 지금 가게에서 일하는 거예요?”

 “어.”

 “가게 물려받는 거예요?”

 “그건 또 싫대. 그냥 백수야, 백수.”


 말하면서도 병호는 속이 깝깝한 듯했다. 

 그때였다. 가영이 밀고 온 카트 끝이 테이블에 충돌했다. 꽝 소리에 깜짝 놀란 근수와 병호의 시선이 동시에 가영을 향했다. 가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병호를 째려보고 있었다.


“아빠, 아저씨한테 내 욕했지?”

“… 안 하게 생겼냐?”

“아, 진짜!”


 가영은 투덜거리면서도 테이블 위에 착착 반찬을 세팅했다. 공깃밥까지 세 개 야무지게 올려놓은 가영은 아버지를 쿡쿡 찔러 안쪽 의자로 쑤셔 넣고는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자꾸 구박하지 마. 나는 지금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니까.”

“… 꿈?”


 근수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묻자, 가영이 배시시 웃었다.


“제가요, 웹소설을 한 번 써보려고 하거든요.”

“웹소설…?”

“네. 소설인데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거예요. 잘 되면 대박 난대요. 드라마화가 될 수도 있고… 저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잘하거든요. 한번 진지하게 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근수는 가영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웹소설이 뭔지도 모를 뿐더러 인터넷에 연재하는 글이 어떻게 돈이 된다는 건지….


 그렇지만 한 번 물어보기 시작하면 또 끝도 없을 것 같았다.

 희망 회로를 돌리는 가영의 옆에서 병호가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취업하던가, 시집을 가던가. 그것도 아니면 가게를 물려받던가. 얼른 선택해. 오래는 안 기다려줄 거니까.”


 병호의 말에 가영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듣기 싫다는 듯 밥 한 숟갈을 퍼서 입 안에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근수는 그런 가영과 병호의 모습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쓸데 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근수는 그래도 가영이 걱정스러웠다.


 그가 보기에 가영은 아직 한참 젊고 가능성도 넘쳐 보였다. 인생에서 한창 좋을 이 시기, 가영이 혹시 뭔가 헛된 망상에 빠져서 이대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근수가 가게에 방문했던 며칠 뒤, 명절 연휴 시작 이틀 전날 오후.

병호는 근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형님, 전데요.]

“어, 근수야! 무슨 일 있어?”

[별 건 아니고요. 혹시…]

“응?”

[가영이, 혹시 소개팅할 생각 있을까요?]









***






 박병호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이 그 수많은 굴곡을 통과하면서도 비교적 순탄히(?) 흘러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인생의 여정 속에서 적재적소에 등장했던 귀인들의 덕이었다. 그중 최고의 귀인은 단연 고향 후배인 이근수일 것이었다.


 길바닥에서 구르던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고, 식당 오픈해서 독립해 나가는 걸 지원해 주고. 

 이제는 딸의 소개팅 자리까지 알아봐 주다니. 


그는 정말로 박병호 인생의 구세주가 아닐 수 없었다.


 근수로부터 연락을 받은 당일, 병호는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퇴근했다. 그는 소파에 누워 있던 가영을 일으켜 앉혔다. 졸지에 태블릿 PC 와의 달달한 데이트를 방해받은 가영은 인상을 팍 찌푸린 채로 앉아 있었다. 병호는 재고 따지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소개팅 해라.”


가영은 뭔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듯 인상을 팍 쓰며 짜증을 냈다. 


“아, 나 백순데 뭔 소개팅이야? 안 해.”

“너 왜 이럴 때만 주제 파악해?”


 병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제 딸이지만 박가영은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지 주제를 모를 거면 아예 모를 것이지, 왜 그 기준이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서 사나이 박병호의 속을 이토록 뒤집어지게 하는 것이냔 말이다.


그렇지만 이번 만큼은 병호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근수 아저씨가 소개해준 거다.”


 그 말에 가영이 입을 딱 다물었다. 병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은 안 들어도, 근수 아저씨라면 잘 따르는 딸의 습성을 아는 병호의 전략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가영이 곧 다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뭐라고 부탁한 거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해?”

