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보라 Sep 08. 2020

문자메시지 : 박제된 다정함

그때처럼 다시 나를 예뻐해 주기를,

 예전엔 카카오톡이라는 메신저가 없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내 문자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는 거고, 또 문자를 하나 보내려면 글자 수를 맞춰서 보내야 하는 정성과 그 길이만큼의 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친절하고 또 비효율적인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그 불친절과 비효율이 주는 낭만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메모해두는 것을 목숨처럼 사수하는 편이라 좋아하는 사람이 보낸 문자 역시 중요한 기록 거리였다. 당시 휴대폰에는 문자메시지를 최대 60개 정도까지 보관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남자친구가 보낸 문자 중 다시 보고 싶은 걸 저장해두곤 했다. 그리고 60개가 다 차면 나는 그 문자를 복사해서 워드 프로세서로 옮겨두었다. 참 지독하고 징글징글한 기록 병이다. 남자친구와 다투거나 서운한 일이 생기면 저장해둔 문자를 보면서 ‘이땐 이렇게 다정했는데’하고 홀로 침전하기를 반복하거나, 입이 삐죽 나와서는 변해버린 그를 꾸짖는 증거물로 쓰기도 했다. 그러면 변해버린 그에게서 ‘미안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 미안해라는 말의 속뜻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박제된 다정함 같은 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임을 나는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 


연애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대게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그땐 그랬지’하고 추억한다는 건 지금을 그렇지 못하다는 방증이고 분명 그 얼굴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에 대한 연민이 드리워져 있을 테니.


그때처럼 다시 나를 예뻐해 주기를, 

그때처럼 나를 조심스러워해 주기를, 

또 그때처럼 사랑스러운 말들을 참다 참다못해 터트려주기를. 


 이 모든 바람들은 그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 옆에 자신을 붙잡아두는 건 외로움보다 초라함이 더욱 견디기 쉽기 때문이다. 신이 무슨 이유로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미천한 인간인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혼자가 되는 외로움보다 함께하면서 느끼는 초라함을 조금 더 잘 견디도록 설계되어있다. 그래서 부질없는 과거 회상과 기약 없는 낙관적 미래를 꿈꾸며 이별의 시간을 유예하고 꼿꼿하게 초라함을 견딘다. 


 나는 최근에서야 기록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모든 사랑의 언어와 행동은 지금만 유효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오늘 나에게 사랑한다고 했다고 내일도 나를 사랑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이건 지나친 비관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이며, 서운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연인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들을 메일로 백업해 놓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가 해준 기분 좋은 말은 그 순간으로 기억해두고 잊혀지는 대로 두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나중에 그가 변해버렸을 때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내 착각이려니 하고 넘길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결국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는 것 아니냐며 우울해 할 필요 없다. 대신 오늘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내일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어제 ‘사랑해’라고 말한 것을 잊고 오늘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될 일 아닌가? <첫 키스만 50번째>의 남자 주인공 헨리 로스처럼 말이다. 나는 모든 영화는 현실보다 더 영화 같을 수 없다고 믿기에 분명 현실에서도 헨리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이왕 만난다면 그보다 옷을 좀 더 잘 입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