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들 때 하는 행동
내게는 내 연애사를 나보다 더 줄줄 읊는 몇몇의 친구들이 있다. 누군가는 이름으로, 누군가는 나와 그가 사귄 기간으로, 또 누군가는 특정 키워드로 나와 연루된 연애 인물들을 구분 짓곤 한다. 각자의 연애 성향에 따라 ‘얜 그래도 괜찮았지.’ 하는 인물도 제각각이고, 최악으로 뽑는 남자 리스트도 천차만별이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하는 단 한 명의 연애 상대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애를 이야기할 때 내 표정에서 가장 빛이 났기 때문이란다.
만난 기간은 1년 남짓이지만 나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도 깊이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을 통해 배웠다. 나의 모든 시공간의 축이 한 사람을 기준으로 흘러가는 것은 나처럼 연애를 업으로 삼는 연애지상주의자라도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또 그사이 몇 번의 시작과 헤어짐이 반복되었음에도 그때만큼 사랑이 사랑답게, 연애가 연애답게 기억되는 순간은 없으니 말이다. 헤어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첫 만남부터 마지막 헤어지는 날까지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랑이 죄가 되어 헤어짐을 택했을지라도 그는 그만큼 나에게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 확신은 그의 말 한마디와 눈빛,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서 만들어낸 아주 견고한 결과물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들 때 내가 하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주고 싶은 것을 마음껏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주는 것을 마음껏 받는 것이다. ‘이걸 주면 좋아할까?’라는 생각은 불필요하다.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줘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 테니까. 또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줄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것을 줘도 서운하지 않고, 아무리 큰 것을 줘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의 크기는 똑같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날은 초여름이었고 평소보다 일찍 아르바이트가 끝난 날이었다. 나는 몇 시간 일찍 그를 만날 생각에 신이 나 가까운 마트에 들러 커다란 통에 든 아이스크림을 샀다. 나는 아이스크림이 녹을세라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가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반쯤 왔을 때 인도와 도로를 잇는 턱을 못 보고 달려가다 그대로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고 무릎에서 피도 났지만 나는 지체없이 다시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달렸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그의 집에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있었고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 녹을 텐데.
조바심이 났다. 나는 여러 번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10분쯤 지났을 때 드디어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대뜸 화를 냈다. 대체 전화도 안 받고 뭘 하고 있느냐고, 너랑 먹으려고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 너는 없고 아이스크림은 다 녹았다고, 잘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다 넘어져서 피도 난다고 말이다. 나는 정말 아이처럼 떼를 쓰며 울었다.(지금도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는 어차피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이라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로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친구의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내가 앉아있는 집 앞 놀이터로 달려왔다. 그리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피가 나는 내 무릎을 보고는 속상한 얼굴로 나를 달래며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그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는 아이스크림인지부터 내가 어쩌다가 넘어졌는지, 도착해서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이 놀이터를 몇 번을 서성였으며, 또 전화를 거는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내가 말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의 집에 갔고, 또 급한 마음에 턱을 못 봐서 넘어졌고, 여름이다 보니 아이스크림이 녹은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내게 내내 사과를 했다. 말도 없이 가서 미안하다고, 넘어져서 아파하고 있는데 혼자 신나서 축구를 하고 있어서 미안하다고,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도 모르고 전화를 늦게 받아서 미안하다고. 나는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고 그 역시 별일 아닌 일에 너무 크게 울어버린 나를 채근하지 않고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일어났고 우리 중 그 누구도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챙기지 않았다.
그 뜨거운 여름밤,
녹지 않은 건 우리 마음뿐이었다.
별 것 아닌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처럼 마음껏 주고 싶은 것을 주면서, 받고 싶은 걸 받으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여름날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면서도 ‘그가 아이스크림을 안 좋아하면 어쩌지?’, ‘집에 없으면 어쩌지? 전화라도 해보고 갈까?’, ‘괜히 사달라고도 안 했는데 부담 주는 건 아닌가?’ 이 모든 자잘한 고민들은 상대방을 향한 배려라는 보기 좋은 이름을 붙여놓았지만 사실 거절당할까 두려운 마음이다. 나이가 들수록, 동시에 앞뒤를 가리게 될수록 연애 안에 이런 고민들은 늘어났고 그만큼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는 일에도 마찬가지다. 자꾸 있지도 않은 속뜻을 혼자 추궁하고 곡해하는 일이 잦아졌다.
언젠가 다시 그때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 마음껏 주고 싶은 것을 안겨 주는 날이 올까? 뜨거운 여름날에도 녹지 않는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지금은 자신이 없다. 나는 오늘도 그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바쁜 와중에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하지?’ 하고 5분쯤 망설였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