“부탁하긴 무슨! 근수 아저씨가 네가 걱정돼서 바로 알아봐 준 건데.”

“아니, 근데…!”

“일단 만나 봐. 만나지도 않고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병호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미 가영이 무슨 말을 하든 들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가영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잠시 대치하던 두 사람 중, 먼저 한숨을 쉬며 포기 선언을 한 것은 가영이었다. 근수 아저씨까지 나선 이상 아무래도 도저히 그냥 피해갈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 알았어. 그냥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지?”

“내가 이미 네 번호 넘기라고 했어. 내일 연락 올 거야.”


 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의 움직임이 마치 자동차의 대시보드 위에 있는 강아지 모양 바블헤드처럼 기계적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만난다고는 했으니 1차 관문은 성공적으로 통과한 셈이었다.


 병호는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현금 봉투를 하나 꺼냈다. 내일 가게 영업을 위한 오픈 시재액을 뺀 오늘의 현금 수익 전부였다. 매일 가게를 마감하면 이렇게 봉투에 담아 들고 오곤 했다.  


 오늘의 현금 수익 30만 원. 병호는 까짓 거 시원하게 생색 한번 내보기로 했다. 그 고집 센 딸래미도 조금 양보를 해주었으니까. 병호는 봉투를 가영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걸로 예쁜 옷 좀 사서 입고 나가.”


 가영은 병호가 준 돈 봉투를 슬쩍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많은 돈이 들어 있진 않더라도 그나마 현금 봉투인데. 그것을 눈앞에 둔 가영의 반응은 나이 30대 중반에 아버지 집에 얹혀서 백수 생활을 하는 그녀의 처지를 고려해 봤을 때 신기할 정도로 담백했다.


 잠시 봉투 안을 들여다보던 가영이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이런 나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다니….”

“…”

“부모란 정말 대단한 존재군.”


 그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병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가영의 말에 대체 어디서부터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입을 뻐끔거리다, 그냥 다물어 버렸다.









***





 다음 날, 병호가 예고한 대로 상대측 남자는 바로 연락을 해왔다. 단, 전화가 아닌 톡 메시지로.


「안녕하세요? 박가영 씨?」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HJK였다. 그의 메시지 프로필 사진에는 말티즈로 보이는 하얀색 강아지의 얼굴이 눈코입만 보이게 프레임 가득 띄워져 있었다. 마침 폰을 보고 있었던 가영은 바로 답장했다.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홍진규라고 합니다. 이선민 대리 통해서 소개받아서 연락드려요~」


 이선민…. 


 데면데면한 그 이름은 분명 근수의 첫째 아들 이름이었다. 일찍이 결혼해서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애가 있었던가. 아마도 근수가 가영에게 소개해줄 만한 남자를 찾기 위해 본인의 아들을 찔러봤던 모양이었다.


「네, 반갑습니다.」

「가영 씨는 이 대리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저는 이 대리하고 같은 팀에서 일하는데. 직급은 과장이고요.」

「그냥 부모님들끼리 좀 친하세요.」

「그래요? 가영 씨는 무슨 일 하세요?」


 가영은 이 질문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톡이 아직 몇 번 오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빠르게 자신의 신상을 털려한다니.

 사실 가영의 소개팅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7년 사귀었던 전 남친 강준성을 소개팅으로 만났고, 이후 그와 사귀는 기간 내내 다른 소개팅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8년 전 그녀가 준성과 소개팅을 할 당시의 상황은 지금과는 좀 달랐다. 사전 연락에서는 서로 그냥 간단하게 통성명 정도 하고, 바로 만날 약속을 잡았었다. 뭔가 이렇게 압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대충 대답하면 만날 약속 잡고 끝내겠지?’


 가영은 일단 얼버무리기로 했다.


「저 요새는 그냥 좀 쉬고 있어요.」


 어차피 아직 얼굴 한 번 보지도 않은,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지금 자신이 웹소설 작가 지망생이다 어쩐다 하는 내용을 세세하게 얘기해봤자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하자 잠시 톡방에 정적이 흘렀다. 가영이 톡을 보내자마자 말풍선에 붙은 1을 바로바로 없애던 HJK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야, 백수인 거 모르고 소개받았나?’


 가영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잠시의 딜레이 끝에 톡방에 상대로부터의 새 메시지가 뿅 하고 떴다.


「저는 사실 가영 씨가 아버지 가업 승계 준비중이시라고 들었는데요. 식당 일 하신다고….」


 근수 아저씨가 뻥을 친 걸까, 아니면 근수 아저씨의 아들이 뻥을 친 걸까?

 아니면 그 옛날 TV에서 해주던 가족 오락관 프로그램의 <방과 방 사이> 게임처럼 말이 전해지는 와중에 저렇게 된 걸까?


 어쨌든 가영은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무심코 손이 미끄러져, 새로운 상대와 대화할 때 톡방 상단에 띄워지는 ‘친구 추가 / 차단 / 신고’ 버튼 중 신고 버튼을 누를 뻔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만 가영은 애써 이 상황을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근수 아저씨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냥 부드럽게 넘겨야 했다.


「가끔 아버지 가게에 나가서 일을 도와드리긴 하는데, 가업 승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시구나. 이번 연휴 때는 뭐하세요?」

「가게 일 도울 것 같아요.」

「아하, 그럼 언제 보죠? 저 사실 이번 연휴 때 본가 안 내려갈 거라서, 시간 되시면 바로 뵐까 했죠.」


 그 점에 있어서는 가영도 찬성이었다. 남자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사실은 그 반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영은 어차피 지금은 소개팅이든 뭐든 남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고, 지금이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생각해 준 근수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을 뿐이었다. 이 HJK도 그냥 장소가 정해지면 한번 나가 만나서 성의껏 응대한 다음 이후 서서히 페이드 아웃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뭐, 나가 보니 혹시 진짜 괜찮은 사람이 나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 버전 기준으로 마음이 그러했다는 이야기다.  


 가영은 바로 답 메시지를 날렸다.


「좋아요. 설 전날 어떠세요?」

「오, 좋아요. 장소는 어디가 좋으세요?」

「서울이면 어디든 괜찮아요.」

「그럼 강남 쪽에서 뵐까요?」

「네, 좋아요.」

「네, 그러면 제가 갈 만한 데 좀 찾아보고 오늘 중에 다시 톡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혹시 뭐 못 드시는 건 없으시죠?」

「네, 딱히 없어요~」

「알겠습니다.(따봉 이모티콘) 그럼 알아보고 다시 톡 드릴게요!」

「(따봉 치켜올리는 플래시 이모티콘)」


 이후 HJK로부터 톡이 끊기자 가영은 마음이 편해졌다. 다행이었다. 비록 이 남자가 초반에 톡만으로 묘하게 신경을 긁는 포인트가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꽤 정상적인 형태로 커뮤니케이션의 끝을 맺지 않았나?


 ‘그래도 이상한 사람은 아닌가 보네.’


…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박가영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HJK로부터 다시 톡 메시지가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마침 병호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가영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그 사람한테는 연락 왔어?”

“어.”

“만나기로 했어?”

“응.”

“언제?”

“설 전날에. 서울에서.”

“그래? 어때, 괜찮은 것 같아?”

“몰라, 아직 별로 말 안 해봐서. 만나봐야 알지.”


그때였다. 가영의 폰에 메시지 알림과 함께 진동이 떴다. 병호가 눈을 반짝이며 가영을 쳐다봤다.


“그 사람이냐?”

“응.”


 가영은 무심하게 톡을 켜서 남자로부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화창에는 초록창 장소 검색을 통해 찾아낸 강남의 몇몇 레스토랑의 링크들이 줄줄이 와 있었다. 몇 개는 소개팅을 별로 해본 적 없는 가영도 SNS에서 ‘소개팅 명소’로 바이럴 되고 있는 것을 봤던 장소였다.


「이 중에 괜찮은 데 한 군데 찝어 주실래요? 미리 예약해 두게요.」

「네,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기왕 뵙는 거 맛있는 거 같이 먹으면 좋으니까요.」


 가영은 스마트폰의 터치패드를 성의껏 엄지로 토독토독 두드렸다. 비록 그 표정이 영혼이 알코올처럼 휘발된 듯한 무표정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그녀의 얼굴을 볼 일은 없으니까.  그래도 지금 가영이 늘 남편처럼 끼고 있던 8인치 태블릿 PC는 소파 위에 쭉 뻗은 허벅지 위에 엎어진 채로 방치된 상태였다. 


아까부터 가영의 모습을 쭉 지켜 보고 있는 병호의 표정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누가 보면 마치 소개팅을 하는 대상이 박가영이 아니라 박병호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가영은 잠시 HJK와 대화를 나누며 식당을 골랐다. 식당을 확정 지은 직후까지 HJK의 반응은 지극히 정석적이었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까 내일 전화해서 한번 예약되나 물어볼게요. 안 되면 아까 두 번째로 괜찮다고 하셨던 데 전화해 보고요!」

「네, 감사합니다. (대충 감사하다는 의미의 플래시 이모티콘)」


 만날 날짜도 정했고, 시간도, 장소도 정했겠다. 이제 소개팅에서 만남 전 단계까지 할 만한 일은 어느 정도 다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가영은 스마트폰의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톡을 종료하고 메인 화면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대로 만나는 날까지 이 남자로부터 더 이상 톡이 없는 게 서로에게 제일 베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HJK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한참 스마트폰을 두드리던 가영이 화면을 끈 채로 소파에 폰을 내려두자 마자, 병호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대화 끝났어?”

“응, 만날 장소 정하느라.”

“그래? 너 꼭 예쁘게 하고 나가. 그 머리부터 좀 어떻게 하고.”

“아, 왜. 지금 파마 좀 풀려서 묶으면 딱 예쁘구먼.”

“너 솔직히 그 머리…. 내가 옛날에 노숙할 때 봤던 장발 노숙자들 머리 같아….”

“뭐?”


 그렇게 잠시 투닥거리고 있는데, 가영의 스마트폰 화면이 다시 켜지며 반짝였다. 불이 들어온 잠금화면에는 ‘HJK님으로부터 톡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알림 팝업이 떠 있었다. 


‘뭐지? 할 얘긴 다 끝났을 텐데.’ 


가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톡 메시지 어플을 다시 열었다. HJK로부터 온 메시지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저기, 근데요… 가영 씨.」


 ‘뜬금없이 왜 부르지?’


 별 말 아닌데 그냥 한번 불렀을수도 있었지만 왠지 촉이 좋지 않았다. 가영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네, 왜 그러세요?」

「가영 씨는 혹시… 제 프사 보셨나요?」


 ‘대체 무슨 소리지?’


 생뚱맞게 웬 프사?


 ‘자기 꺼 한번 봐 달라는 건가?’ 


 가영은 슬쩍 시선을 돌려 HJK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화면 가득 확대된 하얀 말티즈의 앙증맞은 이목구비가 화면을 채웠다. 대충 사진을 확인한 가영은 다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톡방으로 돌아와 대답을 입력했다.


「네. 봤는데요.」

「귀엽죠?」


그 말에 가영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상황에서 그걸 물어볼 필요가?’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야겠다 싶었다.


「네, 귀엽네요.」

「우리 집 강아지 보리예요. 4살인데요, 저를 참 잘 따르고요.」


 ‘얼씨구. 개 자랑이 술술 나온다.’


 가영은 다시 한번 HJK의 프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말티즈 치고도 좀 귀엽게 생긴 편이긴 했다. 


‘뭐, 제 자식은 다 예쁜 법이니까.’


 그렇지만 HJK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말을 자신에게 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창에 아까 그에게 보냈던 대답을 복사-붙여넣기하여 입력한 뒤 대충 이모티콘을 하나 찾아 붙였다. 반복된 대답이니 배리에이션을 좀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네, 귀엽네요. (대충 눈에 하트가 박힌 플래시 이모티콘)」


가영의 메시지를 확인한 HJK로부터는 잠시 몇 초간 답이 없었다.

가영으로부터 원했던 반응을 얻어낸 것일까? 


 ‘뭐야. 싱겁게.’


 잠시 정적이 흐르는 대화창을 보며 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개를 존나 사랑하나? 그래서 나한테 자랑하고 싶었나?’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지금 상황이 좀 찝찝했다. 그때였다. 잠시 조용했던 대화창에 다시 HJK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실은 아까부터, 저희 보리가 가영 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 말에 가영은 순간 당황했다. 대체 지금 HJK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개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이지?’


아니 그리고 가영이 무슨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도 아니고, 개가 하는 말을 가영이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인가?


 이것저것 떠오르는 의문만 한가득이었다. 그렇지만 가영은 일단 의문을 숨기고 메시지를 보냈다.


「뭔데요?」


 가영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1이 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2초도 안돼서 메시지 하나가 떴다. 두 사람이 있는 대화창 화면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을 정도로 긴, …으로 줄임 표시까지 되어 있는 극강의 장문 메시지였다.


 안 읽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가영에겐 국민서점에서 문학 파트 MD로 일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해제와 보도자료를 읽었던 짬바가 있었다. 때문에 가영은 머리로 미처 그 메시지의 위험성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눈으로 먼저 그 메시지의 윗부분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가영 누나! 왕왕! 저는 진규 형의 동생 보리예요. 4살이고요, 여자아이랍니다. 우리 진규 오빠는 저한테 정말 잘해줘요. 맨날 산책도 같이 나가주고요, 간식도 주고요. 저는 진규 오빠를 정말 좋아해요. 힘도 쎄고, 잘생겼고, 캡짱 멋지거든요.」


 윗부분만 읽었는데 이미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개 빙의라고? 실화냐.


 내가 지금 혹시 톡이 아니라 웹소설을 읽고 있는 건가?

 아니 그리고 저 말투 뭔데. 형이었다가 오빠였다가 난리 났는데?

 중간에 성전환시킨 건가?


 눈앞이 잠시 아득해졌다. 그래도 가영은 이를 악물고 메시지의 아랫부분을 이어서 읽어 내려갔다.


「진규 오빠는 누나를 만나게 되는 것을 너무너무 기대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게 있대요. 사람 많은 강남에서 누나를 만나야 하는데, 누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아직 모른다는 거예요.」


 갑자기 강아지의 성별이 다시 수컷이 된 혼란스러운 상황은 그렇다 쳐도


 가영은 그제야 자신의 톡 프사가 뭐였나 떠올려 봤다.


‘뭐였더라, 내 사진은 확실히 아니었고….’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문장이 좋아서 찍어놨던 페이지 사진을 올려놨던 것 같은데?


 그제야 가영은 깨달았다.

 톡방 인터페이스 상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발신자인 자신의 프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HJK의 장문 톡의 목적을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이 새끼가…!’


 경악한 가영의 시선이 아직 채 읽지 못한 메시지의 제일 아랫부분으로 향했다.


「우리 예쁜 가영 누나 사진을 한 장만 보내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저희 진규 오빠가 엄청 좋아할 것 같아요! 왕왕!」


 다행히 HJK와의 메시지 톡방 상단에는 아직 ‘친구 추가 / 차단 / 신고’ 버튼이 그대로 있었다. 가영은 망설임 없이 정 가운데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스마트폰을 소파 위에 패대기쳐버렸다.


“뭐야, 너 왜 그래?”


 가영이 분명히 소개팅 상대와 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병호가 화들짝 놀라며 기겁했다. 그러자 가영은 질색팔색 하는 표정으로 패대기쳤던 스마트폰을 주워들고는 화면 잠금을 해제했다. 아직 남아 있는 HJK와의 톡방을 연 가영은 그의 마지막 장문 톡 메시지를 병호의 바로 눈앞에 들이댔다. 차단된 톡방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다잉 메시지였다.


 병호의 시선이 ‘안녕하세요, 가영 누나!’로 시작하는 그 끔찍한 메시지의 첫 문장부터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이내 그의 얼굴 가득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내 가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 나이에 결혼은 못해도 개는 못 키우겠어서.”


 병호는 누나와 형과 오빠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성별의 개 빙의 메시지를 끝까지 다 읽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한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하이고….”

“진짜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가영의 냉소에 병호는 고개를 떨궜다.


 이번만큼은 빼도 박도 못하고, 가영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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